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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프리뷰] CLASSIC [NO.106]

글 |김영주 2012-07-09 3,500

낯선 도시에서 온 러시아 발레의 정수 <백조의 호수>

볼쇼이와 마린스키를 제외한 러시아의 모든 발레단이 내한 공연을 할 때마다 내거는 문구가 ‘러시아 3대 발레단’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제 더 이상 러시아와 한 나라도 아닌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같은 구소련 연방국의 발레단까지 러시아 3대 발레단을 자처하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하나같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러시아 3대 발레단이라고 공인된 단체는 없다. 볼쇼이와 마린스키가 러시아 발레의 양대 산맥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 뒤를 바짝 따라붙은 세 번째 단체가 어디라고 자타가 인정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 돈 많은 후원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덕에 급성장하는 단체도 있고(미하일로프스키 발레단) 전설적인 스타를 예술감독으로 영입하면서 관심을 받는 경우도 있다(그루지아 국립발레단).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발레단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일단 러시아에서 국립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면 어느 정도 수준이 보장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도 있지만, 키로프 마린스키 출신의 발레 스타 이고르 젤렌스키가 2006년부터 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최근 오페라와 발레 양쪽으로 골든 마스크를 비롯한 전 러시아를 대상으로 하는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꾸준히 수상을 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번 내한 공연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러시아 발레단이 전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레퍼토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백조의 호수>이다. 발레의 이데아라고 불리는 고전 발레 중의 고전이며, 기본기를 가장 엄격하게 가르치기로 명성이 높은 러시아 발레의 진가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영화 <블랙 스완>의 빅히트로 인해서 발레 팬이 아닌 대중들도 호기심을 갖게 된 작품인데, 사실 그 영화에서 느껴지는 고통스러운 광기의 발산을 발레에서, 게다가 고전 발레에서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극도의 절제를 통해서 구현해내는 완벽한 아름다움에 대한 판타지를 충족하기에 더 적합한 공연이다. 키로프의 호랑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이고르 젤렌스키가 왕자 역으로 다시 무대에 설지 기대를 모으기도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의 스포트라이트는 왕자님이 아니라 오딜과 오데트를 모두 연기하는 헤로인과 군무수들에게로 맞춰질 수밖에 없으니 그의 출연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는 않길.

|  7월 26일~7월 29일 /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12인의 첼리스트, 열 두 개의 목소리 베를린 필 12첼리스트 내한 공연

1996년 이후 2년에 한 번꼴로 꾸준히 한국을 찾는 단체가 있다. 베를린 필 소속의 첼리스트 12인으로 이루어진 앙상블인데 이들의 연주를 보면 첼로라는 악기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참 우아하게 펼쳐보이는구나 싶다. 레퍼토리의 폭이 굉장히 넓은데, 바흐를 연주할 때나 비틀즈를 연주할 때나 일관된 기품이 있다. 권위 있는 클래식 연주자들이 자신이 얼마나 음악의 다양성을 존중하는지 과시하듯, 또는 대중들에게 관용을 베풀 듯이 팝 넘버를 다룰 때의 묘한 위화감과는 거리가 멀다. 음악 그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과 진중한 태도가 어떤 곡을 연주할 때든 달라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유투브에만 검색해 봐도 기가 막히게 멋진 영상들이 많다.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가까운 악기’라는 첼로에 대한 찬사가 과연 사실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면 관심을 가져볼 만한 공연이다.

|   7월 10일 ~ 7월 11일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꽃이 지던 날의 회상 <카멜리아 레이디>

