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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클로즈 투 유: 배커랙 다시 그리기> [No.148]

글 |조연경 사진 | Johan Persson, Nobby Clark 2016-02-26 4,030

오직 음악을 향한 헌사



또 주크박스 뮤지컬이냐고 치부하면 곤란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 팝 음악을 주름잡은 작곡가와 작사가 콤비, 버트 배커랙과 할 데이비드의 음악으로 엮은 작품 <클로즈 투 유: 배커랙 다시 그리기(Close to You: Bacharach Reimagined)>(이하 <클로즈 투 유>) 말이다. 보통 주크박스 뮤지컬은 가수가 발표한 기존 음악을 이용해서 <맘마미아!>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하거나 <저지 보이스>처럼 해당 가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사 중심의 구성이다. 그런데 <클로즈 투 유>는 플롯도 이야기도 캐릭터도 없다. 이 작품을 뮤지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뮤지컬이 되기 위한 조건

뮤지컬은 장르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서 정확히 정의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보면 느낌이 온다. 향만 맡으면 원두와 믹스 커피를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굳이 구성 요건을 따져보지 않아도 뮤지컬에서는 뮤지컬만의 향이 난다. <클로즈 투 유>는 줄거리, 사건, 주요 인물, 대사 이런 게 없다. 유일한 대사가 있다면 이거다. “우리는 버트 배커랙의 명곡들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다 같이 즐겨주세요.” 거꾸로 말하면 관객들은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어떤 플롯이 숨어 있으며 주인공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추리하고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 작품은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배커랙의 노래를 한다. 별다른 말 없이 노래하고 그다음 또 노래를 한다. 노래하며 관객과 눈을 맞추고, 노래하며 배우들끼리 즐긴다. 그렇게 이 작품은 뮤지컬과 콘서트 그 사이 어디쯤에 서 있다.


<클로즈 투 유>는 뮤지컬 <렌트>와 <원스>를 탄생시킨 뉴욕 시어터 워크숍(New York Theatre Workshop)에서 2013년에 <왓츠 잇 올 어바웃(What’s it All About?: Bacharach Reimagined)>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다. 메인 보컬이자 기타리스트, 음악감독으로 작품의 주축을 담당하는 카일 리압코(Kyle Riabko)가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 팝 음악계를 이끌어 온 작곡가 버트 배커랙의 명곡 삼십여 곡을 직접 편곡해 공연을 실현시켰다. 그는 보완된 작품을 들고 2015년 여름, 런던의 메니에르 초콜릿 팩토리(Menier Chocholate Factory) 무대에 올랐다. 런던 관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같은 해 10월에는 웨스트엔드의 크라이테리온 시어터(Criterion Theatre)로 옮겨 공연하게 되었고, 이때 공연 제목을 <클로즈 투 유>로 바꿨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스티븐 호겟은 안무를 맡았던 전작 <원스>에서 그랬듯 장르 간 구분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이 작품만을 위한 연출을 했다. 그는 전작 뮤지컬 <원스>에서 연출가 존 티파니와 호흡을 맞춰 기존 뮤지컬의 문법과 사뭇 다른 결의 무대를 선보였고, 이번에는 더욱 이질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의 연출이 오히려 이 작품에서 가장 뮤지컬다운 요소가 됐다.




스토리텔링이 아닌 이모션텔링

아늑한 아지트처럼 꾸민 공간에서 배우들은 편안하고 즐겁게 노래한다. 그런 작품이라면 관객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콘서트나, 자기들끼리 노래하며 즐기는 연습실을 엿보는 느낌의 작품으로 보여야 할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이 작품에서는 뮤지컬의 향기가 난다. 스티븐 호겟의 연출 덕분이다. 스티븐 호겟은 특히 몸동작을 영리하게 이용한다. 몸으로 의미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마음속의 깊은 감정을 표현한다. 몸의 움직임을 이용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날것의 감정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게 그의 방식이다. <원스>에서 독특한 동작으로 등장인물의 감정을 드러내고, 극 전체를 진한 감정으로 물들였던 스티븐 호겟은 이 작품에서도 동작을 이용해 감정적으로 풍부한 드라마를 탄생시켰다. 연주와 노래를 겸하는 배우들이 단순히 합주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에 맞춰 감정을 연기한다. 사랑 노래는 애틋함을 담아서 부르고, 신 나는 노래는 즉흥 연주를 하듯이 서로 장난스럽게 눈을 맞췄다. 벽에 매달려 있는 소파에 앉기도 하고 선 채로 몸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고, 구석에서 다트 놀이를 하기도 한다. 배우들이 다 같이 기타를 높이 들거나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추상적인 동작도 종종 등장했다.


