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중극으로 변모한 돈키호테의 모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원작은 스페인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의 소설 『돈키호테』. 이 작품은 세르반테스가 1605년 발표한 전편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와 1615년 출간한 후편 『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로 구성된다. 이 중 전편이 우리가 흔히 읽어온 『돈키호테』이며, 후편은 그에 비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작품의 완결성을 부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스페인의 라만차에 사는 알론조 키하나가 기사도 소설에 빠져 스스로 편력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며 모험에 나서는 이야기. 뮤지컬은 이러한 소설의 기본적인 컨셉을 따르되 기발한 설정으로 이야기 구조에 변화를 가한다. 이는 <맨 오브 라만차>의 작가 데일 왓서맨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작가는 세르반테스를 연구하던 중 그가 곧 돈키호테였을 것이란 생각에 도달해, 세르반테스를 극으로 불러들였다. 그에 따라 무대는 신성 모독죄로 투옥된 세르반테스가 감옥 안에서 죄수들에게 자신이 쓴 작품 ‘돈키호테’를 들려주는 극중극 형식을 취한다. 실제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의 말미에 이런 글을 남겼기에, 뮤지컬의 설정이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진다. “오직 나만을 위해 돈키호테는 태어났으며 나는 그를 위해 태어났다. 그는 행동할 줄 알았고, 나는 그것을 적을 줄 알았다.”
소설은 전편 52장, 후편 74장으로 구성되며,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알론조 키하나의 여정을 순차적으로 펼친다. 첫 번째 출정에서는 자신을 ‘돈키호테 데 라만차’로 이름 지은 키하나가 여관 주인에게 기사 서품을 받고, 두 번째 출정에서는 시종 산초를 대동해 온갖 모험을 불사한다. 후편에서 이어지는 세 번째 출정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기사 돈키호테와 그의 시종 산초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모험이 이뤄진다는 게 특징이다. 뮤지컬은 소설이 펼치는 126개의 방대한 에피소드 중 더욱 대중적인 것을 선별해 돈키호테의 캐릭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풍차를 괴수로 여기며 벌인 결투(전편 8장), 이발사의 놋대야를 황금 투구로 보고 전리품으로 삼은 일(전편 21장), 여관 주인에게 기사 작위를 받은 일화(전편 3장) 등이 그것이다.
캐릭터로 읽는 원작 비교
『돈키호테』에는 방대한 분량에 걸맞게 무려 65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 중 607명이 남자이며, 여자는 52명이다. 귀족부터 시작해 상인, 이발사, 매춘부, 건달 등 각계각층의 인물이 등장해 당시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대는 이 중 핵심적인 인물을 추려내 돈키호테와 산초, 그리고 둘시네아(알돈자)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를 펼친다. 그 외 돈키호테의 조카와 가정부, 신부와 카라스코 등이 한축이 되어 돈키호테의 모험을 만류하기 위해 애쓰고, 여관 주인, 이발사와 무어인 무리 등이 적재적소에 배치돼 극의 잔재미를 더한다.
원작과 대비되는 뮤지컬의 특징 중 눈에 띄는 것은 둘시네아의 등장이다. 소설에서 돈키호테는 기사 자격을 갖추기 위해 이웃 마을의 처녀 알돈자를 ‘둘시네아 델 토보소’란 이름의 공주라 여기고, 모험 내내 사랑하는 여인 ‘둘시네아’를 섬기며 기사로서 숭고한 이상을 실천한다. 뮤지컬에서도 돈키호테는 둘시네아를 사모한다. 하지만 원작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그 대상인 알돈자가 여관의 시녀라는 것이다. 무대는 돈키호테의 상상 속 여인을 극의 중심인물로 불러들여, 그녀에게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입힌다.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알돈자를 둘시네아로 내세우며, 그녀가 돈키호테를 통해 변화를 이루는 과정을 작품의 주요한 축으로 다루었다.
