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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트로이의 여인> 정재일 [No.158]

글 |배경희 사진 |표기식 2016-11-15 5,779

<트로이의 여인> 정재일

환한 어둠



첫 등장부터 현재까지, 2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천재 뮤지션이라는 수식어로 불려온 아티스트. 정재일은 그 자신의 말처럼 음악으로 시도해보지 못한 경험이 없을 만큼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해왔다. 이적, 백현진, 한승석, 박효신 같은 각양각색의 뮤지션들과 두루 작업해 왔다는 점이나, 영화음악과 무용,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 참여한 이력만 봐도 그의 넓은 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해보다 비를 좋아하고, 밝음보다 어둠에 끌리고, 희극보다 비극에 끌린다는 아티스트. 새롭게 도전하는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의 어둠 속에서 또 어떤 빛을 건져 올릴까.


예술하는 마음



                   

지금까지 정말 다양한 음악 작업을 해왔지만, 창극은 이번이 처음이죠? 여러 장르의 음악을 두루 섭렵하면서 다양한 장르와의 협업을 멈추지 않는 것. 정재일에게 음악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어요.

음악만 하기엔 아름다운 게 많으니까요, 세상에. 어떤 걸 표현하는 데는 여러 언어가 필요한데, 음악만 하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그리고 음악은 모든 예술이 필요로 해서 모든 장르와 친구가 될 수 있는 분야거든요. 이 특권을 누려야죠. 다른 장르와 협업은 무용이 시작이었어요. 다른 뜻은 없었고 그냥 순수하게 무용을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음악을 위한 음악을 쓰는 것과는 또 다른 어법이 있고, 또 다른 생명력이 있더라고요. 그걸 느끼고 나서는 연극도 하고, 미술도 하게 되고, 점점 그렇게 됐죠.


이 작업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어요?

극장 측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오래 알고 지낸 국립극장 기획팀 팀장님께서 이렇게 크리에이티브 팀이 꾸려졌는데 해보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지금까지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많은 경험을 했지만, 안숙선 선생님처럼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은 장인과 작업해 본 적은 없거든요. 한 수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죠. 또 명불허전 배삼식 작가님, 제가 어마어마하게 좋아하는 김무홍 의상디자이너, 작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 쟁쟁했어요. 이번 작업으로 처음 만난 옹켕센 연출님의 작품 비전도 좋았고요.


연출이 어떤 비전을 제시했는데요?

판소리의 순수한 전통을 살리는 공연이 첫 컨셉이었어요. 지금까지 많은 창극들이 여러 요소를 접목하는 시도를 해왔다면, 우리는 원형으로 돌아가서 장식 없는 정제된 소리를 들려주자고 하셨죠. 컨템포러리한 분위기를 최대한 배제하자고요.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창극이 아름다우려면 판소리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럼 제가 작곡가로 참여하는 의미가 없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저는 아주 순수한 음악도 이해할 수 있고 컨셉이 있는 음악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조율사가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음악을 위한 음악을 쓰는 게 아닌, 제 곡을 필요한 적재적소에 미니멀하게 배치하는 게 이번 작업의 목표죠.


캐릭터마다 다른 악기를 쓸 거라고 들었어요.

네, 이것도 기본적으론 연출님 의견이었는데, 판소리가 한 명의 소리꾼과 고수(북 치는 사람)라는 한 명의 악사가 이야기를 꾸려가는 미니멀한 형식이잖아요. 거기에 착안해 캐릭터마다 성격에 맞는 악기를 하나씩 매치하기로 한 거죠. 예를 들면, 헤큐바는 트로이의 여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여인이니까 강인하고 절제된 저음을 내는 거문고를, 카산드라는 복수심에 미쳐 버린 캐릭터에 어울리게 바람 같은 소리를 내는 대금을 악기로 써요. 트로이를 짓밟는 그리스 남자들 악기론 트로이 여인들의 소리와 확실한 대비를 이루는 타악기를 사용할 예정이고요. 그런데 악기 구성은 아직 바뀔 여지가 많아요.


전통 악기 중에서도 특별히 더 좋아하는 악기가 있어요?

거문고요. 거문고가 제일 겸허한 소리를 내거든요. 해금 소리처럼 화려하거나 대금 소리처럼 유려하지 않지만, 소리의 이면을 알게 되면 확 빠지게 되는 악기가 거문고인 것 같아요. 슬픈 음색을 띠는 아쟁도 좋아하고요.


혹시 다룰 줄 아는 것도 있어요? 악기 다루는 데 워낙 재능 있기로 유명하잖아요.

아뇨, 전통 악기는 쉽게 못 배워요. 기타나 베이스 따위와는 다르죠. (웃음) 그리고 여러 악기를 다루는 건, 특별히 악기 연주하는 걸 좋아해서라기보다 제가 제 곡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거든요. 예를 들면, 피아노를 이 정도 칠 줄 알아야 이 곡을 표현할 수 있겠다 싶으면 그만큼만 배우고 마는 거죠. 악기를 배우는 목적이 좀 다르다고 해야 하나. 만약 연주하는 것 자체가 좋았으면 기타리스트가 됐거나 피아니스트가 됐겠지만, 저한테는 작곡이 중심이니까요. 어쨌든 전통 음악을 이 정도로 좋아했으면, 산조 한 바탕이라도 탈 줄 알아야 하는데, 게으르고 생업이 바쁘고…. (웃음)


하긴 판소리는 어려서부터 좋아했다면서요. 판소리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어요?

