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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미세스 P의 A-Z> [No.128]

글 |조연경(런던 통신원) 사진 |Jane Hobson 2014-06-03 3,159
런던은 오래 전부터 사람이 많고 복잡한 대도시였다. 크고 작은 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길 이름을 봐도 그게 어디쯤에 있는지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워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요즘에는 누구나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길을 찾지만 (놀라운 GPS의 세계!)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엔 어땠을까? 몇 년 전만 해도 런던 사람들이 길을 헤매지 않도록 이끌어준 건 『A-Z 런던』이라는 지도책이었다. 런던의 거미줄 같은 도로들과 수많은 건물의 번지수를 보기 쉽게 그려 넣고, 모든 길 이름을 찾기 쉽도록 알파벳 A부터 Z까지 정리한 색인을 첨부한 지도책. 『A-Z 런던』은 빨간 이층 버스나 까만 블랙캡처럼 런던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지도를 그리고 색인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어떻게 지도를 만들게 된 건지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지도책 『A-Z 런던』은 필리스 피어설이라는 여성의 작품이다. 어느 날, 거리의 풍경 화가였던 그녀는 1930년대 런던의 복잡한 길과 건물들을 직접 정리한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지도책을 만들고 직접 영업과 판매까지 담당했으며, 회사를 설립하고 성공적인 사업을 이끈 필리스 피어설은 그 뒷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남겼다. 이 이야기에 주목한 프로듀서 닐 마커스는 연극 위주로 작업해온 극작가 다이앤 사무엘스와 뮤지컬 경험이 전혀 없는 싱어송라이터 귀네스 허버트를 설득했고, 2011년에 <미세스 P의 A-Z>의 워크숍 공연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2014년 2월, 런던 남부의 서더크 플레이하우스에 있는 소극장에서 정식으로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스탠드업 코미디와 텔레비전 드라마 위주로 활동한 여배우 이지 수티의 뮤지컬 데뷔작이기도 하다.

뮤지컬 경험이 거의 없어 뮤지컬 문법에 익숙하지 않는 창작진은 필리스 피어설의 자서전을 기초로 하되 평범한 스토리텔링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색다른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했다. 실화에 집중하지 않고 한 편의 ‘우화’를 만들고자, 『A-Z 런던』이나 필리스 피어설의 이야기를 넘어 가족사에까지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미세스 P의 A-Z>는 헝가리계 이민자인 유대인 아버지와 아일랜드 가정에서 자란 가톨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필리스 피어설의 가족사와 인간관계에 얽힌 갈등을 중점적으로 표현하려 애쓴다. 



원톱 주인공의 힘
이야기는 1936년, 필리스 피어설이 베니스에 남편을 두고 말없이 훌쩍 떠나 런던에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필리스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지만, 1930년대, 남편 없이 홀로 런던 거리에 선 여성이 갈 만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무작정 택시에 오른 필리스는 엄마가 살던 집에 찾아가보지만 허탕을 치고, 다시 같은 택시를 타고 오빠의 집에 찾아가지만 간신히 부모의 근황만 듣는다. 그녀는 다시 택시를 타고 그냥 강가에 내린다. 필리스가 택시를 타고 런던 시내를 누비는 중에 다양한 길 이름이 끊임없이 언급되면서 관객들을 서서히 작품의 미로로 인도한다. 거리의 화가로 강가에서 그림을 그리던 필리스는 우연히 의뢰를 받게 되고, 그걸 계기로 가족 없이도 홀로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된다.

