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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INSIDE THEATER] <렛미인> [No.149]

글 |김슬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2016-02-29 5,001

난 너와 친구가 될 수 없어


하얀 눈밭에 키 크고 마른 자작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정글짐 위에 걸터앉은 소년과 소녀. 이제 막 어린아이의 껍질을 벗기 시작한 이들은 열두 살의 오스카와 일라이다. 또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서 홀로 루빅스 큐브를 맞추고 있는 오스카 앞에 나타난 일라이. 얇은 니트 하나로 앙상하게 마른 몸을 간신히 감춘 그녀는 “난 너와 친구가 될 수 없어”라는 첫인사를 운명처럼 남기고 사라진다. 젊지만 늙었고, 소녀이면서도 소녀일 수 없는 뱀파이어는 그렇게 소년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로 친구가 되지 말았어야 했을까. 스웨덴 소설 『렛 더 라이트 원 인』이 2008년 자국에서 영화로 제작되고, 이후 2010년 미국에서 다시 한 번 영화화되면서 많은 이들이 호러 영화의 아름다움을 찬탄했다. 이번엔 연극이다. 뱀파이어 소녀를 둘러싼 사랑 이야기, 강렬한 서사의 힘과 신비로운 무대 미학으로 빛나는 연극 <렛미인>이 마침내 한국을 찾았다.




세계적인 제작진, 레플리카 프로덕션의 한국 공연
 <렛미인>은 연극 공연으로는 한국 최초로, 원작 프로덕션의 모든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하는 레플리카 형식을 채택한다. 2013년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이 제작한 이 작품은, 연극 <블랙워치>와 뮤지컬 <원스>로 토니상과 올리비에상 최우수 연출상을 받은 존 티파니가 연출했다. 원작 소설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가 직접 대본을 썼고, 존 티파니와는 뮤지컬 <원스>에서 이미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스티븐 호겟이 안무가로 참여했다. 연극의 이야기는 작가의 본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전체 흐름과 맥락에 꼭 필요한 장면들로 재구성되었고, 공연은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심리 상태를 안무로 시각화함으로써 무대 예술만이 자극할 수 있는 원초적 감각들을 영민하게 활용한다. 한국 공연에는 6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을 통과한 배우 박소담과 이은지, 오승훈, 안승균, 주진모 등 12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영화보다 연극, 비극적 사랑의 드라마
뱀파이어는 영원히 늙지 않지만,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고선 생을 이어갈 수 없다. <렛미인>의 비극은 바로 이러한 뱀파이어의 존재적 숙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연극은 영화보다 훨씬 섬세하게 하칸과 일라이의 관계에 주목하는데, 두 사람의 사랑이 순수하고 절대적일수록 자기 파괴적인 생을 반복해야 하는 일라이의 외로움도 짙어진다. 오랜 세월 일라이의 곁을 지키며 인간을 사냥해 온 하칸은 이제 늙고 힘 빠진 중년이 되었으나, 그녀가 제 또래의 오스카와 어울리는 것을 질투할 만큼 여전히 일라이를 사랑한다. 오스카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하칸은 사람들의 의심으로부터 일라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에 염산을 들이부어 스스로를 망가뜨린다. 병원 침대에 누운 그는 평생을 바쳐 사랑해 온 소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을 내어주고, 일라이는 그의 피에서 모르핀 맛이 난다며 흐느낀다.


오스카와 일라이의 우정 또한 더 아기자기한 장면들로 채워져 그 결이 한결 풍성해졌다. 영화가 클로즈업된 눈빛 하나, 손짓 한 번으로 이들의 관계를 잡아낸다면, 연극은 십 대의 소년 소녀가 서로를 알아가고 교감하는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날것의 순간들을 그대로 길어 올려 그 미묘한 떨림을 포착한다. 사탕 가게에서 주인을 골려먹고 물건을 훔치며 낄낄대거나, 함께 누운 침대에서 어느 손가락으로 찔렀는지 맞추는 놀이를 하는 이들에게 현실의 고통은 아직 너무 멀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밝혀진 어느 아침, 일라이가 해뜨기 직전 커다란 트렁크로 들어가 버리자, 오스카는 그 옆에 모로 누워 한 팔을 트렁크에 걸쳐 그녀를 끌어안는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들의 우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머지않은 미래에 오스카 역시 하칸과 같은 삶을 살게 되리라는 걸 더욱 고통스럽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대가 주는 공포, 그 노골적 은유의 극한
하지만 연극이 비극적 사랑의 드라마를 강조한다고, 뱀파이어 소재의 특수성이나 호러물로서 원작이 뿜어내는 매력이 반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한된 스크린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는 관객들은 ‘불안’을 느끼지만, 열린 무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연극의 관객들은 ‘공포’에 노출된다. 본디 공포란 두려워할 명확한 대상이 있을 때 발생하는 감각으로, 연극의 공포는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심급의 효과로 객석을 장악한다. 예를 들어 무대 한가운데 시퍼런 눈밭에서 하칸이 살인을 저지르는 동안, 다른 한쪽이 환하게 밝아오면 사탕 가게에 들른 오스카가 도둑질을 하고 있다거나, 사람을 물어뜯고 입가에 피가 흥건한 일라이가 높은 나무에 올라 동요하는 숲의 사람들을 가만히 내려다본다거나 하는 식이다. 무자비한 광각의 무대에 숨겨진 것은 없고, 관객들은 그 순수하게 꾸밈없는 폭력에 압도당한다.


연극 <렛미인>의 공포는 바로 이 무대와 조명, 음악의 미장센이 소름 끼치도록 유연하게 맞물려 태어나게 된다. 이 연극은 온갖 상상력과 극적 허용을 동원해 매우 경제적으로 무대를 운용하는데, 단출한 대소도구만으로 시점이 이동하고, 등장인물들이 무대를 전환하는 동안 조명은 장소를 구획한다. 눈 덮인 자작나무 숲은 깊이를 알 수 없이 아득해 살인 사건의 배경이 되기에 적합하고, 수직으로 뻗은 나무들은 일라이가 뱀파이어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무엇보다, 몽환적이면서도 강렬한 사운드로 귀를 자극하는 올라퍼 아르날즈의 음악은 이 잔혹하고 아름다운 호러 연극에 완벽한 맞춤형이다. 차마 여기서 모두 밝힐 수는 없지만 극의 후반부, 일라이가 오스카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복수를 시작하면, 이 모든 효과에 힘입어 객석의 공포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이들의 세계에는 해가 없다. 연극 무대는 달이 흰 눈에 반사되어 푸른빛이고, 낭자한 피에 물들어 붉은빛이다. 그 무대를 따라 오스카와 일라이의 사랑도 시리고 아프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 오스카는 예의 그 커다란 트렁크를 기차에 싣고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모스 부호로 대화를 하는 두 사람을 감싸는 것은 따뜻하고 화사한 대낮의 해가 아니라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하얀 열차 등이다. 그렇게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친구가 되지 못한 소년과 소녀는 끝이 정해진 새 삶을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떠돌아야 하는 어둠 속에서,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는 말을 속삭이면서.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9호 2016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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