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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산불> 장영남 - 그녀의 또렷한 눈빛 너머에서 본 것 [No.93]

글 |이민선 사진 |박진환 장소협찬 | 브라운하우스(070-4060-8239) 2011-06-15 4,693

그녀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반쯤은 견제, 반쯤은 동경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 따르던 그 사람이 동경했던 배우였으며,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눈빛을 가진 예쁜 사람이어서. 긴장감이 서려 있던 첫 만남에서 그녀는 상냥한 말투와 순박한 웃음으로 상대를 무장 해제시켰다. 무대 위의 장영남이 보여주었던 선명하고 빛나는 연기 그 너머에 있는 사랑스러운 한 여자의 이야기.

 

 

오십여 년 전에 발표된 故 차범석 작가의 <산불>이라는 유명한 작품에 참여하는 소감이 어떠세요? 게다가 대극장 연극은 보기 드문데요.
일단 영광이죠. 임영웅 연출님, 경험 많은 선배님들과 작업할 수 있다는 게 저에게는 큰 수확이에요. 강부자 선생님과 권복순 선생님은 이미 여러 차례 <산불>에 출연하셨어요. 그렇잖아도 베테랑인 분들인데…. 리딩 연습 때 선생님들이 읽는 걸 듣기만 해도 재밌어요. 그리고 대극장 무대는 한번도 서본 적이 없는데 배우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가 아닐까요. 막상 무대에 서면 놀라겠지만 아직은 감이 안 와요. 극장이 얼마나 클지,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사용하는데 발성 조절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되네요.

 

2007년에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산불>을 봤어요.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념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사라진 산골 마을에 남은 여인들이 삶을 이어가는 이야기가 흥미로웠어요. 관람 후에 『과부마을 이야기』라는 콜롬비아 소설을 읽었는데, 그 역시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 희생되고 여자들만 남은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남성들의 몫까지 여자들이 분담해서 그들만의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가요. 마을에 남자라곤 신부와 여장을 한 소년 정도인데, 타락한 신부가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등 종교적이고 성적인 이야기를 다루었죠.
아, 재밌네요. <산불>은 그보단 좀 더 착하죠. 이 마을 여자들은 먹고 사는 게 걱정이에요. 제 생각에 이 작품의 핵심은 굶주림인 것 같아요. 없어서 못 먹는데 군대에 먹을 것을 갖다 바쳐야 하고, 욕정에도 굶주려 있고. 인간의 굶주림이 극으로 치달은 상황이죠. 굶주림이라는 상황에서 파생되는 것이 생존이잖아요. 그렇게 살기 힘든 상황인데도 극 중 인물 누구도 죽으려 하진 않아요. 어떻게든 살려고 해요. 인민군이 와서 죽이려고 위협할 때도 본능적으로 살려고 하고. 인간의 본능이 잘 배어 있는 작품이라 <산불>이 시대를 넘어서는 명작이 아닌가 생각해요.

 

<산불>에서 사월이 역할을 맡았다는 걸 알고 조금 의아했어요. 의외의 역이라기보다는, 아마 점례든 사월이든 어느 쪽을 맡았다고 해도 반쯤 의아하고 반쯤 수긍할 만했을 거예요. 그만큼 이전에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오셨잖아요.
사월이 역으로 제의가 왔어요. 배우라면 누구나 무대에 많이 등장하는 게 좋잖아요. 어떻게 보면 사월이는 비중도 적고 조연급인데, 매우 매력적이에요. 솔직하고 거침없고, 또 도발적이죠. 제가 갖고 있지 않은 성격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어요. 요즘 시대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캐릭터잖아요. 많이 안 나와서 리딩 연습 때 조금 지루하긴 하지만. (웃음)

 

사월이 말고 점례 역에 욕심이 나진 않았어요?
그것보단 귀덕이 역할이 해보고 싶었어요. 귀덕이는 멀쩡하게 태어나서 잘 자라다가 어느 날 정신이 나갔어요. 제가 혼자 상상을 해보자면 아마도 강간을 당해서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읍내에 나가서는 청년들에게 성적인 놀잇감이 되었을 것이고. 전쟁이라는 상황과 상관없이 딴 세계에 가 있는 듯한 캐릭터라 매력적이죠. 그런데 전작에서도 조금 정신 나간 사람 연기를 많이 해서 또 그런 역할을 하기엔…. (웃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실제 성격은 안 그렇게 보이는데, 관객들에게 깊이 각인되는 연기를 많이 하셔서 평소 성격도 강할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줘요. 조금 전에 장영남 씨는 자신에게 그런 면이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관객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사월이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보이고요.
그러게요. 강해 보이나 봐요. 그래서 아직 시집을 못 갔나? (웃음) 연기로 보여드리는 모습은 평소에 제가 해보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에요. 나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하고, 대리 만족이기도 하죠. 해소의 측면이기도 하고. 일상에서 그런 성격이 드러나진 않지만 제 안에 그런 모습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저는 우유부단한 편이거든요. 싫은데도 싫다고 이야기 잘 안 하고…. 내 의견을 정확하게 잘 피력하고 솔직하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마구마구 부풀어 오른 것들이 연기를 할 때 분출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캐릭터를 자주 연기하다보면 성격도 달라지지는 않나요?
꼭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연기는 연기죠. 연기에 몰입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역할에 푹 빠져 있는 편은 아니에요. 적당한 거리감이 있죠. 아, 처음으로 역할의 영향을 받았던 게 <너무 놀라지 마라>였어요. 드문드문이긴 하지만 2년 동안 장기간 공연했는데 정서적으로 안 좋았어요. 피해 의식을 느끼고 날카로워지고. 이게 시기적으로 노처녀 히스테리인가, 작품 탓인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보통은 연기할 땐 연기하고 다시 나로 돌아오곤 하죠. 배우와 일반인으로 있을 때의 차이는 별로 없어요.