카일 리압코가 대표로 노래하는 경우가 많기는 했지만, 리드하는 배우가 바뀔 때마다 그때그때 다른 색깔의 무대가 완성됐다. 그런데 무대는 전체적으로 따뜻했다. 배우들은 순수하게 진심을 다해 따뜻하고 즐거운 무대를 완성시켰다. 때로는 콘서트처럼 관객들을 보고 눈을 맞추며 불러주었고, 때로는 자기들만의 놀이처럼 재미있게 합주했다. 배우들은 공연 내내 거의 퇴장 없이 무대에 머무르며 때론 함께 노래했고, 때로는 연기하듯 무대를 채웠다. 하지만 배우들의 캐릭터나 관계가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든 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흩어졌다.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다른 작품처럼 스토리나 캐릭터가 아니라 감정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배우들이 무대 구석에 앉아 쓸쓸한 표정으로 노래하며 하얀 종잇조각을 전등 불빛에 흩날리는 장면은 노래와 어우러져 아련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지만 다른 함의는 없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없는 공연이기 때문에 배우들의 동작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찾아내긴 쉽지 않았다. 다만 무대 위의 모든 동작, 소품, 조명이 각 노래에 걸맞은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용됐다. 그래서 공연 전반에는 감정이 흘러넘쳤다.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을 말하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적인 연출이었다. 그 감정에 몸을 맡겨야 했다.





빛과 노스탤지어의 무대

감정이 흘러넘치는 작품을 위한 무대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쓰였다. <스프링 어웨이크닝>과 <아메리칸 이디엇>에서 아련하면서도 강렬한 무대를 꾸몄던 크리스틴 존스의 디자인은 <클로즈 투 유>에서도 일관적이었다. 무대는 따뜻한 거실처럼 낡은 소파와 악기들이 가득했다. 무대 중앙의 뒷벽에는 각종 악기를 붙여두었다. 캣타워처럼 발판이 있어 배우들이 올라가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벽 중간에는 소파도 붙어 있다. 무대를 입체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이 작품에 에너지를 더해줬다. 무대 양옆에는 무대석이 마련되어 있어서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평범한 객석 의자가 아니라, 어릴 적 놀러 갔던 할머니 집에나 있을 법한 푹신한 꽃무늬 소파와 의자가 무질서하게 놓였다. 무대 위에는 피아노, 현악기, 드럼과 이름 모를 생소한 악기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바닥은 회전 무대다. 무대 구석에는 다트 판도 걸렸다. 그리고 벽과 무대 위에는 따뜻한 노란 조명의 램프를 구석구석 심어 놓았다. 역시 시골집에서나 봤을 법한 촌스럽지만 따뜻한 느낌의 램프였다. 크리스틴 존스의 무대는 연주자들이 자연스럽게 합주하며 놀 수 있는 지하 아지트 느낌이 들면서도 70년대 옛날의 소품이 가득해서 아련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뉴욕 시어터 워크숍이나 메니에르 초콜릿 팩토리보다 넓은 크라이테리온 시어터의 무대를 채우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그 덕에 무대가 큰데도 아늑한 느낌을 잃지 않았다. 높이 뻗은 윗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배우들이 벽을 기어 올라갈 수 있게 하고, 회전 무대를 추가해 기존 공간의 느낌을 잃지 않으면서도 입체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작인 <스프링 어웨이크닝>과 <아메리칸 이디엇>에서 그랬듯 동그란 전구 조명을 활용해 무대를 밝혔다. 무대를 통째로 전환하진 않지만 조명만으로도 무대가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만들어냈다. 공연 후반에는 전등의 갓을 걷어 초반보다 더 날카로운 빛을 만들었고, 그 빛 덕분에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강렬함이 완성됐다.





자유로운 보헤미안 음악

한편 음악은 청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의 결과물이었다. 리드 보컬이자 음악감독으로서 전곡의 편곡을 맡은 이 작품의 공동 제작자 카일 리압코는 배커랙의 전성기를 수놓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의 명곡을 감성적으로 편곡해 따뜻하고 정서적인 느낌을 내면서도, 요즘 노래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세련되게 바꿔놓았다. 특히 돋보인 것이 리듬, 그리고 다양한 악기의 사용이다. 버트 배커랙은 팝계의 3대 멜로디스트라고 불릴 만큼 기교 있고 뛰어난 멜로디의 노래를 썼다. 그래서인지 한 번 들으면 며칠씩 귀에서 맴도는 중독성 있는 멜로디의 노래들이 공연 시간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었다. 카일 리압코는 이 음악에 리듬을 더해 보헤미안 스타일을 추구했다. 평범한 피아노와 기타는 물론, 생소한 타악기를 많이 활용해 연주했다. 아프리카 스타일의 타악기가 둥둥 울리며 음악을 바닥부터 단단히 잡아주고, 거기에 두 대의 피아노, 기타와 콘트라베이스 등 다양한 악기를 활용해서 음악의 선율을 복합적으로 층층이 쌓아 나갔다. 덕분에 관객들은 눈앞에서 음악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면서 서로를 찾아 결합하고 하나로 엮여 가는 모습을 즐길 수 있었다. 입체적인 무대, 수시로 바뀌는 조명, 묘한 동작으로 움직이며 생소한 악기를 연주하는 배우들, 그리고 중독성 강한 멜로디의 노래까지, <클로즈 투 유>는 한순간도 지루할 새 없이 관객들의 눈과 귀를 따뜻하게 감싸줬다. 그런 분위기에서 ‘Close to You’를 비롯해 ‘Alfie’, ‘I’ll Never Fall In Love Again’, ‘I Say A Little Prayer’,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 등 우리 귀에 익숙한 명곡들이 쉼 없이 쭉 이어졌다. 몰입을 방해하는 어설픈 이야기 없이 음악으로만 구성된 따뜻하고 믿음직한 선물 세트였다. 마음 푹 놓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흘러간다. 마지막엔 우리나라에 광고 음악으로 유명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의 주제곡 ‘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의 우쿨렐레와 피아노 버전이 커튼콜로 마무리되었다.




