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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즉흥 뮤지컬 쇼스타퍼!> [No.131]

글 |조연경(런던 통신원) 사진 |Steve Ullathorne, Keven Osborne 2014-09-15 4,427
지금, 이곳의 관객을 담은 라이브의 참맛
SHOWSTOPPER! THE IMPROVISED MUSICAL




여름, 런던은 축제의 계절이다. 짧은 이벤트나 몇 달간 이어지는 다양한 축제들이 환한 여름의 낮과 밤을 수놓는다. 트라팔가르 광장의 어느 오후, 웨스트엔드의 다양한 뮤지컬을 조금씩 맛보기로 보여주는 ‘2014 웨스트엔드 라이브’ 무대에 검정색과 빨간색이 조화를 이룬 의상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배우 몇 명이 올라왔다. 이들은 관객의 선택에 따라 즉흥적으로 뮤지컬 무대를 꾸미겠다고 했다. 우선 주인공 남자와 여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어느 뮤지컬에나 있는 사랑의 듀엣을 부를 예정이다. 그때 객석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외치자, 주인공들의 사랑의 아리아는 ‘오페라의 유령’ 느낌이 나는 뮤지컬 넘버가 됐다. 이제 뮤지컬 속 연인에게 닥쳐올 사랑의 장애물이 필요하다.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 객석에 묻자 “남자가 죽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사실은 남자가 이미 죽은 사람인데 여자가 아직 그것을 모르는 설정이 즉흥적으로 생겨났다. 

‘즉흥 뮤지컬’이라는 문구를 당당히 내건 <즉흥 뮤지컬 쇼스타퍼!>(이하 <쇼스타퍼!>)와의 첫 만남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영국의 언더벨리(Underbelly) 주최로 사우스뱅크센터에서 나란히 열리는 어더벨리 페스티벌(Udderbelly Festival)과 런던 원더그라운드(London Wonderground)는 여러 축제들 중에서도 런던을 대표하는 공연 축제로 자리 잡았다. 코미디, 서커스, 가족 공연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번갈아가며 무대에 오르는 다이내믹한 행사다. 선선한 여름날 템스 강변의 사우스뱅크로 가면 푸른 잔디밭에 발라당 드러누워 있는 보라색 소를 만날 수 있다. 이 거대하고 우스꽝스러운 소가 바로 어더벨리 페스티벌의 메인 공연장이자 축제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공연의 성격에 따라 자유롭게 활용 가능한 보라색 소의 배 속의 무대에는 4월부터 7월까지 무려 14주의 축제 동안 수많은 공연 팀이 다녀간다. 작은 무대 주위로 둥글게 놓인 410석의 객석은 설레는 관객들로 매일같이 붐빈다. <쇼스타퍼!> 역시 그곳에 자리를 잡고 한 회 한 회, 다신 오지 않을 2014년 여름의 런던에서 특별한 무대를 만들었다.



특명, 뮤지컬을 만들라!

객석을 빼곡히 채운 관객들의 들뜬 설렘이 느껴지는 열띤 공연장. 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빈 무대에 올라 전화를 받은 남자는 뮤지컬 작가. 프로듀서 ‘캐머런’이 자신의 뮤지컬 초안이 마음에 안 든다고 퇴짜를 놓자, 작가는 다른 아이디어가 있다고 급히 둘러대고 마음에 들 거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물론 아이디어는 없는 상황. 이내 그는 관객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과연 한 시간 안에 프로듀서가 만족할 만한 뮤지컬을 새로 써낼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즉시 새 뮤지컬을 만들어 올리는 게 가능하긴 할까?