 

극단 목화에서 연극을 시작했고,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장진 감독의 영화를 통해서였죠. 극단 골목길의 작품도 여럿 참여하셨고요. 소속된 극단이 있거나 주로 함께 작업하는 감독이 있는 일은 흔하지만, 장영남 씨는 여러 창작 집단, 게다가 색깔이 제각각인 창작자와 연을 이어오고 있는 게 특이해요.
저도 신기해요. 한 작품을 함께한 후에 또 저를 믿고 작은 역할이라도 맡겨주시는 게 제 입장에선 감사한 일이죠. 인복이 있는 건가. 다들 스타일이 다르신데, 장진 감독님은 굉장히 정확하게 디렉션을 주세요. 직접 각본도 쓰시니까 모든 것이 다 계획되어 있고 배우는 연기하기만 하면 돼요. 하지만 그 배우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움직여볼 수 있는 여지를 주시죠. 당신 것만 우기지는 않아요. 박근형 선생님과의 연습은 굉장히 프리해요. 그러다 가끔 한번씩 디렉션을 주시는데 캐릭터를 꿰뚫을 수 있을 만큼 굵직한 말씀을 해주세요. 그래서 배우 스스로 해야 할 게 많아요. 배우를 단단하게 만든다고 해야 하나? 늘 연기를 만들거나 꾸며서 하지 말고, 감정을 배제하고 담백하게 하라고 말씀하세요. 담백하게 하라는 그 말이 참 좋아요. 하지만 무섭죠. 오태석 선생님은 감히 평가할 수도 없어요. 저한테는 위대한 스승이죠. 임영웅 선생님도 그렇고, 두 분은 현재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생각해요. 가르침을 받고 함께 작업하는 것만으로도 기쁘죠.

 

연극으로 데뷔해서 삼십 대 이후에 영화에 출연하면서 더 많은 관객에게 얼굴을 알렸어요.
사실 이십 대 때는 정신이 없었어요. 극단 활동이 빡빡해서 늘 밤새고 쉴 틈이 없었어요. 다른 매체의 오디션을 본다는 생각은 애초에 못했죠. 대학 졸업하고 연극이 하고 싶어서 극단에 들어갔는데 그것도 녹록치는 않았어요. 많이 울기도 했죠, 처음엔 다들 그러는 것처럼. 공연을 보러 온 영화 스태프들로부터 영화 출연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몇 번 고사했어요. 제가 아무것도 못하는데 괜히 망신만 당할까봐, 더 자신감이 생겼을 때 기회가 된다면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땐 극단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생각이 우선이었어요.

 

삼십 대 이후의 활동이 더 활발하신데, 지나간 이십 대에 대한 아쉬움이 있진 않으세요?
아쉬운 게 있다면 친구들이랑 어울려 노는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한 거예요. 여행 다닌 것도 불과 사오년 전? 여행을 많이 못 간 게 아쉬워요. 지금은 체력이 딸려서 여행 다니기도 힘들거든요. (웃음) 그래도 꽤 만족하는 편이에요. 예전에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연극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어떤 것 하나를 끈기 있게 한 것은 연기뿐이거든요. 고등학교 때도 이런저런 학원에 다니다가 그만두곤 했는데, 오기를 불러 일으켜서 꾸준히 하는 건 이것뿐예요.
저축한 것 같은 기분이에요. 이십 대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 이렇게 바쁜 것이지, 그때 아무것도 안 했으면 지금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거란 말이죠. 일 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시간이 지나가곤 하지만 분명히 내가 쌓아놓은 게 있었어요. 내가 지금 바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거, 감사하게 생각해요. 여행 좀 못 다니면 어때. 지금 다니면 되지. (웃음)

 

큰 욕심 없으신 것 같아요.
욕심을 갖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고 힘든 것 같아요. 하지만 문득문득 욕심이나 불평이 생기죠. 그것도 잠깐이지, 과한 욕심은 나 자신을 망치는 것 같아서 안 그러려고 해요.