감정, 그리고 소통

이 작품에 이야기가 없는데도 뮤지컬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편곡한 노래들이 담고 있는 진한 감정 덕분이다. 콘서트처럼 노래를 잘 불러서 관객들을 감동시키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에 젖어 있는 것이다. 보는 사람의 감정을 말랑말랑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전형적인 웨스트엔드의 프로시니엄 무대로 옮기면서 공간이 넓어져 관객들과 더 진하게 소통하는 데 한계가 있었지만, 무대 구조를 변화시켜 최대한 어우러지려는 노력을 보였다. 회전 무대 위에서 연출된 동작으로 무대를 꾸미는 배우들의 음악 에너지가 극장을 가득 채웠다. 배우들이 서로와 자기 자신, 그리고 음악 자체에 몰두해서 다양한 악기로 풍성한 곡을 함께 만들어내는 모습은 감동적이었고, 눈과 귀가 즐거웠다. 보헤미안적이고 힙한 느낌이 가득한 편곡과, 때로는 아지트에서 다 같이 어우러져 노는 듯한 분위기를 관객들이 더 적극적으로 즐겼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카일 리압코가 커튼콜에서 ‘떼창’을 제안하며 해소되는 듯했다. 향후 공연에서는, 본 공연의 러닝타임이 짧은 만큼 커튼콜이 더 길어져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작품을 공동 개발한 카일 리압코의 무게감이 상당했다. 향후 그를 대신할 배우를 찾을 수 있다면 프랜차이즈가 지속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캐나다와 미국의 촉망받는 젊은 아티스트인 카일 리압코가 자신을 대표하는 작품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이유가 있을까. 런던에서 예정된 공연이 끝나면 한동안 이 작품을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배커랙 다시 그리기

우리는 지나간 옛 시절을 진하게 그리워한다. 그래서 고전 명작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고, 그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올드 팝을 이용한 주크박스 뮤지컬을 만든다. <클로즈 투 유>가 특별한 이유는 이 음악이 40년 전 배커랙의 음악인 동시에 현재 카일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의 편곡에는 요즘 청년의 감성이 짙게 배어 있다. 이 작품은 지금의 사랑, 우정, 외로움, 쓸쓸함을 담아냈다. 배커랙이 이 작품을 본 뒤 꼭 연애편지 같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 말이 꼭 들어맞는다. 이 공연은 아스라이 동터 오는 주홍빛 새벽에 쓴 연애편지 같다. 가장 우울하게 가라앉을 시간에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진심을 다해서 마음을 적어 내려간 연애편지. 그래서 이 작품에는 모든 감정이 다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리고 그걸 서투르게 숨기려 하지 않고 다 담아낸다. 아침이 되어 해가 밝아오면 후회할지도 모를 새벽 감성이 가득하다.


이 작품은 기존의 제목 <왓츠 잇 올 어바웃?(What’s It All About?)>을 버리고 <클로즈 투 유(Close to You)>로 새롭게 웨스트엔드에 올랐다. 오프브로드웨이와 오프웨스트엔드에서는 통했던 제목이 웨스트엔드에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관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제목에 담았을까. 제목이 어떻든 카일 리압코와 그가 이끄는 재기 넘치는 뮤지션들은 현대적이고 보헤미안적인 방식으로 배커랙의 음악을 재해석해서 들려준다. 스티븐 호겟의 연출로 담은 풍부한 감정은 지난 60년간 미국 팝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버트 배커랙을 재조명하고, 그를 다시 상상하게 했다.


곧 사그라질 거라던 복고 열풍의 유행이 전 세계적으로 몇 년째 지속되고 있다. 옛 일에 대한 추억을 생각하고, 옛 감성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 특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옛날을 되돌아보는 유행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다. <클로즈 투 유>는 옛날 것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요즘 식으로 재창작한 복고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은 복고의 힘을 빌려 전 연령층에게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8호 2016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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