뮤지컬을 공연하려면 우선 이야기에 맞는 음악이 있어야 한다. 대사도 있어야 하지만 운율을 맞춘 가사도 필요하다.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남녀 배우의 듀엣과 여럿이 함께 부르는 합창곡도 필수다. 음악에 맞게 안무와 동선도 짜야 한다. 감정이 고조되는 클라이맥스 뮤지컬 넘버와 극을 마무리하는 화려한 피날레도 빠질 수 없다. 그런데 이야기도, 음악도 없는 상황에서 배우나 밴드 사이에 서로 상의도 없이 뮤지컬을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공연을 하겠다고?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호기심을 느낀다. <쇼스타퍼!>라는 제목부터 구미를 당기는 것이다. 도저히 믿기 힘든 설정에 의심을 품고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즉흥 쇼에 놀라고, 직접 참여하며 더욱 큰 재미를 느끼게 된다. 관객들이 직접 참여한다는 게 이 뮤지컬의 포인트다. <쇼스타퍼!>의 배우들은 공연을 자기 입맛대로 꾸며내는 게 아니다. 그날 그 자리에 있는 관객들이 뮤지컬에 관한 아이디어를 내면 극의 인물, 사건, 배경은 물론 대사와 음악, 가사까지 즉흥적으로 꾸며내고, 재미와 감동까지 잡는 불가능한 작업을 통해 어느새 거짓말처럼 한 편의 뮤지컬이 완성되어 간다. 그날그날 관객이 던진 키워드에 맞게 공연을 반죽해내는 만큼, 이들이 만드는 공연은 매일 다르다. 



지금 이 순간 만드는 공연

프로듀서와의 통화를 잠시 멈춘 작가는 우선 관객들에게 공연을 함께 만들자고 동의를 구한 뒤 좋아하는 뮤지컬에 대해 물어보면서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도한다. 관객들이 <저지보이스>, <빌리 엘리어트> 등의 이름을 외치면 작가는 그게 어떤 뮤지컬인지 간단히 설명한다. 사실 뮤지컬의 이야기 구조는 단순해서 한 줄로 요약하는 게 어렵지 않다. 게다가 오랜 공연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답게 관객도 배우도 뮤지컬에 관해선 모두 베테랑이다. 

인기 있는 뮤지컬의 내용이 어떤지 살펴본 후에는 새로운 뮤지컬의 소재로 적당한 의견을 받는다. 마침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던 날 진행된 507회 공연에서는 후보인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과 ‘수족관’을 누르고 ‘외딴섬의 커플테라피’가 최종 결정되었다. 그렇게 정해진 내용을 프로듀서에게 보고하고 나면, 다음으로 결정할 것은 음악이다. 작가가 관객들에게 작곡가나 뮤지컬의 이름을 외치라고 하자 먼저 나온 것은 작곡가 ‘손드하임’의 이름. 그 후 뮤지컬 <북 오브 몰몬>, <위키드>, <애비뉴 Q>가 차례로 칠판에 적혔다. 그러다 누군가 뮤지컬 <사랑의 모습(Aspects of Love)>을 외쳤을 땐 모르는 뮤지컬이라며 작가가 당황했으나, 곧 음악감독이 구원투수로 나서서 즉석에서 대표 뮤지컬 넘버를 살짝 들려줬다. 객석에서 외치는 뮤지컬 제목은 대체로 인기작인 경우가 많지만, 어쨌든 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밴드와 배우들은 어떤 뮤지컬이 튀어나와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온갖 뮤지컬을 섭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작가가 프로듀서에게 이런 느낌의 음악이 될 거라고 둘러대고 나면 이제 마지막으로 제목을 정할 차례다. 관객들이 다양한 제목을 외쳤지만, 환호와 함께 만장일치로 정해진 제목은 <룸 포 원 모어(Room for One More)>가 됐다. 뮤지컬의 구체적인 배경을 스리랑카의 이국적인 섬으로 정하고 나자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지금까지 나온 아이디어를 종합해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