기자회견에서 강수진은 이번이 국내에서 <카멜리아 레이디>를 춤추는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변이 없는 한 <카멜리아 레이디>를 직접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공연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무대에 선 아티스트의 역량과 컨디션만은 아니다. 도무지 극에 몰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두 번 다시없을 공연을 보는 관객이 된다는 건 참으로 불운한 일이지만,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기 마련이다. 두 주인공이 느끼는 사랑의 환희가 절정으로 치닫는 화이트 파드되의 한중간에 바로 옆자리에서 때 아닌 ‘손에 손잡고’가 벨소리로 우렁차게 터져 나온다거나, 그에 버금가는 사고가 주변에서 서너 번은 족히 반복되는 그런 날 말이다. 당황한 휴대폰 주인이 허둥대는 동안에는 세상도 싫고 나도 싫고 유리잔처럼 부서질 듯 섬세하게 곡을 써서 반주곡이 한낱 벨소리 따위를 이겨내지 못하게 만든 쇼팽도 미워진다. 어쨌든 그 고난과 역경 속에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카멜리아 레이디>를 보았다.

 

전성기를 살짝 지난 듯싶지만 여전히 사교계의 꽃으로 떠받들어지는 코르티잔이 순진무구한 귀족 청년을 만나 진실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첫 줄만 읽어도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동백꽃을 사랑한 아름다운 여인 마르그리트 고티에와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했던 청년 아르망의 비극은 소설에서나 오페라에서나 발레에서나 불행한 헤로인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사실 기구한 팔자의 여자에게 더 큰 슬픔을 얹어주면서 여 봐란 듯이 ‘이 얼마나 가여운 여인인가!’리고 외치는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가학 성향이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하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본 것 같은 대중소설을 원작으로 한 <카멜리아 레이디>에서는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게 만드는 더 깊은 감정이 있다.

 

노이마이어 안무의 아름다움이야 유투브의 조약한 화질로만 보아도 알 수 있다(물론 직접 보면 훨씬 좋다). <카멜리아 레이디>를 더욱 흥미롭게 하는 것은 극 안에 또 하나의 극으로 <마농>을 겹쳐놓고 플래시백 기법을 사용하는 독특한 시도이다.

 

<카멜리아 레이디>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작가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동명의 오페라와 드라마 발레가 모두 성공을 거둔 <마농>은 아름답지만 허영심 많고 방탕한 마농 레스코가 여러 남자를 전전하다가 국외 추방을 당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스토리로만 보면 <카멜리아 레이디> 못지않은 신파인데, 마르그리트는 마농에 감정이입을 해서 자신이 결국 그녀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마르그리트가 사랑의 고통과 다가오는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흔들릴 때마다 망령처럼 찾아오는 마농과 함께 춤추는 장면들은 <카멜리아 레이디>를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현대적인 심리극으로 느끼게 한다.

 

 

공연 내내 강수진은 자신이 인간의 감정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표현하는 예술가인지를 잘 보여주었는데, 그녀의 연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르망과 결별하고 병색이 완연해진 마르그리트가 <마농>을 보기 위해 다시 극장을 찾았을 때였다. 진실한 연인인 데 그리외와 함께 루이지애나의 늪지대를 헤매다 그의 품에 안겨 죽어가는 마농의 최후를 바라보다가 뛰쳐나가는 마르그리트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별도의 안무는 없었지만, 춤 아닌 그저 몸짓만으로도 그녀가 느끼는 깊은 고통은 온전히 전해졌다. 맥밀란의 <마농>은 전막 발레로 본 적이 있고, 마지막 늪지대 장면은 여러 버전의 영상으로도 보았지만, 강수진이 연기하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통해 느꼈을 때만큼 그 결말에 가슴이 미어졌던 적은 없다. 강수진의 힘이기도 하고, 노이마이어의 저력이기도 할 것이다. 마르그리트가 고독한 최후를 맞는 순간, 3막 후반부에서는 내내 무대 한편에 서서 그녀가 남긴 일기장만 읽고 있던 아르망이 고개를 들었다. 가슴에 뭔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한 청년과 한 여인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지만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는 모래알처럼 흔한 이야기를 이런 보석으로 만드는 예술가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   사진제공  크레디아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6호 2012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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