 

어떤 작품이나 배역에 대한 욕심으로 적극적인 출연 의사를 표현하시지는 않나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의외로 적극적이지 못해서, 부끄러워서 못 그러겠더라고요. 제가 뭐라고, 이 역할 맡고 싶단 이야기를 하겠어요. 제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배역에 대한 제의가 오고 내가 검토해보고 좋을 때 그 작품을 선택해요. 그게 가장 합리적인 것 같아요. 혹시 나중에 더욱 인정받고 연기력이 좋아진다면, 죽기 전에 이거 한번만, 하고 바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배우는 외부의 시선으로 판단되는 부분이 커서, 장영남 씨가 잘 할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역할이 주어지는 거겠죠.
그런데 가끔은 이런 역할을 계속하고 싶진 않다는 생각도 해요. <산불>의 사월이가 날카롭잖아요. 신경질적이고 냉소적이고. 첫 대사부터 ‘뚝 그치지 못혀! 밥상 머리에서!’라고 소리를 질러요. 늘 이런 연기를 하는 게 우려되긴 하지만, 걱정은 일단 접어두고 연습하면서 고민해보려고요. 정말 날카로운 성격을 드러낼 것인가, 보완해서 표현할 것인가. 연출님이 허락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와는 다르게 연극은 충분한 연습 시간이 있으니 캐릭터에 대해 생각해보려고요.

 

드라마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을 연기할 때가 많고, 연극이나 영화에서는 좀 더 비범한 캐릭터를 연기하시기도 하잖아요. 어떤 캐릭터를 선호하는 쪽인가요?
저는 조금 독특한 캐릭터가 좋아요. 그게 더 재밌어요. 일상적인 연기는 어려워요. 방송 일을 시작한 첫 번째 이유가 일상성 찾기였는데 아직도 못 찾은 것 같아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캐릭터는 상상할 수 있어요. 그런데 드라마에선 이런 캐릭터라면 이럴 것만 같은 목소리, 이런 분위기라고 정해져 있는 느낌이에요. 근데 제 목소리가 허스키한 데다가 비음이 섞여서 좀 특이하거든요. 그러니까 공식화된 목소리를 못 내는 거예요. 처음 보는 시청자에겐 어색하게 들릴 수 있죠. 두루두루 표현하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라서, 일상성을 보여주기 어려워요.

 

학교에 강의도 나가신다고요? 새로운 경험일 것 같아요.
네, 올해부터 청주대학교에 출강해요. 저도 현장에서 경험하며 알아가는 중인데, 학생들보다 나이를 조금 더 많이 먹었을 뿐, 대단히 뭐 가르칠 게 있겠어요. 젊었을 땐 놀아야 한다고 학생들 긴장 풀어주고…. 그냥 만날 놀아요, 마피아 게임하면서. 서로를 관찰하라고 하죠. 쟤가 얼마나 사기를 잘 치는지. (웃음) 이번에는 고무줄 사 갖고 가서 고무줄놀이 했어요. 근데 애들이 잘 못하더라고요. 우리 때는 다 고무줄놀이 하고 놀았는데. 얼마나 좋은 운동이에요, 체력과 유연성 길러주고.

 

지금 장영남 씨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선배 배우가 있겠지만, 더 젊은 배우들은 장영남 씨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말도 종종 해요.
아, 정말 고맙고 기분 좋죠. 뿌듯하고. 더 좋은 배우가 돼야겠다는 자극제가 되죠. 힘들어서 정신 줄을 놓을 뻔했다가도 다시 정신 차리죠.

 

이십년 가까이 연기를 했으니 굉장히 길다면 긴 시간인데, 아직도 또 갈 길이 이만큼 남았어요. 시작도 끝도 아닌 그 사이 어느 지점에 있다는 기분이 묘할 것 같은데요.
배우로서도 과도기에 있는 것 같고 여자 장영남으로서도 꽤 불안하고 두려운 시기죠. 두려움이 물밀 듯이 밀려오고 조급해요. 이 정도 했으면 괜찮아, 차근차근히 해,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잘 다스려지지 않아요. 제 마음과 생각이 아직 나이만큼 따라오지 못한 것 같아요. 그 차이에서 혼란이 오는 거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땐 그랬는데 잘 극복했다고 생각하게 될 만한 계기가 오지 않을까요. 지금은 아니지만 내년이나 내후년쯤? 터닝 포인트라고들 하죠. 하지만 저는 키핑 포인트가 좋아요. 쌓이고 쌓여서 한 단계를 넘어서는 지점. 제게 어떤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요.

 

관객들이 장영남 씨를 어떻게 봐주었으면 좋겠어요?
음, 제가 늘 딱딱한 역할, 전문직 여성 연기를 많이 했잖아요. 사실 맹추 같은 구석도 있고 정신없고 귀여운 면도 있거든요. 예민하고 날카롭고 까칠하지는 않다는 거, 사실은 굉장히 엉뚱하면서도 넉넉한 사람이에요. 그런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서인지 똑 부러지고 인상도 강해 보이나 봐요. 그것도 좋은 점이지만 제 캐릭터가 한정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3호 2011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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