여자 배우 둘과 남자 배우 넷, 작가까지 총 일곱 명의 배우와 세 명의 밴드가 상의할 틈도 없이 즉석에서 펼치는 가상의 공연.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한지 의심하는 관객들 앞에서 <쇼스타퍼!>의 공연이 다시 한 번 막을 올렸다. 작가가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이국적인 섬에서 벌어지는 첫 장면을 떠올리도록 도와줬고, 어느새 잔잔한 음악이 깔리면서 본격적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화려한 휴양지에 모여든 행복한 인물들은 각자의 사연을 담아 ‘룸 포 원 모어’라는 제목과 ‘파라다이스’를 키워드로 한 오프닝 뮤지컬 넘버를 합창했다. 제대로 된 밴드 음악, 운율이 들어맞는 가사와 화음, 생기 있는 배우들의 표정과 자연스러운 몸동작. 진짜 뮤지컬 넘버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만드는 공연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공연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 평범한 스토리 라인, 클리셰가 가득한 설정이긴 해도 공연의 내용은 100% 창작이다. 음악도 어떤 공연을 연상시키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패러디의 향기가 조금 묻어있는 창작에 가깝다. 애드리브로 공연을 만드는 배우들과 즉석에서 뮤지컬 음악을 작곡해 연주하는 밴드 사이에 합의하고 상의할 여지는 전혀 없다. 객석에서 외친 의견이 작가의 입을 통해 공표되면, 바로 배우와 밴드가 합을 맞춰 어떻게든 공연을 이어가야 한다. 애드리브를 통해 캐릭터 사이의 관계가 즉흥적으로 성립되고, 갈등이 고조된다. 작가는 끊임없이 개입하여 사공이 많은 배의 키를 단단히 잡아준다. 미리 받아놓은 관객의 의견을 적재적소에 끼워 넣는 것도 작가의 역할이다. 이쯤에서 어떤 캐릭터가 이러한 뮤지컬 넘버를 <북 오브 몰몬>식으로 펼쳐낼 거라고 작가가 말하면, 밴드와 배우들은 무조건 공연을 이어간다. <북 오브 몰몬> 느낌의 음악을 밴드가 즉흥적으로 연주하고, 배우들은 운율까지 맞춘 가사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뮤지컬 넘버를 완성한다. 배우들은 상자와 막대 같은 단순한 소도구를 이용해 장면을 전환하고, 모자나 안경 같은 소품으로 1인2역을 연기한다. 마치 즉석 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특정 대사가 반복될 때마다 웃음이 터지고, 애드리브로 공연을 이어가는 배우들이 막히고 당황할 때마다 티 안 내고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고군분투가 우습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만들어내는 뮤지컬 넘버와 장면이 정말 그럴듯하고 멋져서 감탄이 나온다.



이날 공연은 주인공 마크, 신디, 칼라타가 작품의 주축을 맡았고, 마크의 두 아빠가 가벼운 웃음을 담당하며 작품의 빈구석을 메워줬다. 극 초반 칼라타의 남자 친구로 등장했던 배우가 후반에는 역할을 바꿔 커플테라피 전문가로 등장해 극을 마무리해줬고, 초반 단역으로 시작한 집사는 후반에 중요한 캐릭터로 성장했다. 상류층인 신디와 평범한 마크의 결혼은 끊임없는 불화를 낳았고, 둘은 화해하기 위해 섬으로 여행을 오지만 우연히 마크의 전 여자 친구 칼라타와 만나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결국 칼라타의 아들까지 등장했지만 마지막에는 모두 화해하고 마무리됐다. 다양한 캐릭터들의 사연을 손드하임풍의 곡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신디와 칼라타의 기 싸움을 <위키드> 느낌이 나는 뮤지컬 넘버로 표현하는 작가와 배우의 선택이 극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관객이 선택한 넘버 외에 작가가 즉석에서 끼워 넣거나 전형적인 뮤지컬 느낌이 나는 오프닝이나 피날레 뮤지컬 넘버도 빠지지 않았고, 뮤지컬답게 감정을 고조시켰다가 풀어주는 것까지 놓치지 않았다.

