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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뮤지컬과 19금 코드 [No.146]

글 | 송준호 2015-12-01 6,704

한때 ‘19금’이라는 수식어는 철저히 선정성에 집중해 흥행을 노리는 성인 연극들에 자주 붙던 말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성적 판타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작품성과 완성도를 갖춘 19금 작품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이런 작품에서 ‘19금 코드’는 단지 흥행을 위한 뻔한 수단이 아니라 주제를 잘 드러내기 위한 충분조건의 역할을 한다. 



‘문화 현상’으로 미화되지 않는 날것의 욕망

“드가장! 드가장! 여기는 드가장! 니캉내캉 드가장! 외로운 수컷들의 유토피아 여기는 19금 세계.” 이 심상치 않은 노래가 불리는 곳은 무려 모텔 앞이다. ‘드가장’은 ‘들어가자’라는 의미의 경상도 방언. ‘야 봉숙아 말라고(뭐하러) 집에 드갈라고’로 시작하는 그룹 장미여관의 히트곡 ‘봉숙이’처럼, ‘드가장’은 여자친구와 밤을 보내고 싶은 남자의 애타는 마음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이 말을 간판으로 내건 모텔 앞에는 흑심을 실행에 옮길 용기가 부족한 20대 남자와 그를 리드하는 노련한 여자친구 커플이 있다. 바람난 남편을 찾으러 온 사모님은 ‘드가장’에서 허탕을 친 뒤 또 다른 모텔 ‘더가장’으로 향한다. 


10월 개막한 창작뮤지컬 <드가장>은 이처럼 ‘사랑’이라는 고상한 가치보다는 ‘욕망’과 ‘본능’ 같은 에로스적인 성(性)을 다룬다. 연애에 영 소질이 없는 남자와 몇 달 안에 결혼을 해야만 하는 여자의 만남이 중심 줄거리여서 언뜻 뻔한 해피엔딩을 예상케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전형을 철저히 무시한다. 대신 <드가장>이 집중하는 것은 ‘19세 이상 관람가’라는 등급에 걸맞은 욕망의 흔적들이다. 특히 이 작품 곳곳에서는 남성 호르몬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 작품을 쓴 작가와 작곡가가 모두 남성이기 때문. 한국뮤지컬작가 워크숍 1기 출신의 이동규 작가는 신작 개발 워크숍에서 19금 작품 컨셉을 떠올렸고, 한국콘텐츠진흥원 창의인재동반사업에서 김용순 작곡가와 만나 <드가장>을 탄생시켰다. 두 사람은 소재 탐색 과정에서 남자들이라면 술자리에서 한 번쯤은 할 법한 ‘사랑’과 ‘여자’ 이야기를 19금 코드로 풀어내는 이야기를 구상했다. 그 결과 ‘드가장’은 모텔을 주 배경으로 20대 청춘들의 성을 유쾌하면서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뮤지컬에서 19금 코드는 주로 기성 문화에 대항하는 하위문화의 상징 정도로 활용됐다. 성도착증과 외계인과 인간의 난교 파티, 70년대 글램록 등 온갖 하위문화의 복합체로 평가받는 <록키 호러 쇼>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드래그퀸과 바이섹슈얼, 트랜스섹슈얼 등은 오늘날의 19금 코드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 담론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뮤지컬에 등장하고 있는 19금 코드들은 이처럼 거대 담론으로서의 성이 아니라 일상 속의 성을 가감 없이 말하며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 주변의 19금 소재들


