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일상도 무대 조명만큼 다채롭게 빛나길
지난 11월 브로드웨이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명디자이너 케빈 아담스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2013 아르코 국제공연예술전문가 시리즈’의 일환인 국제 조명 디자인 워크숍을 위해 방한했다. 케빈 아담스는 국내에서 공연한 <스프링 어웨이크닝>과 <넥스트 투 노멀>, <아메리칸 이디엇>을 비롯해 <헤드윅>과 <헤어>의 리바이벌 공연, 연극 <39 계단> 등에 참여했고, 토니상을 세 차례 받은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의 무대 조명이 아닌 전구와 형광등, 네온 등을 이용한 비전통적인 스타일로 개성을 인정받고 있다. 올해 <그날들>과 <풍월주>, <카르멘> 등에 참여한 백시원 조명디자이너와 그가 만났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조명 디자인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조명디자이너들의 일상과 고민으로 흘러갔다.
일상 속 조명이 무대로
백시원 오래전부터 이름과 작품으로만 알고 있던 분을 직접 만나게 돼 기쁩니다. 저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국내 공연에 참여하면서 케빈 아담스에 대해 알게 됐어요. 이후 당신의 홈페이지를 자주 방문해 둘러보곤 했죠.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도 조명 디자인을 하고 있고 전구나 조명 관련 오브제에 관심이 많다 보니 많은 도움이 됐어요.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일반 전구나 형광등, 네온과 형광관 등을 많이 쓴 게 인상적이에요.
케빈 아담스 일단 제가 그런 것들을 좋아해요.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조명 기구를 무대에서 봄으로써 관객들은 그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돼요. 우리가 평소 형광등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틀어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람들에게 ‘형광등을 좋아하세요?’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별로라고 해요. 그런데 제 공연을 보여주면서 ‘저것도 형광등이에요’라고 말하면 ‘오, 저건 정말 아름다운데요!’라는 반응을 보이죠. 관객들이 제 공연을 보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평범한 전구나 형광등을 이용하더라도 좀 더 다채롭게 조명을 꾸미면 좋겠어요. 또 저는 직선으로 이어진 빛을 좋아해서 긴 형광관을 많이 쓰죠. 빛의 밝기나 색감뿐만 아니라 전구의 모양도 중요해요. 조명 기기로서뿐만 아니라 조형물로 기능하는 걸 선호하죠.
백시원 <스프링 어웨이크닝>에 채도가 높은 형광 전구들을 사용했어요. 근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색깔을 접할 일이 별로 없어서 무척 신선했을 거예요. 일상 공간에서 네온사인으로 보는 게 전부였을 테니까요. 물론 요즘에는 LED가 보편화되고 건축 조명에서도 종종 볼 수 있게 됐지만, 우리나라 정서상 그런 진한 색깔을 선호하진 않았죠. 한국 관객에게는 굉장히 생경한 조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관객들은 이를 선호하는 것 같기도 해요.
케빈 아담스 색상을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태도가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준비할 때 공연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타임스 스퀘어가 있었어요. 그곳엔 정말 현란한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광고판, 대형 스크린들이 있죠.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젊은이들의 초상을 그리는 현대적인 공연이었기 때문에, 타임스 스퀘어에서 쇼핑하고 곧바로 공연장에 오는 젊은 관객들에게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둘러싼 현실 세계가 공연에도 반영되어야죠.
백시원 무대에서 전구를 쓰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된 걸로 알고 있어요. 처음 선보였을 때 관객 반응은 어땠나요?
