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인터뷰 | [칼럼] 독하여라, 이 한철의 사랑 [No.120]

글 |허은실 2013-10-07 3,718

얼마나 징했으면 한 번은 이것에 대해 써야겠다는 마음이 다 들었을까. 그렇게 글로라도 치르지 않고 지나가면 어쩐지 섭섭할 것만 같으니, 말하자면 이 글은 징글징글한 사랑에 대한 사적인 이별의식이라 해도 되겠다. 지독히 뜨거웠지만, 처서 지나면 풀도 울며 돌아간다 했으니 그 기세등등함도 어쩔 것인가, 여름이여! 이제는 과거시제로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또 한켠 서운키도 하다.


이십대까지는 대책 없이 무턱대고 가을이 좋았다. 삼십대가 되어서는 발정난 개처럼 봄이 좋더니, 사십대가 되려 하니 여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그런 변심에는 이번 여름이 한 몫 했다. 그게 좋아하는 이유가 되다니, 이 변태적인 애호는 어떤 연유인가. 하여, 여름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론은 내가 늙었다는 것이다. 가령 여름을 이런 단어로 이해하게 된 것, 그리고 그 말들을 긍정하게 된 것.

 

 

極 극 ; 다하다, 끝나다, 한계, 끝

연두로부터, 노랑으로부터 시작한 어린잎은 이제 연초록, 신록, 진록마저 지나 심록(深綠) 혹은 암록(暗綠)에 이르렀다. 괴테는 녹색에 대해 ‘더 이상 갈 수도 없고 더 이상 가려고 하지 않는다’ 했거니와 초록은 저의 색을 다 써서 궁극에 이른다. 그야말로 진록(盡綠)이다. 더는 갈 수 없는 그 극점에서 색은 냄새가 된다. 색이 햇빛에 달여지는 냄새. 풀이 시드는 냄새에는 에로스적 기운이 있다. 어떤 과일은 비명처럼 달다. 끝물이라는 말에 담긴 당도와 아슬아슬한 농염. 마지막에 도달해서야 지닐 수 있는 단내가 팔월의 끝물 과일에 있다.
 
錚 쟁 ; 쇳소리 爭 쟁 ; 다투다

숨이 막힌다. 태양은 쟁쟁하다. 햇빛에서 쇳소리가 난다. 칸나는 붉다. 아스팔트는 끓는다. 매미들은 맹렬하다. 땡볕처럼 운다. 치열하다. 실은 간절한 구애다. 물은 봄내 여름내 이룬 것을 한순간에 쓸어가 버린다. 창조의 신 비슈누와 파괴의 신 시바가 서로 맞대고 결합한 상태, 하리하라의 구현이다. 그 위에서 잡초는 또 무섭게 자라고 벌레들은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난다. 생명은 머뭇거림이나 타협이 없다. 극성스럽다. 불굴의 일념이다. 우리는 지지고 볶는다. 울고불고 치고 박는다. 실은 투쟁처럼 뜨겁게 살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처럼 생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열렬하다.

 

腐 부 ; 썩다, 나쁜 냄새를 풍기다 

아침에 끓인 국은 저녁에 쉬어버리고, 부패를 시작한 것들은 미친 듯이 부풀고 미친 듯이 썩는다. 썩는 것들 위에 파리는 알을 슬고 모기와 날파리와 구더기가 들끓는다. 내 몸이 쉰옥수수 냄새를 낸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냄새를 풍긴다. 냄새를 풍기며 문드러진다. 미친 생명의 계절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다가 썩어버려라.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홉수라는 게 정말 있다는 듯 이런저런 일들로 나를 힘겹게 했던 여름이, 사회적으로는 폭염사와 폐사와 전력난과 지구온난화라는 단어들을 남긴 여름이, 그리하여 계절을 낭만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민하게 만든 여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진 것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맹렬하게 부풀고 번식하고 생장하고, 그리고 마침내 썩어버리는 것들! 여름에는 생명이 지닌 이런 광기 어린 관능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여름은 ‘한철’이라는 말이 붙기에 가장 적당한 계절이다. 모기도 매미도 수박도 복숭아도 한철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하다. 한철일지라도. 뜨거웠으므로. 사랑 또한. 이제 그 뜨거움이 식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들인 그 열(熱)은 다 무엇이 되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뜨거웠던 만큼 독해지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여기에 하나의 단어를 더 얹어본다.
 
毒 독 ; 독

고추가 익는다. 한여름의 태양을 빨아들여 고추는 최대치로 붉고 최대한 매워진다. 농군이셨던 아버지는 그걸 독이 오른다고 표현하셨다. 땅꾼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메밀꽃이 필 즈음 뱀의 독이 가장 강하다고도 하셨다. 여름을 치러낸 것들은 그렇게 독이 오른다. 혹은 독에 이른다. 지독(至毒)하다. 삶을 치러내고 우리가 얻는 것은 이런 독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독(至獨), 지극한 고독일지라도 족하다. 그것으로.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0호 2013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