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피처 | [ODD NOTE] 억압된 것들의 귀환 고딕 소설 [No.149]

글 |안세영 2016-03-02 7,330

뮤지컬계에 고딕 소설 붐이 부는 걸까? 2월 현재 공연하고 있는 대형 뮤지컬  <레베카>,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가 모두 고딕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인 가운데,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까지 뮤지컬화를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다. 『어셔 가의 몰락』 등 대표적인 고딕 소설을 남긴 작가 포에 대한 뮤지컬 <포우>도 올해 처음 국내에 소개된다. 사실 고딕 소설과 뮤지컬의 만남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스테디셀러 뮤지컬로 사랑받는 <지킬 앤 하이드>나 <오페라의 유령>도 알고 보면 고딕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니 말이다.





이성주의 시대의 그림자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영국에서 특히 유행했던 고딕 소설은 잔인하고 기괴한 이야기를 통해 공포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설 양식이다. ‘고딕(Gothic)’이란 원래 뾰족한 성탑을 특징으로 하는 중세의 건축 양식을 묘사하기 위해 등장한 표현이다. 고딕 소설이라는 명칭 역시 중세 건축물이 주는 폐허의 분위기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대부분의 고딕 소설은 비밀 통로·지하 감옥 따위가 설치된 고딕풍의 성과 저택을 배경으로 하며, 유령과 같은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탐닉한다. 『옥스퍼드 고딕 설화사전』에 의하면 고딕 문학은 ‘공간적으로는 갇혀 있다는 폐소 공포의 느낌, 시간적으로는 대물림이라는 끔찍한 감정’을 포함해야 하며, ‘이 두 차원은 서로를 강화하며 몰락을 향해 치닫는 진저리치는 추락’을 형상화한다.


고딕 소설은 당대에는 선정적이고 상업적인 문학으로 폄하되었다. 그러나 고딕소설이 그토록 유행한 배경에는 오랫동안 비합리성과 초자연성을 억압해온 당대 이성주의·계몽주의에 대한 반발이 자리하고 있다. 억압은 갈망을 공포로 변질시킨다. 억압된 갈망이 공포스런 존재가 되어 돌아오는 이야기, 사라진 줄만 알았던 지난 세기의 망령이 귀환하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고딕 문학인 것이다. 오늘날 고딕 소설이라는 용어는 중세적 배경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공포를 자아내거나 인간의 이상 심리를 다룬 소설 유형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과거의 흔적으로 인한 고통, 자아의 분열적인 본성, 특정 개인을 괴물 또는 타자로 구성하는 것, 변형되거나 병든 신체에 대한 집착 등의 주제가 그것이다. 고딕 소설의 효시로 인정받는 작품은 호레이스 월풀이 1764년에 쓴 『오트란토 성』이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지킬 박사와 하이드』 등이다. 후대에 이들 작품은 단순히 공포를 일으키는 작품이 아니라 이성주의·남성주의·식민주의 사회에서 억압된 타자, 성적 욕망, 사악한 충동 등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읽혔으며, 현대의 호러, SF, 범죄 스릴러 장르의 원류로도 평가받는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여성 작가를 중심으로 고딕 소재를 로맨스와 결합한 작품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이러한 고딕 소설의 영향은 19세기에 쓰인 브론테 자매의 고전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에서도 엿볼 수 있다. 두 작품은 오래된 저택, 광막하고 야성적인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불안감을 야기하는 해괴한 사건과 망령에 시달리는 인물, 감금, 살인, 광기 등 고딕 소설 특유의 소재를 풍부하게 활용했다. 20세기에는 뒤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고딕 로맨스의 정점을 찍었다. 이 작품은 『제인 에어』의 모방작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사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고딕 로맨스의 장르적 공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상류사회의 아웃사이더인 여주인공(주로 고아이며 강한 자의식 혹은 순수한 성격이 강조됨)이 매력적이지만 비밀스런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의 대저택에 머무르며 기묘한 체험을 하는 것은 이 장르에서 가장 흔한 클리셰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이나 『미녀와 야수』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뮤지컬에서는 <레베카> 외에 또 어떤 작품을 예로 들 수 있을까? 다름 아닌 히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이러한 고딕 로맨스적 전통에 뿌리를 박고 있다. 가스통 르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파리 오페라 극장에 사는 의문의 존재 팬텀과 그의 도움으로 프리마돈나가 되는 고아 코러스걸 크리스틴의 이야기로, 전형적인 고딕 로맨스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고딕 소설의 뮤지컬화        
그렇다면 고딕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 유독 자주 무대에 오르고 또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첫 번째로 극장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수성, 즉 거대하고 폐쇄적이고 어둡고 환상적인(매일 밤 무대 위에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물들!) 공간이 고딕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적합한 환경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 음악과 춤을 중심으로 서사를 끌어가는 뮤지컬의 비현실적인 표현 양식은 비이성과 환상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고딕 소설과 태생적으로 잘 어울린다. 상업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 고딕은 관객이 극장에서 흔히 기대하는 놀랍고 충격적인 경험, 전율에 대한 욕구를 즉각적으로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고풍스럽고 웅장한 무대, 신기한 특수효과, 다소 극단적이고 선정적인 표현 등 대중의 관심을 끌기 쉬운 요소가 장르 안에 자연스레 녹아있다.