케빈 아담스 첫 작업을 한 때가 1980년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미술관에 가는 걸 즐기고, 1960~1970년대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특히 크리스티앙 볼탄스키나 브루스 노먼처럼 전구를 이용한 설치미술 작품들에서. 젊었을 땐 그들을 거의 그대로 모방한 조명도 만들어봤죠. 처음엔 전구 하나, 형광관 하나, 이 정도였지, 눈에 띄게 공격적으로 사용하진 않았어요. 공연의 규모 자체도 작았고요. 저는 무대디자이너로 먼저 일을 시작했어요. 제 무대에 조명도 직접 달아봤는데 의외의 호응이 있더군요. ‘우리 공연에도 그런 조명 디자인을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명 일을 점점 더 많이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좀 더 복잡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전구를 더 많이 쓰면서,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한 것 같아요. 초반에는 철물점에서 싸게 사서 쓸 수 있는 전구나 형광등 같은 것만 사용하다 보니, 첨단 조명 기기는 쓸 줄 몰랐어요. 마흔이 넘어서야 무빙 라이트를 써봤나? (웃음) 아무튼 제가 선호하는 스타일을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리라곤, 브로드웨이에서 제 스타일을 펼치는 조명디자이너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죠.
백시원 정말 부러운 일이네요. 하지만 ‘전구 스타일’만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전구를 쓰지 않는 공연도 있고.
케빈 아담스 제가 선호하는 또 다른 스타일은 업타운과 다운타운의 스타일을 믹스하는 거예요. 1950년대 뮤지컬 스타일의 조명과 실험적인 현대물의 느낌을 혼합해 색다르게 연출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칸 이디엇>에서 정통 오페라에서 봄직한 엘레강스한 분위기와 로큰롤의 거친 느낌을 결합시켰죠.
백시원 케빈만의 스타일을 고집했다기보다, 각 작품에 맞는 디자인을 개발하다보니 그런 스타일을 유지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 이슈가 된 몇몇 작품들에서 개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만, 사실 조명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들이 다 담겨 있잖아요. 케빈 하면 떠오르는 스타일이 그의 모든 것인 양 받아들여지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케빈 아담스 제가 정식으로 조명 디자인 교육을 받지 않은 게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한 것 같기도 해요.
백시원 그게 장점으로 작용했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있지 않나요?
케빈 아담스 저를 고용한 사람들이 걱정해주면서 ‘공식적인 훈련을 받지 않아서 힘들겠다’고 말하곤 하는데, 저는 그에 대해 할 말이 없어요. 제가 뭐라 하겠어요. (웃음) 사실 한계를 느낄 때도 있죠. 어떤 우울한 날엔 ‘내가 정식 교육을 받았더라면 이런 문제는 한큐에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왜 이걸 붙잡고 있나’ 하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색상을 좀 더 잘 혼합했으면 좋겠다, 조명 앵글을 이렇게 틀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요. 근데 사실 누구든 자기 작품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 않나요?
조명디자이너로 사는 것
기 자 조명디자이너들은 빛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케빈 아담스 조명디자이너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은 전반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지 않을까요? 특히 시각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면 두리번두리번하면서 뭐든 눈에 담으려고 하죠. 저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빛을 의식하고, 남들 눈에 안 띄는 게 제 눈에 들어오곤 해요.
백시원 전 요즘 전보다 더 색감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목에 두른 스카프를 가리키며) 예전엔 이런 녹색, 안 좋아했어요. (웃음) 전에는 파스텔 톤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비비드한 컬러 사용에 재미를 들였어요. 아, 요즘 전 그거 갖고 놀아요. 필립스에서 나온 휴(Hue)라는 스마트 전구요.
케빈 아담스 그게 뭐죠? 아하, 무선으로 색상도 바꿀 수 있고 그런?
백시원 맞아요, LED 전구예요. 무선으로 연결해 스마트폰으로 전구를 켜고 끌 수 있고 다양한 색깔로 바꿀 수도 있죠. 과거에 같은 브랜드 제품 중 유사한 게 있었는데, 그건 이렇게 선명한 색상이 아니었거든요. 요즘 나온 건 굉장히 강렬한 색을 내죠. 와이파이로 연결해 쓰고 있는데, 제가 집에 들어가면 불이 들어오고 집을 나오면 불이 꺼져요. 타이머 기능도 있고요. 아이튠즈에 연결하면 아이튠즈에 저장된 음악이 나올 때 해당 음반의 커버 이미지 색깔에 따라 조명 색깔도 바뀌어요. 동료와 학생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어요. 쉽고 재밌게 색감을 공부할 수 있거든요. 언젠가 공연에서도 한번 사용해보고 싶어요.
