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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칼럼] <야끼니꾸 드래곤> - 질기고 애처로운 삶에 위로받다 [No.91]

글 |김영주 2011-04-18 4,012

인터넷 포털에서 머리기사로 일본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속보를 봤을 때만 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40층짜리 호텔 레스토랑의 전면 유리창에 걸린 블라인드 커튼 끈이 시계추처럼 흔들리는데도, 몇몇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게 밥을 먹는 광경을 본 후로 이 나라에서 지진이란 번거롭기는 해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경우는 드문 일인가보다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는 슬그머니 겁이 났다. 고베 대지진 수준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일본의 지인들과 친구들은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조건 반사처럼 떠오른 단편적인 걱정들이 흩어지는 사이에 서울에서 <야끼니꾸 드래곤>을 공연하고 있는 일본 배우들이 많이 놀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극 중 용길이 아저씨의 아들 토키오가 참 미워하면서도 사랑했던, 재일동포들의 구락부가 있던 동네는 무사할까 마음이 쓰였다. 이미 국유지로 빼앗긴 지 오래인 땅이라고 해도, 속고 또 속으면서도 다시 내일을 믿으려는 이들의 터전이었던 곳이다. 채 피지도 못하고 꺾여버린 꽃가지 같았던 토키오가 하염없이 손을 흔들고 있을 것만 같은 공간이니까 무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미래소년 코난>이나 <에반게리온>, <건담>처럼 일본에서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애니메이션들이 인류 멸망의 위기 또는 그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히로시마 원폭의 트라우마도 있겠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그 나라가 자연재해가 잦고 고립되기 쉬운 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세계는, 대륙으로 연결된 거대한 땅덩어리를 딛고 사는 이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불안정하고 내일을 확신할 수 없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영화의 특수 효과로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파도가 도시를 덮쳐온 순간과, 그 현장에서 무너져 내린 일상의 흔적들을 영상으로 볼 때면 두려움과 슬픔이 함께 몰려왔다. 이런 돌발적인 천재지변 앞에서는 나 자신이 제 머리 위로 수천수만 배의 무게와 힘을 가진 인간들의 구둣발이 오가는 것도 모른 채 태연하게 먹이를 찾아 기어 다니는 개미처럼 느껴진다. 그저 운이 좋아서 지금껏 별일이 없었을 뿐, 실상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행의 포탄 사이에서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스스로를 아주 작고 볼품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참 이상한 일이다.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서러운 일, 분한 일, 원하지 않는 일들이 한번도 피해가는 법이 없었던 꼬인 인생을 지켜보면서 거꾸로 위로 받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야끼니꾸 드래곤>의 주인공 용길과 영순은 사는 내내 눈 감고 지뢰밭을 걸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끝없는 불운에 시달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식민지의 힘없는 백성으로 태어난 죄로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저 흔들리는 섬에 뿌리를 내려야 했다. 대단한 야심도, 재주도 없고, 북돋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평생을 타국에서 귀화 식물처럼 끈질기게 버텨왔다.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는 경계인의 운명을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수밖에 없었던 노부부는, 세 딸과 외아들이 부모보다는 나은 삶을 사는 것 외에 더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 꿈도 이뤄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야끼니꾸 드래곤>은, 거대한 비행기가 가난한 동네의 일상을 뒤흔드는 굉음을 남기고 지나갈 때, 흔들린 벚나무에서 떨어진 꽃잎이 초라한 함석지붕을 복숭아빛으로 뒤덮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순간이 참으로 아름다워서 다시 내일을 믿을 수 있다는 저 소박한 사람들의 질긴 생명력은, 세계에 숨어있는 고통의 가능성만으로도 삶을 의심하고 싶어지는 이들의 눈을 씻어준다.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이 몰아치지 않아도 어제까지 멀쩡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인간 세상의 운명을 생각하면 정말로 고마운 연극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1호 2011년 4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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