작가는 극 전체를 아우르며 배우들을 돕기도 하고 때론 짓궂게 위기에 빠뜨렸다. 수습이 불가능할 것 같은 미션을 부여하면 배우들이 당황하다가도 어떻게든 수습해서 마무리하려고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모습이 더 큰 재미를 선사했다. 작가의 제안으로 집사가 칼라타에게 조언하는 장면이 생겼을 때가 백미였다. <라이온 킹>에 나오는 ‘하쿠나 마타타’처럼 캐치프레이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관객들에게 스리랑카어처럼 들리는 문구를 생각해 달라고 했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 관객이 ‘풋 파사 타이 다 닛 노이 캅’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입에 잘 붙지도 않는 말을 신 나게 칠판에 적은 작가는 무슨 뜻인지 집사가 잘 설명할 거라며 슬쩍 배우에게 책임을 떠넘겨 버렸다. 처음엔 더듬거리다가 결국 뮤지컬 넘버를 부르는 데 성공한 배우는 누구보다 큰 박수를 받았다. 

배우들의 막무가내 애드리브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싶으면 극을 끊고 방향을 바로잡아 주는 것도 작가의 역할이었다. 그 외에도 커플 전문가에게 셰익스피어식 독백을 시키고, 한 배우가 맡은 두 캐릭터가 대화하게 한다거나 함께 노래하게 하는 등 극을 더 다채롭게 만들었다. 작가를 포함한 일곱 명의 배우들은 즉흥 공연을 오래 한 베테랑답게 어떤 상황에서도 호흡이 잘 들어맞았고, 밴드는 그들을 음악으로 훌륭하게 받쳐줬다. 그리고 배우들이 가사의 운율을 맞추거나 작가의 미션을 성공시켜 유연하게 극을 이어가면 객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어디 잘하나 보자’고 매섭게 지켜보는 게 아니라 배우들의 노력으로 지금 만들어지는 이 공연을 재미있게 감상하면서 그들을 응원하는 관객도 공연의 완성에 기여했다. 배우, 밴드, 관객의 유기적인 호흡이 단순한 스토리 구조의 즉흥 뮤지컬을 더 의미 있게 만들었다. 직접 아이디어를 내지 않았더라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공연이 완성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공연을 본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도 특별한 공연이 됐다. 마치 우리만 아는 비밀을 공유하는 느낌이었다. 그날의 그 작품은 다신 공연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관객과 함께 성장하는 공연

<쇼스타퍼!>는 2007년부터 영국 전역의 축제 무대에 오르고 있다. 뮤지컬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공연한다는 믿기 힘든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공연은 항상 성황이다. 매회 공연이 어느 정도 이상의 퀼리티를 보장하기 때문에 관객들 사이에 귀여운 음모론까지 돈다고 한다. 아이디어를 외치는 사람을 객석에 미리 심어뒀다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쓸 수 있는 뮤지컬을 이미 다 써놨다는 주장도 있고 출연진이 그날 공연할 뮤지컬을 미리 써둔다는 의견도 있다. 음악과 이야기가 항상 똑같은데 관객들만 모른다거나 대화를 써서 보여주는 프롬프터가 있다거나 실제 작가가 뒤에서 실시간으로 뮤지컬을 써주고 있다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믿기 어려울 만큼 공연을 잘 만들어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쇼스타퍼!>의 공식 웹사이트에는 지금까지 진행된 500여 회의 공연 중 일부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한 아카이브를 구축해놓았다. 제목, 내용, 음악이 다른 공연이 수백여 편 쌓이는 동안 그들만의 역사도 쌓여왔다. 축제에서만 짧게 공연하는 게 아니라 한곳에서 정규 공연을 이어간다면 다음 공연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서 반복 관람하는 관객들도 많을 것 같은데 당분간은 그럴 계획이 없는 듯싶다. <쇼스타퍼!>는 런던 어더벨리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마친 후에는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로 향할 예정이다. 축제 현장에서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즉흥 공연인 <판타스티컬 스토리 팩토리>도 동시에 공연된다. ‘쇼스타퍼들’은 교육을 희망하는 배우들과 워크숍을 하고, 기업 강연도 꾸준히 하면서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널리 퍼뜨리고 있다. 작은 즉흥 공연으로 시작해 8년째 이어지고 있는 이들의 프로젝트는 즉흥 코미디와 뮤지컬 사이 어디쯤에서 멈추지 않고 관객과 함께 계속 달려갈 것 같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1호 2014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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