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 악역들이 한자리에
크리스마스를 앞둔 연말에는 가족 관객을 잡으려는 공연이 연이어 개막한다. 주로 따뜻한 감동의 드라마가 대부분이지만 올해는 조금 다른 길을 택한 작품이 눈에 띄었다. 아동·청소년을 위한 공연을 주로 올리는 유니콘 시어터에서 제작한 뮤지컬 <배디스(Baddies: The Musical)>다. 이 작품은 동화 속 악당들을 한데 불러 모아, 나쁜 녀석들의 매력을 한껏 보여준다. 동화를 소재로 한 작품도 현대적인 센스를 가미하고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면 전 연령층을 사로잡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딛은 뮤지컬 <배디스>는 <인 투 더 우즈>와 <슈렉>의 뒤를 잇는 ‘남다른 동화 뮤지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익숙한 동화 짜깁기
동화는 더 이상 어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겨울왕국>과 <인사이드 아웃>은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 성인 관객을 충분히 극장가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디즈니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라이온 킹>과 <알라딘>은 정교한 퍼펫과 특수 효과,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2D 애니메이션 속 환상의 세계를 생생하게 무대 위에 구현했고, 연령 불문 관객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슈렉>은 기존 동화의 클리셰를 비틀어 풍자하고, 반전 효과를 줘서 재미를 추구했다. 뮤지컬 <인 투 더 우즈>는 빨간 모자, 잭과 콩나무, 신데렐라, 라푼젤 등을 교묘하게 엮어서 새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뮤지컬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의 악한으로 알려진 ‘서쪽 마녀’ 입장에서 재구성한 이야기다. 이렇듯 평범한 동화도 낯설게 보거나 뒤집고 비틀면 그 세계가 확장되고,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 구조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다.
뮤지컬 <배디스>는 ‘빨간 모자 이야기’로 시작된다. 동화의 클라이맥스, 빨간 모자가 할머니 집에 찾아와서 할머니로 변장한 늑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다. 으스스한 선율이 깔리고, 어두운 조명 아래 빨간 모자가 “그런데 할머니 입은 왜 그렇게 커요?”라고 묻는다. 나쁜 늑대가 “너를 잡아먹기 위해서지!”라고 외치려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경찰관 둘이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나쁜 늑대를 연행한다. 나쁜 늑대는 느닷없이 동화 밖으로 끌려 나와 감옥에 수감되고, 그곳에서 비슷한 죄목으로 끌려온 신데렐라의 못생긴 언니 둘과 후크 선장, 그리고 난쟁이 럼펠스틸스킨을 만난다. 나쁜 늑대처럼 여러 동화 속에서 체포되어 온 여러 캐릭터들은 서로 누구인지 맞추며 인사를 나누고, 왜 다짜고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는지 추리해내려 한다. <배디스>는 여러 동화 속 악역만을 뽑아서 모아놓은 흥미로운 구성으로 코믹한 상황을 만드는 동시에 선과 악의 가치에 대해 고민한다.
악역의 정체성 찾기
영문 모르고 끌려온 ‘나쁜 늑대’는 유일하게 자신은 나쁘지 않다고 주장하는 존재다. 동화 속에서 악역을 맡아 잘 연기하는 게 어째서 죄가 되느냐고 항변하면서, 굳이 자신이 진짜로 ‘나쁜’ 늑대여야 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면서 사실 신데렐라와 사귀고 있다고 고백하는 수줍음까지 보인다. 반면, 감옥 안의 다른 캐릭터들은 작품 속의 악역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스스로 악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즐기고 있다. 감옥에서도 선장처럼 군림하는 후크는 불량배처럼 위압감을 조성하고, 난쟁이 럼펠스틸스킨을 수시로 괴롭힌다. 신데렐라의 두 언니는 자신들이 ‘못생긴 언니들’로 낙인찍혀 항상 무시당하고, 왕자의 눈에도 들지 못해서 서럽다고 항변하면서도 자신들이 뼛속까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하진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악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편 럼펠스틸스킨은 제대로 된 나쁜 악당이 아니라는 이유로 감옥 안에서 계속 무시당한다. 정체성을 꿋꿋이 지키던 ‘나쁜 늑대’는 자신을 비웃는 그들 앞에서 순간적으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크게 성질을 내는데, 그 모습에 모두 벌벌 떠는 것을 보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자신이 진짜 ‘나쁜 늑대’라는 걸 깨달은 그는 충격 속에 자신들이 구제 불능의 악역이며, 감옥에 갇혀 마땅하다며 운명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작품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뉜 동화(Fairytale)의 세계에서 시작된다. 영문 모른 채 감옥에 갇혀 음울한 기운을 뿜어내는 악역들, 그리고 면회를 왔다면서 해맑게 웃는 신데렐라와 피터 팬은 바라보기만 해도 두 집단 간의 명확한 대비가 보인다. 환하게 빛나는 ‘선’은 어두운 ‘악’보다 옳은 것처럼 보이고, ‘악’은 자동적으로 주눅 들어 진짜 죄인처럼 움츠러들게 된다.
