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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프리뷰] <궁리> 역사에서 실종된 천재 과학자 장영실 [No.103]

글 |박병성 사진제공 |국립극단 2012-04-25 4,760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까지의 갈등을 소재로 삼았다. 창제 이후 반포가 늦어진 이유는 한문을 숭상하는 사대부들이 백성들 모두가 글을 읽고 쓰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중국을 등에 업은 사대주의자들이 정치에 깊게 관여하면서, 주체적인 정치를 펴고자 했던 세종과 사사건건 대립한다. 이윤택의 신작 <궁리> 또한 이러한 시대와 정치 환경이 배경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다르다. <궁리>에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천민으로 태어나 역사적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장영실의 삶에 주목한다.

 

 

장영실은 관노의 신분으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정4품 호군에 오른 조선 시대 최고의 과학자이다. 물시계 자격루를 비롯,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를 개발하였으며,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대호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출세가도가 말년에 이르러 위기를 맞게 된다. 임금이 탈 가마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였다가 제작 과정에서 부서지는 바람에 사헌부에서 책임을 물어 태형을 당한다. 세종이 타기도 전에 사고가 발생했고, 장영실을 아끼는 세종의 마음이 끔찍했음에도 100대 태형이 80대로 줄어드는 미약한 감형을 받았을 뿐이다. 그 이전에도 세종이 장영실의 과오를 감싸준 전력이 있다는 점과, 마차를 제작한 조순생이 방면됐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없는 형이었다. 이후 장영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이윤택은 바로 이 의문에서부터 작가적 상상력을 펼친다. 왜 과학자인 장영실에게 임금의 수레를 만드는 일을 맡겼는가, 그리고 왜 태형 이후 장영실은 역사에서 실종되었는가. 이윤택은 장영실에게 부과됐던 형벌과 그의 실종의 원인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실제로는 제작 과정에서 마차가 부서지는 사고가 생긴 것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세종이 온천으로 가던 도중 수레의 바퀴가 빠지는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변경한다. 그 지점에서 극이 시작한다. 세종은 국정을 의금부에 맡기고, 온천에서 눈병과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떠나는 길이었다. 사고를 보고받은 사헌부에서는 장영실을 포함한 궁내 선공감 실무자들을 모두 잡아들인다. 선공감 실무자들은 사고에 의문을 품고 장영실을 제거하기 위한 모함이 아닌지 의심한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독자적으로 시계를 만들고 천측을 관측하는 기구를 갖는 것이 불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술이 명나라에서 훔쳐간 것이라는 의심을 품었다. 실제 장영실은 세종 3년에 윤사웅, 최천구 등과 명나라에 유학하여 최신 천문 기구를 살피고 돌아왔다. 선공감 실무자들이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희생되었을 가능성을 내비치지만 심증일 뿐이다. 유교적 가치를 숭상하는 사대부들의 눈에, 관노 출신인 장영실이 잔재주로 임금의 사랑을 받고 승승장구하는 것이 내심 못마땅하게 보였을 것이다. 작품에서는 이에 대한 희생양으로서의 무게가 실린다.

 

 

세종은 장영실의 스승인 이천을 정계에서 물러난 조말생 대감에게 보내어 장영실을 구명하도록 한다. 조말생 대감은 이천에게 방패군 5백을 거느리고 의금부로 가서 직접 그들을 심문토록 하고, 자신은 영의정 황희와 사헌부 대사헌 정갑손을 만나 단판을 짓는다. 장영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조말생의 입장과, 명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정갑손의 입장이 팽팽히 대립한다. 치밀한 논리와 심리전으로 이루어지는 2막 2장에서 세 정승의 밀담은 명을 숭상하여 따르는 사대부와, 주체적인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세종, 그리고 그 사이에서 실리를 도모하는 대신들을 축소한 조선 정치판이다. 대립된 의견 속에서 균형점을 찾아왔던 황희의 의견이 장영실의 운명을 갈라놓게 된다.