브로드웨이에서 건너온 ‘19금 뮤지컬’ <애비뉴 Q>는 미국의 어린이 교육용 프로그램 <새서미 스트리트>에 나왔던 퍼펫들이 뉴욕의 달동네에 사는 청년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들은 사회에 대한 풍자와 독설, 때로는 외설적인 표현도 거침없이 내뱉는다. 국내 초연 당시 홍보 문구도 ‘만 15세 이상 관람 가능하나, 섹스와 동성애, 포르노 등의 문제들을 당황스러울 만큼 뻔뻔하게 다루고 있어 만 18세 이상 관람을 권장합니다’였을 정도다. 이 홍보 문구처럼 <애비뉴 Q>는 성에 관련된 예민한 주제들을 인형들의 입을 빌려 시종일관 유쾌하게 풀어내며 ‘19금 코드’의 거부감을 정면으로 돌파한다. 인형들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뻔뻔한 유머 감각은 인간 배우의 연기라면 어색했을 상황에서 유쾌한 폭소를 유발시킨다. 



<난쟁이들>은 창작뮤지컬로서는 흔치 않게 동화에 19금 코드를 가미한 ‘어른이 뮤지컬’이라는 컨셉을 내세워 호평을 받았다. 여기서 동화 속 주인공들은 어린이들이 알던 그 순수한 인격의 주인들이 아니다. 난쟁이는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절륜한 정력의 화신이며, 백설공주는 음흉과 음란 사이를 오가는 욕망의 화신이다. 이 둘이 우여곡절 끝에 만난 후 벌어지는 장면들은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었던 성인 관객들의 동심을 순식간에 파괴한다. 


최근 가장 파격적인 19금 코드를 선보였던 것은 중년 여성들의 성과 사랑을 그린 <쿠거>다. 젊은 남성과 사귀는 연상녀를 가리키는 은어 ‘쿠거’를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다 이혼당한 릴리와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임에도 여성으로서의 욕망은 숨기는 클래리티, 쿠거 바의 주인으로 인생을 자유롭게 즐기는 메리-마리 등 40대 여성 세 명이 주체적인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섹스’나 ‘오르가슴’은 기본이고 ‘46번 체위’ 같은 구체적인 19금 대사들이 난무하는 작품으로 개막 전에는 다소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쿠거족과 닮은 삶을 살고 있는 박해미를 비롯해 독신주의자인 김희원 등은 캐릭터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녹여내며 열연을 펼쳐 중장년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관객층의 유입 효과도 


예전에는 일부 장면에서 19금 코드가 나와도 뮤지컬에서는 대부분의 연령대가 관람이 가능했다. 매출을 위해서는 더 많은 관객들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에는 오히려 ‘19금’이라는 수식어를 당당히 내세우는 공연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전체 관람가 공연에서 볼 수 없는 ‘확실한 취향’을 접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노린 것이다. 


그 결과 일부 계층에 국한됐던 관객층이 새롭게 재편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미스터 쇼>는 만 19세 이상 여성으로 관객을 한정해 호기심을 자극했다. <쿠거> 역시 입소문을 타고 30~40대 중장년 여성 관객층의 관람률이 꾸준히 증가하기도 했다. 과거의 19금 코드 공연이 당당하지 못하고 은밀히 즐겨야 하는 음지의 산물이었다면, 작품성과 완성도를 갖춘 지금의 19금 코드 공연들은 이처럼 새로운 관객을 유도하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19금 컨셉을 예술로 승화시킨 공연은 고급화된 마케팅 방식으로 관객을 유치하기도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건너온 <크레이지 호스>는 ‘아트 누드쇼’라는 수식어가 지나치지 않은 공연이다. 전라에 가까운 8등신 미녀들이 자신의 몸을 조명이나 영상의 피사체로 삼아 예술적인 오브제로 활용한다. 와인과 함께 이들의 춤과 노래를 감상하는 한국 공연의 관람 형식은 <크레이지 호스>의 본거지인 파리 샹젤리제 클럽과 동일하다. 줄거리보다는 시각적인 이미지에 집중하는 이 공연은 당초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등급 분류에서 공연 허가를 받지 못했다가 재심의를 거쳐 ‘19금’ 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 공연 역시 ‘19금’이라는 용어를 오히려 긍정적인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6호 2015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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