하지만 곧 선악은 뒤집힌다. 착하면 행복해지고, 악하면 벌을 받는 단순한 동화 속 세계와 달리 현실의 선악은 겉보기와 다르고 구분이 쉽지 않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유리 구두가 발에 맞으면 왕자와 결혼할 수 있다고 하니까 앞다퉈 발가락을 자른 신데렐라의 못생긴 언니들이 정말 나쁜 사람일까? 허세덩어리에 자기밖에 모르는 피터 팬에게 당하기만 하는 후크 선장이 과연 악한일까? 동화 속 세상에서 ‘나쁜 짓’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온 이들이 동화 밖으로 나오자, 그들의 딱한 사정이 보이고 악행을 이해할 여지가 생긴다. 더구나 신데렐라와 피터 팬의 영악한 본모습이 드러나면 구분은 더 흐릿해진다. 신데렐라와 피터 팬은 본인들이 악당들을 감옥에 가뒀다는 사실을 숨기고, 어려움에 빠진 악당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거라며 악의 없는 얼굴로 접근한다. 하지만 악역들을 영원히 수족처럼 부려먹을 수 있는 노예 계약서를 작성하는 게 이들의 목적이었다. 결국 신데렐라와 피터 팬의 감언이설은 거짓이었다는 게 밝혀지고, 악역들은 기지를 발휘해 둘의 야욕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신데렐라와 피터 팬은 앞으로도 영원히, 원래의 동화 속에서 충실히 역할을 이행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 동화는 악역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 같았던 선악의 구분을 흐리고, 마침내 뒤집어서 선과 악의 가치를 새삼 일깨운다. 악역들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를 찾고, 자신의 할 일을 되찾아 동화 속으로 돌아가서 계속 행복하게 악역을 성실히 수행하게 된다.
캐릭터의 현대적인 재구성
이 작품의 무대는 감옥이고, 철망 뒤로 라이브 밴드가 자리하고 있다. 별다른 소품이 없는 공간에서 철제 이층 침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역동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무대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의상과 분장이다. 동화 밖의 감옥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만큼, 동화적인 느낌보다는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의상을 선택해 캐릭터를 드러냈다. 신데렐라의 언니들은 펑키하고 ‘힙한’ 의상과 다양한 액세서리로 개성을 드러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신데렐라와 대비되는 스포티한 의상이 역동성을 살렸다. 전통적인 미의 기준과 달리 요즘 시선으로 보면 못생긴 것이 아니라 개성이 강하고 매력적으로 보인다. 후크 선장의 경우에는 선이 드러나는 검은 스트라이프 정장으로 남성미를 극대화했다. 양복을 입고 무게감 있게 움직이는 후크 선장은 성숙한 남성의 향기를 풍겼다. 후크 선장이 예전에 변호사였다는 설정도 추가해 매력을 한껏 드러냈다. 양복을 입고 어른 행세를 하지만 속은 여전히 제멋대로인 피터 팬은 상대적으로 미성숙하고 무책임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럼펠스틸스킨은 키가 작고 머리가 붉은 배우가 연기해서 동화 속 난쟁이의 특징을 살렸지만, 편한 의상을 선택해 다른 악당들에게 구박받는 동네 아저씨의 느낌도 함께 냈다. 나쁜 늑대는 거대한 몸집에 수염이 덥수룩한 배우가 맡아 나쁜 늑대(Big Bad Wolf)의 특징을 잘 드러냈다. 처음 보면 캐릭터들의 외형이 동화 속 묘사와 거리가 멀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현대적이면서도 세심하게 본연의 특징을 잡아낸 의상과 분장 선택으로 영리하게 캐릭터를 드러냈다.
