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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칼럼] 당신의 뒤 [No.116]

글 |허은실(시인, 팟캐스트 <빨간책방> 작가) 사진 |김일송 2013-06-01 3,624

“갔다 오께!”
봄부터 어린이집을 다니게 된 아이가 엄마한테 손을 흔들고 뛰어갑니다. 등에 멘 가방이 아직 너무 커서 거북이등처럼 느껴집니다. 바다로 긴 여행을 떠나는 어린 거북.
앞으로 이 뒷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게 될까요?
놀이터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학교에 가고, 여행을 떠나고, 연애를 하고, 일터로 나가고…. 그렇게 조금씩 엄마 품을 떠나 세상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겠지요.
그러는 아이를 저는 배웅하겠지요, 이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서서. 아이가 자라며 이 가방처럼 등에 지워지는, 점점 무거워지는 삶의 무게를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게 되겠지요. 그 가방을 메고 아이는 생의 문턱들을 하나씩 넘어가겠지요. 그리고 오늘처럼 ‘갔다 올게’ 하고 문을 나서면 저는 아이를 기다리며 문간에 등을 켜 두겠지요.
 
길거리에 내놓은 냉장고의 뒷모습,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는 허기진 고양이의 뒷모습….
뒷모습에서 우린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의 다른 표정을 보기도 합니다. 
뒷모습은 솔직합니다.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의 감정이 실려 있지요.
누군가의 들썩이는 등은 또 얼마나 많은 얘기를 하고 있는지요.
책장에는 책들이 등을 보이며 늘어서 있습니다.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으면 책의 등에 세로로 쓰인 제목들이 책의 척추처럼 느껴집니다. 혈을 짚듯 천천하고 깊게 그 제목들을 만져봅니다.

 

 

저에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유년의 공간 하나를 들라면 뒤란을 꼽겠습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좁은 뒤란은 어느 계절이나 서늘하고 축축하고 어두웠지요.
거기서는 괭이밥이나 닭의장풀이나 여뀌 같은 것이 혼자서 자라나 여린 꽃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달개비꽃을 통해 세상의 꽃들이 붉거나 노랗지만은 않다는 걸 배웠구요. 고양이들이 배탈이 나면 뜯어먹는다는 괭이풀은, 씹으면 이내 입에 침이 가득히 고여왔는데요. 먹을 것 없던 시절에 그것을 자주 뜯어먹곤 했습니다. 지금도 생각만으로 턱부터 시큰해지는 그늘의 맛입니다. 
이끼가 축축한 땅을 들춰보면 지네와 지렁이가 쥐며느리 같은 것들이 나오곤 했습니다. 발이 너무 많거나 아주 없는 그 벌레들은 징그럽고 무섭기도 했지만 알 수 없는 기이한 쾌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 뒤란에는 또 자그마한 광이 있고, 거기엔 낫이나 괭이나 농약 같은 것들이 어둠 속에 놓여서 무서운 상상을 불러일으키곤 했습니다. 
뒤란 쪽에 난 방에서 잠이 드는 밤엔 무언가 수군거리거나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을 꼴깍꼴깍 삼키기도 했고요. 여름이면 키다리꽃이 달빛을 받고 노랗게 흔들리며 무슨 말인가를 걸어오는 것도 같았습니다.
생각해보니 그 뒤란을 통해 삶의 어떤 비의 같은 것, 스멀거리는 숨겨진 이야기 같은 것을 슬쩍 엿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뒤’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뒤’는 자주 ‘앞’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를 갖고 있지요.
깔끔하고 우아한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은 그 정결을 위해서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분주하고 뜨겁습니다. 요즘엔 뒷태 미인이라고 해서 등이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들이 섹시한 등 라인을 자랑하더군요. 모임이나 행사의 진짜 재미는 공식적인 본행사보다 뒤풀이에 있는 법이지요.
  
등, 뒷모습, 뒤꿈치, 뒤란, 뒷골목, 뒤태, 이면… 
이런 ‘뒤’들 가운데서 어떤 ‘뒤’들은 가끔 코끝을 찡하게 합니다.     
돌아누운 아버지의 여윈 등을 본 적 있으시겠지요. 또는 거칠게 갈라진 엄마의 뒤꿈치라든가 닳아버린 남편의 구두 뒤축 같은 것.
살아가는 건 서로의 뒷모습을 읽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5월엔 그 누군가도 당신의 뒷모습을 오래 보아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그 누군가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여주면 좋겠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6호 2013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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