케빈 아담스 오, 그레이트! 조명디자이너들이 이러고 놉니다. (일동 웃음) 집에서 직접 체험해보고 실험하고. 저도 전구나 형광관, 채도가 높은 조명을 무대에 선보이기 전에 집에다 먼저 설치해봤죠. 침실과 거실 곳곳에 빨간 등, 파란 등, 보라색 형광관, 그런 게 있답니다.
기 자 무대 조명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평소 못 보는 전문 조명 기기만 다룬다고 생각했는데, 실생활에 쓰이는 것들이 무대 조명으로 연결되곤 하는군요.
케빈 아담스 몇천 달러 하는 기기가 아니라 철물점에 가서 찾을 수 있는 등으로도 무대 조명 디자인을 할 수 있어요. 모든 게 하이(High) 테크는 아니에요. 로(Low) 테크도 있고, 노(No) 테크도 있어요. (일동 웃음) 관객들이 철물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어, 공연에서 본 게 여기도 있네, 나도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어요. 파란색, 빨간색 등 다양한 조명에 눈을 뜨면 일상생활이 훨씬 윤택해질 텐데, 아무 생각 없이 다 똑같은 하얀 형광등을 켜놓고 사는 걸 보면 너무 안타까워요. 물론, 지구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살죠. 맞은편 아파트를 보더라도 밤이면 거의 모든 집에서 같은 색의 빛을 내요. 간간이 핑크색 빛을 내는 창문이 보이면, ‘쟤는 뭘 좀 아는구나’ 하고 생각하죠.
기 자 무대 조명에 대해 빛, 즉 밝음과 어두움을 먼저 생각했지, 색깔에 대해선 크게 인식하지 못했어요.
케빈 아담스 빛을 밝히는 것, 초점을 맞추는 것, 색상으로 정서를 표현하고 대비를 이루는 것 등. 조명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죠. 큐 사인에 맞춰 공연의 리듬을 만들기도 해요. 조명이 아주 길게 이어지다가 서서히 바뀌거나 아주 빠르게 단속적으로 바뀌면서 드라마가 전개되는 리듬을 뒷받침해줄 수 있거든요. 이런 걸 다 감안해서 조명 디자인을 합니다. 하지만 관객은 물론 심지어 공연계 사람들도 조명 디자인을 잘 몰라요.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죠. 이런 점을 유리하게 써먹을 수도 있습니다. 제작자들이 잘 모르니까 ‘이 기계는 꼭 필요합니다’ 하고 말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사주거든요. 왠지 필요한 것 같으니까 ‘안 된다’곤 말 못하죠. (일동 웃음)
백시원 우리나라에선 그게 안 되더라고요. 너무들 잘 아셔~ (웃음) 저는 조명 디자인을 20여 년간 했는데 이제 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아요. 새로운 작업을 할 때 텍스트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제목이나 줄거리 보고 ‘아, 이건 이런 스타일로 해볼까’ 하고 먼저 정해버리곤 하거든요. 그러면 안 되는데. 케빈은 어때요? 작업을 맡으면 무슨 일부터 시작하나요?
