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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프리뷰] <거기> <늙어가는 기술> <수궁가> [No.108]

글 |이민선 2012-09-24 4,073

무심코 위로받게 되는 어느 날 <거기>

제목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단번에 또렷이 드러나지 않으면 미스터리한 재미를 느끼면서도 정답을 몰라 답답해진다. 제목이 ‘거기’라니, 어디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는 대명사 하나로 연극과 첫 만남을 하는 것은 이름과 연락처만 알고선 소개팅에 나가는 것처럼, 단순한 호기심이 이는 동시에 조금의 특별함 없이 그렇고 그런 보통의 결과물을 볼 것 같다는 예상을 하게 만든다. 국내에서 2002년에 초연하고 몇 차례 앙코르 공연한 뒤, 6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는 <거기>의 원작은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작가 코너 맥퍼슨의 희곡 『The Weir』이다. 이제 갓 마흔을 넘긴 맥퍼슨은 1997년에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후, 각종 연극상을 휩쓸며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The Weir’는 둑 또는 댐을 의미하며, 희곡 속에서 둑은 그 동네의 지리를 이야기하던 중에 잠시 언급될 뿐이다. 특별히 눈길을 끌지 않아 의식하진 못했지만 늘 그 자리에 위치해있는 둑처럼, <거기>는 주인공들의 인생의 한 지점에 놓여 있는 평소와 다름없는 어느 하루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맥퍼슨이 쓴 원작의 배경은 아일랜드 서북쪽 끝, 황량한 바닷가 마을의 펍이다. <거기>는 이를 한국의 동쪽 끝, 강원도의 작은 동네 카페로 옮기고, 내용도 한국적으로 번안했다. 극 중 인물인 병도가 운영하는 카페 겸 술집은 여름 한철엔 관광객들이 드나들기도 하지만, 휴가철이 지난 요즘 같은 때는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오두막 같은 곳이다.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퇴근 후 동네 사람들끼리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영국의 펍 문화는 한국의 어느 곳에 옮겨 놓아도 어색하지 않은데, 병도와 장우, 진수 등이 사는 강원도의 동네 카페도 딱 맥퍼슨이 경험했음직한 술집이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병도의 카페에 장우가 들어와 병도와 인사를 나누고, 곧이어 진수도 일을 마치고 제 집처럼 카페에 들른다. 평소와 다른 손님이라면,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젊은 여자 정을 데리고 온 춘발이다. 한동네에서 나고 자라 카페와 정비소, 설비 보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셋과 달리, 춘발은 서울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낙후된 고향 마을에서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고 있다. 춘발은 타지에서 온 정의 거처를 알아봐주며 안면을 익혔고, 동네 사람들을 소개해줄 겸 병도의 카페에 온 참이다. 여기 모인 동네 남자들은 30대부터 50대까지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미혼이라는 사실에서, 그들이 정에게 얼마간의 관심을 쏟고 환대하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우연히, 촌스러운 시골 동네에 참 어울리게도 귀신 이야기를 하게 된다. 갓 이사 온 손님에게 무례하다 생각하면서도 대화는 이상하게 각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귀신 목격담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작품은 호러물이 아니다. 이들이 경험한 귀신들은 공포영화 속에서 강렬한 이미지와 갑작스런 등장으로 우리를 아연실색케 하는 이들과는 달리, 우리와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난 비통함을 전하고 있어서 처연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귀신을 경험한 이들의 감정 또한 공포보다는 연민 또는 한탄에 가깝다. 남자들은 정을 안심시키기 위해 입으로는 귀신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어쩐지 귀신 이야기에는 현실감이 더해진다. 그리고 잃어버린 딸에 대한 정의 이야기는 더욱 더 죽은 자와의 만남에 대해 헛소리라고 손사래 치기 어렵게 만든다. 이들이 느닷없이 시작한 술과 귀신 이야기는 의도치 않게 손님과 소통하는 다리가 된다. 관객들은 여느 날처럼 시답잖은 대화를 하다가 마음이 열리고 누그러지는 경험을, ‘거기’ 남자들의 시답잖은 대화를 엿들으며 다시 맛보게 될 것이다.