용두사미의 함정
갑작스러운 경찰관의 등장으로 빨간 모자 이야기가 방해를 받아 중단되고, 악역이 감옥으로 이송되는 설정은 신선하게 첫머리를 장식한다. 한방에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호기심을 느끼게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본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역동적이고 신선했던 초반부에 비해, 후반부로 갈수록 작품이 늘어진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다. 피터 팬과 신데렐라가 악당들에게 착한 사람으로의 변신을 제안하는 컨설팅 사업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는, 악역들을 설득하는 설정이 황당해서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는데, 상당한 시간을 들여 설명하느라 더 긴장감이 떨어졌다. 후반부에 선한 역과 악역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우고 대결을 통해 승자를 결정하는 장면도 작품의 클라이맥스임에도 불구하고 늘어지고 억지스럽다는 인상이 강했다. 소재와 발상이 신선하기 때문에 그것을 쫀쫀하게 잘 이끌어갔다면 훨씬 더 훌륭한 이야기 전개를 보여줬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고 한계를 드러냈다. 후반으로 갈수록 뮤지컬 넘버와 넘버 사이에 어색함이 흐르거나 때로는 배우들이 장면을 연결하기 버거워 보였다. 하물며 곡의 완성도도 전반부와 후반부가 달랐다. 향후 전반부에 걸맞게 후반부도 탄탄하게 다듬어야 할 필요가 느껴지는 구성이었다.
뮤지컬의 교육적 효과
아동·청소년 뮤지컬을 주로 올리는 유니콘 시어터가 제작한 작품이며 동화를 소재로 했기 때문인지 객석에는 학교에서 단체로 온 것 같은 아동 관객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때때로 예상치 못한 객석의 생생한 반응에 배우들이 연기를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듯 특수한 상황에 있는 작품이라서 관람하는 아이들에게 교훈을 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들었다. 소재나 넘버만 보면 이 작품은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만들어도 손색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동 관객을 타깃으로 했고, 결국 일반 관객과 아동·청소년 관객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중심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동화를 소재로 했다고 꼭 아동만을 위한 작품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감하게 일반 관객을 타깃으로 하여 극을 구성하면 더 높은 완성도를 자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후크 선장이 풍기는 남성미나 신데렐라의 언니들이 자랑하는 패션은 일반 관객의 미적 기준에 부합했다. 동화에서 벗어나 양복을 입고 사기극을 꾸미고, 어른 행세를 하다가 타락해 버린 피터팬의 캐릭터도 더 발전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뮤지컬 작품이 재미도 있고 교훈도 준다면 물론 좋다.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둘 다 놓치게 된다면, 차라리 하나를 놓아주고 다른 하나에 집중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뮤지컬 <배디스>는 아동을 위한 교훈적 효과에 대해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작품 후반부의 재미와 완성도를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흥행의 이유
뮤지컬 <배디스>는 초연 작품인 만큼 아직 보완할 구석이 보이지만 발전할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구성이나 전체적인 균형에 아쉬운 점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교육 효과가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유니콘 시어터가 툴리 스트리트에 위치한 현 건물로 이전한 후 1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완성도에 아쉬움은 남지만 동화 속의 악당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는 설정 자체가 갖는 힘이 매우 크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를 다른 설정으로 제시하고,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그려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될 수 있었다. 더구나 코믹한 요소를 잘 살려서, 캐릭터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동화 세계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현대의 트렌드를 잘 반영해 흥미롭게 만들었다. 모든 동화를 하나로 엮어 하나의 세계관을 제시하고, 그 세계 안에서 캐릭터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게 한 설정이 끊임없는 재미를 이끌어냈다.
최근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실사화가 이어지고 있다. 동화를 원작으로 한 콘텐츠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곧 영국 국립극장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원작으로 제작한 뮤지컬도 개막한다. 동화는 모든 사람들의 어린 시절 추억,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의 기억이다. 동화를 바탕으로 한 콘텐츠가 우리의 추억을 환기하는 역할을 하는 만큼, 동화는 앞으로도 늘 주목받는 소재일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7호 2015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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