고딕 소설이 뮤지컬화할 때 갖는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소설에서 배경인 건물이 그 자체로 하나의 캐릭터가 되는 것처럼, 뮤지컬에서도 무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일찍이 <오페라의 유령>이 촛불 사이로 나룻배가 나아가고 거대한 샹들리에가 객석 위로 떨어지는 등 공연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들을 탄생시켰던 것이 그 예다. 국내 디자이너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드라큘라>의 경우, 고딕 양식을 고스란히 반영한 세트는 물론 최첨단 4중 턴테이블 무대로 드라큘라의 초월적인 힘을 드러냈다. <프랑켄슈타인>은 성벽을 무대 막처럼 활용해 폐쇄성을 강조하며, 그 벽이 열릴 때 비로소 드러나는 웅장하고 기괴한 실험실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레베카>는 메인 홀의 긴 계단으로 대저택을 재현한다. 오리지널 무대의 경우 저택이 불타는 장면에서 이 계단에 불이 솟구치는 화려한 특수효과를 사용하기도 했다.



내용 면에서는 사랑과 연민을 키워드로 한 각색이 눈에 띈다. 원래 호러 쪽에 기울었던 작품들조차 뮤지컬로 넘어오면 애절한 로맨스로 탈바꿈한다. <오페라의 유령>은 추리물에 가까웠던 원작과 달리 팬텀과 크리스틴의 로맨스, 그리고 흉측한 얼굴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았던 팬텀의 외로움을 부각한다. <드라큘라>와 <지킬 앤 하이드>는 원작에 없던 로맨스를 아예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동시에 드라큘라와 지킬이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내적 갈등을 겪게끔 만들어 관객의 연민을 자아낸다. <프랑켄슈타인>은 빅터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앙리라는 인물을 집어넣어 브로맨스를 가미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원작에서도 인간적이고 연민을 자아내는 존재였으나, 그간 영화 등 대중매체에서 단순한 호러 캐릭터로 소비되어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뮤지컬은 오랜만에 연민의 대상인 괴물을 되살려낸 셈이다. 한편, <프랑켄슈타인>은 뮤지컬로 넘어오면서 장르적 성격이 더 뚜렷해진 작품이기도 한다. 뮤지컬에는 원작에 없던 빅터의 과거사가 추가되었는데, 고성 안에서 일어난 끔찍하고 비극적인 죽음, 다시 돌아온 시체, 마녀를 믿는 미신적인 주민들, 과거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 등 그야말로 고딕 소설의 단골 소재가 대거 등장한다.


캐릭터의 변신 혹은 일인이역 연기가 자주 사용된다는 것도 재미있는 특징이다. 과거 고딕 소설이 그 존재 자체로 이성주의의 이면을 들춰내는 역할을 했듯, 뮤지컬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표면과 심층이라는 이중의 형상을, 한 무대 한 육체 안에서 표현해낸다. <지킬 앤 하이드>의 주인공은 목소리와 제스처의 변화만으로 지킬과 하이드를 오간다. <프랑켄슈타인>의 모든 주연 배우는 1막에서 우아하고 귀족적인 인물을, 2막에서 비열하고 세속적인 인물을 연기한다. <오페라의 유령>에서는 팬텀의 가면이 벗겨지며 흉측한 얼굴이 드러나고, <드라큘라>에서는 노쇠한 드라큘라가 흡혈을 한 뒤 젊고 강력해진다. 이러한 변신이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 오직 배우의 연기력과 무대적 연출 기법으로 관객의 눈앞에서 완성될 때 관객은 고딕의 환상적이고 전복적인 매력을 한층 강렬하게 경험하게 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9호 2016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