<미세스 P의 A-Z>는 아주 작은 무대에서 진행된다. 사실 무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마주보고 놓인 객석 사이의 공간이 그대로 무대였다. 세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긴 무대 공간에서 여덟 명의 배우들이 다양한 역을 소화하면서 입으로 효과음을 만들고, 발 구르는 소리로 거리의 현장감을 살렸다. 택시기사나 지나가는 행인, 전보 배달부와 같은 다양한 캐릭터가 극에 끼어들면서 무대가 더욱 풍성해 보이는 느낌을 준다. 작품을 보면 미세스 P가 바삐 걸어가는 복잡한 런던 거리가 영화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무대 위에는 길 이름이 적힌 다양한 종이쪽지와 표지판, 의자, 작은 트렁크 가방과 문까지 작품에 관련된 다양한 소품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 이후 전개된 내용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무질서하게 매달려 있는 소품들이 아주 독특하면서도 시각적으로 예쁜 무대를 만들었고, 작은 작품을 더 생기 있게 만들어줬다. 관객 입장에서 보면 가로로 긴 무대를 세로로 길게 쓰느라 배우가 관객을 쳐다보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도 신선했다. 분주하게 길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지도를 만드는 이야기에 걸맞게 배우들은 좁은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걷고 뛰는 시늉을 한다. 무대 안쪽에는 이층짜리 구조물 위에 작은 밴드가 마련되어 있고, 반대쪽에는 커다란 문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 극 중에서 필리스가 끊임없이 두드려대는 문으로 쓰였다.

<미세스 P의 A-Z>는 거의 필리스 혼자서 작품을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거의 모든 장면이 필리스의 이야기였다. 평범한 뮤지컬처럼 사랑에 빠질 남자 주인공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필리스가 독백처럼 노래하는 장면이 많았다. 하지만 필리스의 뒤에서 다른 배우들이 화음을 차곡차곡 쌓아줘서 단조로운 느낌이 들진 않았다. 그리고 한 넘버 안에서 숨 가쁘게 공간이 바뀌고 날짜가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지루할 틈 없이 극이 빠르게 진행됐다. 장면마다 대사가 꽉 차 있었고, 대사와 노래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이 작품은 주연 여배우 한 명이 모든 캐릭터를 상대하고, 자신의 모든 생각을 대사와 넘버로 표현하는데, 인물 특성상 말이 빠른 편이라 대사량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특히 지도의 색인을 정리하는 와중에 런던의 모든 길 이름이 적힌 카드를 공중에 뿌리면서 그 많은 길 이름을 A부터 쭉 속사포처럼 내뱉는 건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발랄한 멜로디가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밝게 띄워줬고, 아버지나 어머니가 등장할 땐 헝가리나 아일랜드에 맞는 멜로디도 쓰였다. 한 달 남짓 진행되는 소극장 초연 공연에 OST를 제작했다는 데에서도 이 뮤지컬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 있게 앞으로!
필리스는 의뢰인에게 그림을 갖다 주러 가다가 런던의 복잡한 길거리에서 길을 헤매게 된다. 그리고 문득 결심을 한다.  누구나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런던의 모든 길과 번지를 담은 지도를 그리겠다고. 필리스는 자신이 정말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고 생각하고 즉각 일에 착수한다. 영국에서 지도를 제작하다가 파산하고 미국에 건너가 지도 사업을 하는 필리스의 아버지는 딸의 결정을 지지하면서도, 그동안 자신이 끊임없이 전보를 보내서 설득한 게 통했다고 생각하고, 필리스는 순전히 자신이 혼자 해낸 생각이라고 믿는다. 처음부터 서로의 생각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 필리스는 지도 출판을 하는 아버지 친구와 힘을 모아 지도 제작에 착수한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지도를 그리다가 잘 안 돼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여러 번 한다. 걷고 그리는 것 외에는 보여줄 게 별로 없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 뮤지컬은 다른 데서 이야깃거리를 끌어온다. 필리스가 계속 지도를 제작하는 와중에, 이야기는 때때로 과거로 거슬러간다. 헝가리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가톨릭 어머니가 처음 만난 날부터 시작해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극중극처럼 교차되면서 이어지게 된다. 과거의 아버지와 필리스가 대화를 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필리스를 직접 연기하기도 하면서 작품이 지루하지 않게 양념을 쳐주는 건 좋지만, 시간적 흐름이 복잡해서 살짝 정리가 덜 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지도를 만드는 현재의 필리스, 과거의 아버지, 과거의 어머니, 미국에서 계속 전보를 보내 필리스에게 지시를 내리는 현재의 아버지, 정신적으로 불안해서 술에 의존하는 현재의 어머니 이야기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고 수시로 교차된다. 수많은 시점과 사건이 겹겹이 쌓여있기 때문에, 그만큼 이야기가 흐려진다.