 

극단 차이무의 예술감독인 이상우가 번안하고 연출하는 이번 공연에는 친근한 얼굴들이 출연해 반가움을 더한다. 연극과 영화는 물론 최근 히트 쳤던 드라마 <추적자> 등에서 열연했던 강신일이 어수룩한 50대 노총각 장우 역을 맡아 정과 가까운 춘발을 시샘한다. 동네 남자들의 눈총을 받는 춘발 역으로는 드라마 <골든타임>과 <더킹투하츠>로 더욱 인기가 높아진 이성민이 출연해 쫀쫀하고 유들유들한 사업가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이들 외에도 원창연과 김중기, 김승욱과 민복기가 장우와 춘발 역으로 트리플 캐스팅됐다. 오용과 진선규, 김소진 등의 배우들이 진수와 병도, 정으로 참여해 호흡을 맞춘다. 리얼한 강원도 사투리 연기도 기대해볼 만하다.

|  사진제공  이다엔터테인먼트   9월 7일~11월 25일 /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언제나 서투름 <늙어가는 기술>

지난해 6월, 경기도립극단의 정기 공연으로 초연했던 <늙어가는 기술>이 서울에서 여드레간 재공연을 한다. 매년 여러 편의 신작과 재공연을 올리며 국내 공연계를 종횡무진하는 고선웅이 직접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공연에는 중년 이상의 인물 열한 명이 등장해 제각각의 일상을 보여준다.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18년 차 때밀이 순옥, 늙은 백수건달 승갑, 중년의 파이터 창수와 늙은 트레이너 철동, 사채업자 찬봉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의 아내 현순 등은 각각 다른 환경에서 다른 고민을 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삶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고, 소박한 바람마저 짓밟히는 것이 못내 속상한 마음은 모두 매한가지다. 나이가 들고 연륜이 쌓이면 실수나 실패 경험이 줄어들 것 같지만, 이들은 여전히 나이가 들어서도 헛된 꿈을 꾸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다. 늙는다고 젊은이들과는 달리 안정되고 번듯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닌가보다. 멋지게 늙어가는 데는 왕도가 없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공연에 등장하는 한심하고 찌질한 인간들을 경멸하는 건 아니다. 인생 여정의 어느 지점에 있든 늘 현재는 처음 경험하는 것이고, 그래서 모두 서투를 수밖에 없으니까. 열한 명의 인물들이 모두 서로를 아는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환경에서 제각각 살던 인물들은 우연히 만나게 되거나, 알고 보면 한 다리 건너 관계를 맺고 있다. 한 작품에서 열한 명 모두의 사연을 펼쳐 보이기 때문에 한 무대에서 두세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게 다반사이다. 서로를 모르는 이들이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일을 겪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나 감정이 겹쳐지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에는 공통된 것이 많다는 것, 그래서 서로 공감하며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작가 고선웅은 경기도립극단의 중견 배우들을 위한 오마주로 이 작품을 썼다고 밝혔다. 배우들과 상황극을 펼치며, 그들의 독특한 캐릭터와 말투 등을 십분 살려 완성한 것이라고. 승갑 역의 이승철, 철동 역의 류동철, 옥녀 역의 김미옥, 무칠 역의 김종칠 등 배역과 출연 배우 이름의 유사성을 볼 때, 배우들의 연기가 극 속에 얼마나 잘 녹아들지는 의심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   사진제공  경기도립극단   9월 21일~28일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모던 창극의 첫 얼굴 <수궁가>

2011년 9월에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국립창극단의 <수궁가>가 재공연된다. <수궁가>는 국내 초연 후, 독일 부퍼탈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해 한국의 창극을 해외에 알리기도 했다. 이번 공연은 ‘국립창극단 세계 거장 시리즈’의 일환으로 기획됐는데, 국립창극단의 김성녀 예술감독은 판소리 다섯 바탕 모두 세계적인 연출가에게 의뢰해 재탄생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수궁가>는 창극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오페라 연출 거장인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해 ‘판소리 오페라’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잡으러 육지로 나간 별주부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이나, 현대판 <수궁가>에서는 캐릭터들이 좀 더 현실 반영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도 은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창극에서 모든 캐릭터를 소개하고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것은 스토리텔러라고 할 수 있는 도창의 몫이다. 여기에, 아힘 프라이어는 기존의 창극 양식에 변화를 주어, 가면을 쓰고 노래하고 연기하는 캐릭터들을 등장시켰다. 그는 오페라 연출가이기 이전에 추상표현주의 작가로 활동했는데, <수궁가>에서도 이런 경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무대와 의상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한복을 기반으로 한 의상에 붓으로 그려 넣은 듯한 선과 무늬가 돋보이고, 캐릭터를 과장되게 표현한 가면과 추상적인 산수화가 그려진 무대는 모두 그의 아이디어다. 듣는 창극에서 벗어나 듣고 보는 판소리 오페라를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   사진제공  국립창극단   9월 5일~9일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8호 2012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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