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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노트르담 드 파리> 마이클 리, 두 번째 인생의 시작 [No.120]

글 |송준호 사진 |김호근 2013-09-11 5,982

지난봄, 우린 그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십자가에 매달려 미동도 하지 않고 최후를 맞던 ‘마저스’를. 하지만 예수가 그랬듯 얼마 뒤 부활한 그는 여름 내내 공연장에 강림해 팬들을 놀라게 했다. 출국설이 돌던 마이클 리의 잦은 공연장 출현은 ‘혹시 다음 공연도?’라는 기대를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캐스팅이 발표되면서 현실로 이루어졌다. 또 ‘지저스’와 ‘그랭구아르’의 간격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한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추진하고 있는 마이클 리의 이후 행보다. 배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될 그가 앞으로 만들어갈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스타일리스트 | 김하늘 헤어·메이크업 | 차윤경

 

백지 상태에서 그리는 그랭구아르

마이클 리가 한국에서 보여주고 있는 캐릭터에서는 어떤 연속성이 느껴진다. 크리스의 ‘신은 왜(Why God Why)’, 지저스의 ‘겟세마네(Gethsemane)’, 그리고 이번 그랭구아르의 ‘대성당들의 시대(Le Temps des Cathedrales)’는 모두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우연의 일치지만, 자신의 운명에 대해 질문하고 갈등하고 번뇌하는 캐릭터의 모습은 마이클 리의 실제 모습과 겹쳐지며 높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가 지저스 역을 제안받았을 때 망설임 없이 출연을 결심한 데는 이처럼 매력적인 드라마와 흡인력 강한 캐릭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노트르담 드 파리>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프랑스 버전을 봤을 때 굉장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배우들이 워낙 인상적인 공연을 보여줘서 모든 캐릭터를 다 해보고 싶은 마음까지 있었어요.” 그랭구아르를 제외한다면 그가 욕심냈을 캐릭터가 궁금했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백 프로 콰지모도!”라고 우리말로 얼른 대답했다. 그의 슬픔이나 고통을 관객들이 함께 느낄 수 있고, 콰지모도의 여정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라는 설명이다.
원래 계획은 미국으로 돌아가서 <레 미제라블>의 앙졸라 역을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뿌리칠 정도로 그랭구아르는 그에게 흥미로운 도전이었다. 한국에서 <미스 사이공>을 하기 전에 미국에서 2년 동안 공연했고, 지난번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역시 미국에서 400회 이상 공연하며 충분히 체화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노트르담 드 파리>는 다르다. “이 프로덕션이 특별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 해야 하는 작품이라는 점이에요. 그래서 흥분되고 기대되면서 약간은 두렵기도 해요.”
그랭구아르는 한 여자와 세 남자의 사이에 있으면서 그 관계의 바깥에 있기도 한 묘한 캐릭터다. 마이클 리는 “그랭구아르는 주변의 상황을 설명하는 역할인데, 어떻게 보면 관객이 아니라 특정한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며 그 대상을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또 이제까지의 국내 배우들의 그랭구아르는 오리지널 버전과는 달리 다소 여리고 섬세한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마이클 리는 “그는 기본적으로 남성적이고 거친 캐릭터에요. 별로 부드러운 캐릭터는 아니죠”라며 “중요한 건 제 모습을 그 캐릭터 안에 어떻게 녹여내느냐에 있어요”라고 덧붙였다.
노트르담 대성당 주변에는 아직도 에스메랄다의 후손들이 활동(?)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관광객을 노리는 좀도둑의 성격이 커졌지만, 당시 집시들은 뮤지컬에서처럼 예술가적인 면모가 있었다. “현대의 집시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라며 자신만의 집시론을 꺼낸 마이클 리는 “집시에 대한 정의도 진화한 것 같아요. 전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 집시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는 실제로 브로드웨이 배우들이 스스로를 집시라고 부르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그 정의에 따르면 그는 이미 훌륭한 집시다. 여러 제작사와 일을 하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고 있으니까. 백지 상태라며 겸양하게 말한 그의 도화지엔 이미 집시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그만의 그랭구아르가 그려지고 있었다.

 

                       

 

 