케빈 아담스 작품마다 다르죠. 록 뮤지컬 같은 현대물에 참여할 때는 다른 유사한 쇼들은 뭐가 있고 관객들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봐요. 공연장에 오기 전에 관객들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정서로 사는지 알아보고요. 하지만 <헤다 가블러> 같은 고전 작품을 할 때는 타임스 스퀘어에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지, 그런 건 알 필요가 없죠. 대본에 충실하면 되니까요. 작품에 따라 출발점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대본을 보고 연출가와 무대디자이너의 의도를 알아야겠죠. 헌데, 이해해요. 저도 평소에 가진 아이디어가 있으면 ‘이걸 이번 프로젝트에서 써먹어 볼까’ 이런 생각하곤 하거든요. 비슷한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지겨워지고 매너리즘에 빠지죠. 한 장르만 계속하면 힘들어지고요. 그래서 저는 뮤지컬 했다가 연극이나 오페라 하고, 다양하게 하는 게 좋아요. 새로운 디자인으로 확 바꿔볼 때도 있지만, 지금의 제 스타일이 계속 진화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백시원 저는 요즘 무용 공연이 재밌더라고요. 표현주의적이어서 제가 상상했던 것들을 펼쳐 보일 수 있어요. 클래식 발레는 독특한 기기나 특별한 오브제가 사용되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기본적인 조명을 쓰거든요. 처음에 공부한 것들을 되새기게 되더라고요. 내가 왜 조명 디자인을 하려고 했는지, 조명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런 걸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돼요.
기 자 두 분은 조명 디자인을 하는 게 어떤 점에서 재밌나요?
케빈 아담스 어우, 난 없어요. 그냥 일이죠. 짜증 나고 답답할 때도 많고. (웃음) 그런데 직장에 갈 때 복장에 신경 안 써도 되는 게 정말 맘에 들어요. 아무거나 걸쳐 입고 가도, 거지같이 입어도 상관없거든요. (일동 웃음) 조명에 국한하지 않고, 팀의 한 구성원으로서 하나의 공연을 올리는 데 기여하는 것, 그게 좋아요. 어떤 사람들이 내 쇼를 보러 오는지 구경하는 것도 재밌고, 사람들이 내가 준비한 공연에 몰입하고 있는 표정들을 볼 때 너무 신기하고 멋져요. 물론 매번 반응이 좋은 건 아니지만. (웃음)
백시원 제가 상상한 걸 무대 위에 펼쳐 놓으면 관객들이 그걸 보고 평들을 해요. 뭐는 좋다, 뭐는 안 좋다. 박수를 치기도 하고 인상을 쓰기도 하죠. 사람들이 제가 상상하고 만든 것들에 반응하는 것 자체가 재밌고 행복해요. 관객은 그렇다 치고, 조명디자이너는 무대디자이너와 의견 다툼을 할 때가 있어요. 작품이 향해가는 방향은 같지만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에 대한 생각이 다른 거죠. 이런 문제가 있을 때 케빈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그쪽 사람들도 술 한잔하나요? (일동 웃음)
케빈 아담스 전 그냥 ‘에이, 몰라~’ 이러곤 다음 공연에선 더 나을 거란 생각으로 자신을 다독여요. (일동 웃음)
백시원 앞으론 뭐가 조명의 트렌드가 될까요?
케빈 아담스 컴퓨터를 이용하는 첨단 기술이 많이 생겼죠? 신기술이 계속 개발되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조작해야 빛을 발할 수 있잖아요. 현재 젊은 세대가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정말 궁금해요. 워크숍에 참여한 한 열여덟 살 청년은 태어나면서부터 컴퓨터를 만지며 자랐더라고요. 그 친구가 컴퓨터를 이용해 작업하는 걸 보면서 나도 무척 놀랐어요.
백시원 케빈이 다음 작품에서 보여줄 새롭고 핫한 아이템은 없나요?
케빈 아담스 당연히 있죠. 하지만 말 안 할 거예요. (일동 웃음) 절대 발설하지 않을 거예요. 뉴욕에 있는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제 아이디어가 다른 동료들에 비해 고작 반걸음 앞선 거라 약간의 힌트만 줘도 다들 알아차리고 따라할걸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3호 2013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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