둘시네아의 드라마가 개입되면서, 뮤지컬에서는 산초의 비중이 원작에 비해 축소된다. 소설에서 산초는 돈키호테와 대비되는 인물이다. 돈키호테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을 추구하는 반면, 산초는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물질적인 것을 중시한다. 소설에서 산초가 돈키호테의 시종을 자처한 것은 섬의 영주를 시켜준다는 말 때문이었고, 후편에서 그는 실제 섬의 영주가 된다. 또한 산초는 작품 전반에 걸쳐 많은 속담과 의견을 제시하고, 모험을 이어가면서 점차 돈키호테의 세계관을 동경하게 된다. 돈키호테와 산초, 원작에서 이 두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충돌은 끊임없이 해학을 빚어내며 작품에 재미를 더한다. 반면, 뮤지컬에서 산초는 첫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돈키호테의 충직한 시종이다. 산초의 노래 ‘좋으니까’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물질적인 욕구가 아닌 그저 돈키호테가 좋아 그의 모험을 따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상주의자인 돈키호테와 대비를 이루는 현실주의자의 모습이 강하지 않다. 오히려 뮤지컬에서 산초는 돈키호테의 마스코트처럼 그의 옆에서 항상 존재하며, 극의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드라마의 개연성을 위해 인물의 설정을 바꾼 경우도 있다. 뮤지컬에서 돈키호테 조카의 약혼자로 등장하는 카라스코는 원작에서 라만차의 학자이자 돈키호테의 친구로 등장한다. 소설에서 카라스코는 돈키호테를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끈질긴 추적을 한다. 그는 거울의 기사와 하얀 달의 기사로 분장해 돈키호테와 결투하고, 결국 돈키호테는 하얀 달의 기사에게 패해 모험에 종지부를 찍는다. 무대 위 카라스코 역시 돈키호테의 모험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다만, 조카의 약혼자로 설정을 바꿔 미치광이를 숙부로 모시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행동에 명확한 이유를 전한다. 그는 거울의 기사로 변장해 돈키호테를 굴복시키는데, 이때 무대에서 거울이 지니는 상징성 또한 눈에 띄는 부분이다. 무대 위에서 거울은 현실과 이상을 형상화하며, 『돈키호테』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나아가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의 세계를 대칭적으로 보여주며, 극중극의 구조를 상징화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돈키호테』 속 깨알 정보
원작에도 등장하는 세르반테스?
비단 뮤지컬에만 세르반테스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원작에서도 세르반테스의 이름이 깜짝 발견된다. 전편 6장, 돈키호테에게 악영향을 끼친 소설을 불태우기 위해 신부가 서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라 갈라테아』가 거론된다. 그때 신부는 세르반테스의 책을 옹호하는 변론을 펼친다. “세르반테스는 나의 오랜 친구요. 내가 알기로 그는 시보다는 세상의 불행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지”라고 운을 뗀 신부는 “지금은 비록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 손질이 끝나면 인정을 받게 될 거요. 그렇게 될 때까지 잠시 동안 당신의 집에 피난시키기로 합시다”며 세르반테스의 책을 화형에서 면제한다.
돈키호테가 ‘슬픈 수염의 기사’로 불리게 된 이유는?
뮤지컬의 2막, 여관 주인이 돈키호테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는 장면. 그때 여관 주인이 돈키호테에게 ‘슬픈 수염의 기사’란 이름을 붙여준다. 원작에서 이 이름의 기원은 산초에서 비롯된다. 전편 19장, 산초가 한 수도사에게 돈키호테가 ‘슬픈 얼굴의 기사’로 불린다는 말을 전하고,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물어본다. 그때 산초의 대답은 이러했다. “제가 잠시 주인님 얼굴을 횃불에 비쳐보았습니다요. 그랬더니 주인님 얼굴이 세상에 다시없는 슬픈 얼굴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요. 아마도 그건 틀림없이 싸움에 지쳤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어금니와 앞니가 빠졌기 때문입니다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3호 2015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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