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결을 따라
“늘 그리웠죠.” 한지상이 다시 그립던 무대로 돌아왔다. 지난해 3월 <프랑켄슈타인>을 마친 후 드라마 출연으로 잠시 무대를 떠났던 그가 <데스노트>로 복귀 소식을 알렸다. 그가 맡은 역은 데스노트를 통해 신세계를 펼치려 하는 천재 학생 라이토. “많이 많이 즐기고 있고, 연습하는 매 순간이 기쁘고 설레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라이토에 최적화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그는 촬영장에서조차 끊임없이 내면의 라이토를 끄집어내며, 한지상의 라이토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나를
표출할 수 있는
접점들
오랜만에 만난 한지상은 사뭇 달라 보였다. 스태프들에게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촬영 시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며 촬영장에 기분 좋은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데스노트>의 ‘라이토’스러운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기 위해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이 역할에 흠뻑 빠져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을수록 자연스레 찾아오는 무르익음이겠죠. 물론 <데스노트>의 영향도 커요. 정말 더 이상 원이 없을 정도로 즐겁고 열심히 작업하고 있거든요. 워낙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하고, 매력적인 역할인 데다, 오랜만의 원캐스트이고, 또 10개월 만에 하는 뮤지컬이기 때문이겠죠.”
지난해 초 한지상은 <프랑켄슈타인>을 마무리한 후 한동안 무대가 아닌 브라운관에서 활약했다. MBC 일일 드라마였던 <워킹 맘 육아 대디>에서 차일목 역을 맡아 전업주부가 적성에 맞는 일등 살림꾼 아빠의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그렇게 일여 년 동안 120부작이었던 드라마를 끝낸 후, 그의 마음은 다시 무대로, 그리고 <데스노트>로 향했다. 무엇보다 라이토가 그의 장점을 잘 끌어낼 수 있는 흥미로운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어두운 역할을 참 많이 맡았어요. 그리고 그런 역할을 표현했을 때 제 장점이 드러난다는 걸 깨달았죠. 라이토 역시 제 장점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역할이에요. 저만의 아이템들을 쓸모 있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죠. 더욱이 라이토라는 역할은 ‘순수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요. 더없이 순수하고 착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데스노트로 인해 변해 갈 수 있었죠. 그래서 더 매력적인 역할이에요.”
한지상은 라이토의 순수함을 이 역할의 중요한 포인트라 이야기했다. “류크는 라이토가 특별해서 선택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을 해요. 그저 우연히 그에게 데스노트를 던진 거예요. 라이토는 순수하고 평범한 학생이기에 충분히 악이 될 수 있는 거죠. 이를 전제로 라이토가 얼마만큼 순수하기에 이렇게 미쳐갈 수 있는지, 그 부분을 잘 표현해 내고 싶어요.” 때문에 그는 라이토가 변해가는 과정을 잘 담아내는 것이 이 역할에 대한 최우선 과제라고 말한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잖아요. 습관 하나 고치는 것도 너무나 어렵죠. 하지만 또 한 번 변하면 엄청난 임팩트를 줄 정도로 무서운 게 사람이에요. 라이토가 바로 그런 경우죠. 그런 만큼 그의 변화를 잘 그려내고 싶어요.”
라이토의 순수함을 꺼내기 위해 한지상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물론 라이토에 비해 많이 부족하겠지만, 저도 한때 모범생으로 산 시절이 있었어요. 특히 중학교 땐 모범지수로 따지면 라이토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죠. 되돌아보면 당시에 주입식 교육이 성행했기 때문에 개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순응해야 했죠. 그런 만큼 구속도 느꼈어요. 그러다 보니 모범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별 상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마음속에 꿍꿍이를 숨기면서 그 많은 상상들을 실현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곤 했죠. 그런 것들이 아마 라이토가 실현하고 싶은 상상의 세계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렇듯 한지상은 자신과 라이토의 접점을 하나씩 찾아가며 캐릭터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서로 닮아 있어
더 치열한
대결
<데스노트>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두 천재 엘과 라이토의 불꽃 튀는 두뇌 게임이다. 때문에 이 역할을 맡은 두 배우의 시너지 또한 이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다. 엘 역을 맡아 남다른 비주얼과 개성 강한 연기로 눈길을 끄는 배우 김준수. 자연히 그와 한지상의 조합이 기대될 수밖에 없는 무대다. “이번에 처음 (김)준수와 작업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지닌 엄청난 매력들을 알게 됐어요. ‘놈의 마음속으로’ 뮤직비디오 촬영을 할 때였어요. 준수가 무언가를 가득 담고 있는 눈빛과 표정으로 저에게 다가오는데 엘 그 자체로서의 섬뜩함이 느껴지더라고요. 그야말로 한 방 먹은 듯한 느낌이었죠. 기분 좋게 자극을 받고, 그 리액션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었어요. 김준수라는 배우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죠.”