 

왜 장영실에게 수레 제작을 맡겼는가, 하는 의문은 ‘왜 장영실은 조순생과 같이 방면되지 않았는가’와 같은 의문 선상에 있다. 이윤택은 이 작품에서 출신 성분에 어울리지 않은 관직을 성취했던 변방인이자, 주체적인 정치를 펼치려고 했던 조선의 희생양으로 장영실을 파악한다.

 

그렇다면 이제 ‘장영실은 왜 역사에서 실종됐는가’하는 의문만 남는다. 장영실은 관노의 신분에서 임금의 총애로 관직을 얻었지만 여전히 변방인으로서 지식인의 외로움과 한계를 드러낸다. 이윤택은 장영실에게서 시대와 충돌하며 지식의 순수성이 왜곡되는 보편적인 지식인상, 또는 예술인상을 본다. 새로운 기계를 만들고 싶은 개발 욕구를 가진 과학자 장영실에게 예술가의 이미지가 투영된다. 장영실은 세종의 오랜 탐구력을 현실로 실현시켰고, 그것이 신분 상승으로 이어졌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순수한 지적 성취 욕구를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옥중에서 주변의 도구들로 자격루와 혼천의를 만드는 장영실의 모습에서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 보인다. 그러나 그가 만든 기구들이 명에서 들여온 것으로 둔갑하자 그의 위치는 일개 기술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명나라 중심으로 펼쳐진 천체를 조선 중심으로 다시 재편하는 작업을 했고, 세종을 위해 재능을 아낌없이 바쳤던 그에게 태형보다도 서글펐던 것은 자신의 창작물이 타인의 이름으로 세상에 선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족들을 외면하면서까지 연구에만 몰두했던 장영실은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것은 신분도, 명예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장영실이 역사 속에서 실종된 이유를 이윤택은 장영실의 자아 찾기로 해석한다. 세종을 위해 연구하고 삶을 바쳤던 장영실이 비로소 자신만을 위한 길을 찾아 떠난 것이다.
<궁리>는 문화 게릴라 이윤택이 10여 년 만에 선보이는 희곡이다. 그동안 <아름다운 남자>, <조선선비 조남명>을 통해 지식인의 삶을 조명한 그는 <궁리>에서 세종 시대 실재했던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을 통해 시대와 마찰하며 빛났던 한 지식인이자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간다.
중극장에 올라가지만 등장인물의 규모나 스펙터클한 요소는 앞으로의 가능성을 더 기대하게 한다. 세종이 온천에 도착하면 신나는 산대놀이가 펼쳐지고, 행궁에서 돌아와 근정전에 입궁하는 장면에선 화려한 행렬이 이어진다. 옥중에서 장영실이 부실한 자재들로 자신이 개발한 기구를 만드는 장면 역시 마법 같은 환상의 무대예술을 기대하게 만든다. 특히 세종을 위해 조선을 중심으로 천체를 재편하는 장면은 영상을 통해 별자리가 이동하는 효과를 준다. 이러한 스펙터클한 요소뿐만 아니라 이윤택의 농익고 깊이 있는 대사에서는 관록 있는 작가의 면모가 느껴진다. 간수의 툭툭 던지는 가벼운 대사에서 삶의 깊이가 느껴지고, 세 노 정치가들이 치밀하게 파고드는 심리전에서는 노련한 베테랑 작가의 기교가 보인다.

 

<궁리>는 대한민국 대표 연극인인 이윤택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다. 초연은 중극장에서 펼쳐지겠지만, 이번 공연이 뜨거운 호응을 받아 작품이 가진 규모에 맞게 대극장에서 펼쳐지는 호방하고 스펙터클한 <궁리>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4월 24일~5월 13일 백성희장민호 극장
5월 18일~20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달맞이 극장
5월 24일~27일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3호 2012년 4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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