워낙에 성대를 갉아먹을 듯한 파워풀한 소리를 좋아해요. 파키스탄의 카왈리나 스페인의 플라멩코, 한국의 판소리처럼 전통 음악에 그런 소리가 많은데, 제가 한국 사람이라 그런지 유독 판소리에 강렬하게 끌리더라고요. 서사가 있는 일인 오페라라는 거, 소리꾼이 네다섯 시간 동안 초인적인 힘으로 공연을 끌고 간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어요. 원체 긴 호흡을 지닌 예술을 좋아해서.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성악을 좋아해요. 팝이든, 클래식이든, 전통 음악이든, 노래하는 사람들을 제일 좋아해요.




예술의 힘

                     

 

문득 궁금한데, 음악을 듣는 것하고 쓰는 것 중에서 어떤 걸 더 좋아해요?

듣는 게 좋아요. 저는 예술 소비자로서의 제 삶이 더 좋거든요.


그럼 평생 단 한 곡의 노래만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뭘 들을래요?

어, 너무 어려워요. 모르겠어요. 근데 한 곡만 들어야 하는 상황이 저한테는 안 생겨요. 제가 써서 부르면 되잖아요. (웃음)


하하, 그렇겠네요. 곡을 쓰고 싶다는 열망은 언제 가장 느껴요?

보통은 감정이 요동칠 때 곡을 쓰고 싶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리고… 음악은 그냥 와요. 그냥,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공기처럼, 바람처럼. 그럼 그렇게 그냥 써지고. 아, 곡이 정말 잘 써질 때는 마감이 다가올 때. 그땐 정말 잘 써져요. 막 쓰고 싶어요. (웃음)


사실 전통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인상적이어서 그 질문을 한다는 게 이야기가 새버렸네요. 중학교 1학년 때 국립국악 관현악단의 예술감독을 만나 그와 교류하면서 전통 예술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하는데, 이런 얘기가 보통 사람들에겐…

이상하죠?


글쎄, 별세계 얘기처럼 들리죠. 보통의 또래와는 친해지기 힘든 특별한 아이였겠다, 그래서 음악에 더 깊이 빠져들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고.

그랬을 수도 있죠. 어쨌든 학교는 안 좋은 곳이었는데, 음악으론 소통할 수 있었으니까. 음악은 나이나 학벌이 중요하지 않거든요. 재능만 있으면, 열 살이든 스무 살이든 아님 마흔 살이든, 나이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고등학교 3학년 형들하고 밴드를 할 수 있었죠(당시 함께 밴드를 했던 멤버 최희철은 현재 뮤지컬계에서 활약하는 베이시스트가 됐고, 또 다른 멤버였던 장민승은 설치미술가가 됐다). 십대 때 긱스라는 밴드를 할 때도 정원영(키보디스트) 형하고 스무세 살 차이가 났고요. 서로 취향만 공유된다면, 음악에서 다른 건 전혀 문제되지 않아요. 음악하는 집단이 아마 예술 집단 중에서 가장 열린 집단일 거예요.


세 살이라는 되게 어린 나이에 악기를 접했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요?

세 살은 아니었고 아마 네다섯 살 때였을 거예요.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녔어요. 열심히는 했는데, 좋아하진 않았어요. 교육 방식 때문에. 좋아하는 곡을 치는 게 아니라, 이 곡 떼고 나서 저 곡을 떼고 하는 방식이 흥미를 유발하지 않더라고요. 우리나라 많은 아이들이 피아노를 관두는 이유 아닐까요. 그러다 초등학교 때 기타에 빠졌는데,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본 스웨덴 밴드 록시트가 멋있어 보였거든요. ‘우와, 멋있다, 그런데 기타는 구하기도 쉽네? 나도 하자.’ 이렇게 된 거죠. 거의 대부분의 록 밴드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시작할 거예요. 제 경우엔 어렸을 때 기타로 돈도 벌었으니까 이거 더 해보자 싶었고요. 그러다 스무 살이 되고, 시나브로 여기까지. 음악을 직업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웃음)


어, 정말요?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을 텐데?

남들보다 일찍 시작하긴 했지만, 별로 훌륭한 직업 같진 않았어요. (웃음)


그럼 어떤 직업을 갖고 싶었어요?

의사…? 진짜 사람들 삶에 도움이 되는 거 하고 싶었어요, 예술가 나부랭이 말고.


저는 음악이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음악을 대하는 순수한 태도나 음악에 한없이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음악의 힘을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 것 같고요.

음악보다는, 예술의 힘을 믿어요. 제가 피나 바우쉬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피나 바우쉬 공연을 처음 봤을 때 거의 오열하면서 봤어요. 공연에 특별한 드라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피나 바우쉬가 켜켜이 쌓아가는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그것들이 어마어마한 산이 돼있더라고요. 마지막에 그 장관을 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나는 거죠. 아마 그날 극장을 나서던 순간부터 제 삶은 조금씩 변화했을 거예요. 극장에서 두 시간 남짓 공연을 보는 동안 마음에 뭔가를 느낀 사람이라면 집으로 돌아가 그와 관련된 걸 하나씩 찾아볼 테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예술가들은 거기에 다시 영감을 받을 테고, 이런 연결이 삶에 꼭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8호 2016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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