1막에서 계속 전보를 보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아버지에 눌려 있던 필리스는, 1막 마지막 넘버에서 아버지를 벗어나 자기 방식대로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하면서 불안과 좌절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후 2막은 완성된 지도를 들고 직접 판매와 영업에 나선 필리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1막에서 필리스가 길을 헤매면서 불렀던 노래가 2막에서 필리스가 자신 있게 런던 길거리를 누비면서 소매점마다 문을 두드리는 장면에서 살짝 변형되어 다시 사용된다. 그 후부터는 1막보다 시간 흐름이 훨씬 빠르다. 1막에서는 지도 제작에 멈춰 있는 동안, 부모의 이야기가 삽입되면서 스토리 진행을 살짝 늦춰 줬다면, 2막은 과거 삽입이 줄어들고 현재에 집중하면서 남은 이야기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간다. 갓 지도를 판매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2차 세계대전을 지나서 필리스가 비행기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후의 이야기까지 수년간의 이야기를 압축해 놓았다. 

또 1막에서는 전보로만 등장하던 아버지가 런던으로 넘어오면서 필리스와 아버지의 갈등도 본격화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통제 안에 두고 싶어 하는 강한 아버지를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필리스와, 그런 아버지 때문에 벌써 정신적으로 불안해져버린 감성적인 어머니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본격적으로 필리스의 가족사를 다룬다. 자기주장이 확고하고 앞만 보며 달려가는 아버지의 성격 때문에 가족 전체가 서서히 붕괴된다. 그나마 아버지를 닮아 감정보다 이성이 강한 필리스가 오래 버텨내지만, 극 후반에는 사업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게 된다.

런던의 아이콘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서 그곳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중심인물을 놓고 부모 세대와 가족사로 이야기를 확장시킨 것은 괜찮은 시도였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의 규모가 점점 넓어지면서 단숨에 받아들이기 어려워졌다. 특히 이미 아버지와 이혼한 지 오래된 어머니가 재혼을 하고도 빚쟁이에 쫓겨 다니다가 정신이 불안한 상태로 거리를 헤매고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되는 스토리는 쉽사리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그걸 감당하지 못해 결국 이혼했지만 정신적인 문제를 겪으며 부서지는 감정적인 어머니, 그런 부모의 관계 속에서 혼란을 겪고, 아버지의 영향력을 벗어나고 싶은 자식의 고민 같은 것에 주목한 건 너무 편한 선택 같다는 생각도 든다.



분주해서 즐거운 작품
욕심을 부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 것이 이 작품의 독이지만 매력이기도 하다. 계속 소리를 질러대며 주변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남의 노고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자신이 해냈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폄하는 아버지와 그런 남편을 못 견뎌 하지만 논리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없어 울고 소리 지를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싸움은 순식간에 지도 개정 작업을 하는 필리스의 장면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필리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아버지의 전보로 넘어가고, 그 와중에 앙상블의 화음이 계속 쌓이면서 장면을 빠르고 풍성하게 설명해준다. 

<미세스 P의 A-Z>는 호기심이 동하는 소재를 영리한 무대 사용과 연출, 매력적인 음악으로 흥미롭게 풀어냈다. 누구나 뻔히 아는 런던이라는 도시와 그 도시에 모든 애정을 쏟아 부은 한 여성의 이야기를 실화와 상상력을 버무려서 동화처럼 그려낸 사랑스러운 뮤지컬이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8호 2014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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