관객과 가까이서 소통하고 싶다

마이클 리는 안티팬이 거의 없는 배우다. 아직은 많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의 수많은 별명들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마저스, 마강식, 마줌마, 마기립(공연장에서 제일 먼저 기립 박수를 치기 때문에 생긴 별명) 등 많은 별명에서는 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별명에 대한 그의 반응은 유쾌하다. “마저스는 알고, 마강식? 하하, 재밌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읽는 건 아직 어려워서 기사는 못 봐요. 기사에 나쁜 점도 있을 테니까 안 보는 게 나을 수도 있고.”
그는 벌써 반 년째 한국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미국과는 기본적인 정서나 생활 방식, 기후도 달라 적응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들 모두 이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한국은 외국인들이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반겨주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제작사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 버스나 택시 기사님도 친절하게 잘 대해주세요.” 버스도 타냐고 묻자 “그럼요. 지하철도 혼자 잘 타고 다녀요. 버스나 지하철에서 저를 알아보는 팬들과 인사도 나눴어요”라며 웃는다.
내년에는 그가 아예 한국으로 이주할 거라는 소식도 있다. 확정된 건 아니지만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추진 중이다.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그는 최근 공연장을 찾아 여러 편의 뮤지컬을 섭렵했다. 공연에서 그가 느낀 건 무엇보다 한국 배우들의 재능이다. “정말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 인상 깊게 본 작품도 많고. 조승우의 <헤드윅>을 봤는데 그는 정말 국보급 배우에요. 연기, 노래 다 잘해. <시카고>에서는 최정원, 오진영의 연기가 정말 좋아요. 브로드웨이에서 봤던 것보다 더 재미있어요.”
이쯤 되면 그가 출연하고 싶은 작품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본 작품 중에는 대극장 뮤지컬들이 많았는데 <엘리자벳>에서는 ‘죽음’을 맡는다면 영광일 거예요. <스칼렛 핌퍼넬>은 어떤 역할이든 다 재미있을 것 같고, <몬테크리스토>도 흥미로워요.”
하지만 잠시 후 그가 솔직히 털어놓은 선호작들은 이런 대작보다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작은 작품’들이다.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와 드라마가 좋아요. 관객이 자신을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나 <라스트 파이브 이어즈>, <듀엣>처럼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들에 끌려요.”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알려온 작품들은 과연 일반인들은 겪을 수 없는 거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미스 사이공>은 베트남 전쟁,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예수의 마지막 7일을 다룬다. 시대와 운명의 풍랑을 거쳐온 마이클 리는 이제 누구나 매일 겪는 일상의 드라마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우리 인생 속에도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거든요. 가령 제 아들이 다친다면 그건 너무나 놀라고 흥분되는 일일 거예요. 전쟁이 일어난 것보다 더 큰일이죠.”
그가 말하는 일상 속의 작은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한국의 창작뮤지컬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빨래> 같은 작품은 노래도 좋고 한국어가 서툰 그에게도 최적의 뮤지컬일 수 있다. 솔롱고에 대한 설명을 들은 그는 해맑게 반색했다. “퍼펙트! (우리말로) 아주 좋아! (웃음) 대본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전환점을 맞은 배우 인생

마이클 리의 이미지는 착하고 모범적이다. 무대 밖에서는 충실한 가장이자 좋은 아들이다. 즉, 선인의 전형에 가깝다. 하지만 좋은 배우는 어느 정도 다양한 내면을 지녀야 더 생생한 연기가 가능하다. 마이클 리 자신도 ‘최고의 배우는 삶을 자연스럽게 무대 위로 옮겨놓은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에 따르면 연기의 폭은 경험의 양과 비례하는데, 공연장과 가정을 오가는 성실한 그에게는 불리한 정의가 될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을 위해 마약을 한다든가 클럽에 가서 새벽 6시까지 놀 수는 없잖아요. 물론 그런 것이 의미 있는 경험일 수도 있겠지만, 제 경우엔 아이를 보느라 아침 8시에 해 뜨는 걸 볼 때까지 잠 한숨 못 자는 일은 결혼 전에는 못해본 새로운 경험이거든요. 이제는 아이를 재우고 키우면서 겪은 힘든 경험들을 무대 위에서 괴로움을 표현할 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됐어요. 느낌을 아니까.”
결혼은 분명히 그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수긍하면서도 거기에 ‘한국 생활’을 덧붙인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한국인이면서도 미국인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이 정체성에 대한 생각이 이곳에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올 때와는 벌써 많이 바뀐 부분이 있어요. 생각이나 생활 양식은 비록 다르지만 이곳 생활이 흥미로운 건 제가 드디어 얼굴색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점이죠.”

 

 

 


한국 생활과 배우 활동을 위해 한국어 실력 보강은 한층 더 중요해졌다. 그는 “지금은 초등학생 수준밖에 안 되지만 곧 중학생 수준으로 올라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서툰 한국말로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발음은 보완할 점이자 매력 요소이기도 하다. 특히 마이클 리는 노래할 때 자신만의 독특한 발성이 있다. 공기 중에 띄우는 것처럼 부르는 그의 발성은 가사를 누르듯이 발음하는 국내 배우들과 다른 느낌이다. “영어는 코에서 공기 중으로 퍼트리는 방식이거든요. 미국에서 노래를 배울 때는 코 주변으로 소리를 모아서 위쪽으로 내는 걸 연습했어요. 또 개방적이지만 거만하기도 한 미국 사람들과 달리, 한국 사람들은 타인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어서 조용히 말하는 게 그 차이인 것 같아요.”
어쨌거나 이번 작품을 계기로 마이클 리는 또 한번 인생의 기로에 섰다. 그는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것. 그래서 그에게 지금의 ‘마이클 리’ 또는 ‘이강식’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물었다. “굉장한 질문”이라며 오랜 생각에 빠진 그는 잠시 후 “누구나 그렇겠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건 가족들, 특히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어요”라는 그다운 답을 돌려줬다. 엄격한 가정 환경에서 엇나가지 않고 바르게 클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부모님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의 가정을 꾸린 후에는 아이들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다. “아이들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말해줘요. 그러면서 내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됐어요.”
‘외유내강’은 마이클 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다. 그는 크지 않은 체구에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그는 격정적이고 강렬하며 단단한 남자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그건 그의 롤모델인 브루스 리(이소룡)처럼 강한 집념과 확신을 바탕으로 자신이 몸담은 세계를 개척하고 싶은 ‘남자’가 내면에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0호 2013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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