관객들이 그러하듯, 한지상 역시 엘과 라이토가 이룰 시너지에 기대감을 가득 내비쳤다. “준수의 적극성은 제게 정말 좋은 자극이 되었어요. 고맙게도 첫 음악 연습 때부터 굉장히 세심히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더라고요. 한 곡 한 곡 끝날 때마다 귓속말로 필요한 팁을 주기도 했고요. 덕분에 즐겁고 기분 좋게 연습에 임할 수 있었어요. 그 뒤로 더욱 편한 사이가 되었고, 이런 과정을 거치며 서로 주고받는 느낌들이 엘과 라이토를 통해 잘 묻어나올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어요.”
한지상은 자신이 맡은 라이토 뿐 아니라 상대 배역인 엘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았다. “이번 시즌에 처음 참여하면서, 라이토와 엘의 닮은 점을 찾고 싶었어요. 실제로 만화 원작을 보면 FBI 수사관의 약혼녀로 등장하는 한 캐릭터가 처음 만난 라이토를 보며 엘과 묘하게 닮았다는 말을 해요. 라이토 역시 엘을 만났을 때 나 같은 천재가 이 세상에 또 있다는 걸 느끼게 되고요. 천재들만의 공감대가 테니스 장면을 통해 드러나기도 하죠. 서로를 마주하며 ‘내가 아는 걸 너도 알 수 있겠구나’ 하는 견제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죠. 이것이 서로 닮은 부분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한지상은 라이토와 엘의 닮은 점을 꼭 포착해 내야지만,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두뇌 게임이 실현될 수 있으리란 설명을 덧붙였다. “외관상으론 두 캐릭터는 완전 반대에요. 라이토는 단정하면서 완벽하고, 엘은 어딘가 삐딱해 보이죠. 하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는 굉장히 닮아 있을 거예요. 그 점을 꼭 찾아내고 잘 표현해 내고 싶어요.” 그는 이 작품의 재미를 엘과 라이토의 두뇌 게임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세돌 바둑기사가 알파고와 엄청난 두뇌 게임을 펼쳤잖아요. 물리적인 격투 게임보다도 더 쉽지 않은 것이 두뇌 게임과 심리전이죠. 라이토의 겉모습은 엘과 정반대지만, 천재들만의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점점 두 인물의 닮은 부분이 드러나도록 극을 이끌어 나가고 싶어요. 그래야 이들의 불꽃 튀는 신경전이 더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노력과
경험으로 맺을
결실
<데스노트>로 2017년의 시작을 알리는 한지상.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전, 그에게 지난 한 해는 어떤 시간으로 남게 되었는지 궁금해 2016년의 기억을 물어보았다. “먼저 <프랑켄슈타인> 재연이 기억에 남아요. 초연이 정말 힘들었는데, 그것보다 더 열심히 했거든요. 그리고 여전히 경험이 많이 부족하지만, 일일드라마를 무사히 마쳤다는 것도 의미가 있었어요. 120부작에 출연하면서 분명히 제가 얻은 무언가가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거든요. 비록 지금 이 순간 바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것이 언젠가 열매가 되어 돌아오리라 확신해요. 신인으로서의 도전들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는 스스로를 후천적 개발형 배우라고 지칭하며, 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냈다. “예전부터 고집스럽게 저를 소개할 때 후천적 개발형 배우라고 이야기해 왔어요. 후천적으로 경험과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 배우인 거죠. 처음 뮤지컬을 시작했을 때, 제가 얼마나 미숙했는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어요. 10여 년 넘게 경험치를 쌓으면서 점차 성장해 나간 거죠. 물론 지금도 그 미숙한 부분이 다시 드러나지 않을까 의심하며, 늘 경계심을 갖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고요. 지금도 절대 완생이 아니거든요. 완생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는 미생일 뿐이죠. 드라마와 영화 등 다른 장르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한창 열심히 뛰고 헤쳐 나가고 경험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앞으로 배우 한지상이 나아갈 방향이 궁금해졌다. 과연 배우로서 한지상이 생각하는 완생의 모습은 무엇일까? “두 선배님이 떠오르네요. 유준상‘ 선배와 조승우 형이요. 두 분 다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배우인데, 제가 원하는 방향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항상 후배들에게 좋은 자극을 주시는 선배님들이거든요. 물론 두 선배들의 표현 방식과는 다른 저만의 표현 방식으로 승부를 해야겠지만요. 그리고 (김)무열이도 제게 좋은 자극을 주는 좋은 배우에요. 벌써 만난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이젠 볼 때마다 든든한 친구가 되었어요.”
배우로서 완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지상. 그의 노력은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눈앞에 놓인 임무에 정확하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금은 완전히 라이토에 갇혀 있어요. 저에게 주어진 미션이에요. 라이토로서의 삶을 잘 헤쳐 나가는 것! 그런 만큼 그 이후의 일들은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때문에 <데스노트>가 막을 내린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라이토를 그리고 있을 거라 이야기하며 여운을 남겼다. “아마 그때쯤이면 라이토를 정리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저는 공연이 끝날 때마다 굉장히 아팠어요. 공연의 막이 내리면 긴장이 풀려서 늘 아프더라고요. 꽉 쥐고 있던 걸 놓으니까요.”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지상이 얼마나 역할에 젖어 있는 배우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저는 믿어요. 언젠가 이런 노력들이 좋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 걸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0호 2017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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