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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들 [No.161]

글 |박보라 2017-03-06 4,029

천재들은 예술과 삶 사이에서 늘 고통받았다. 뮤지컬 <광염 소나타>는 김동인의 동명 소설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된 작품으로, 우연히 죽음을 목격한 이후 살인을 하면 악상이 떠오르는 천재 작곡가의 이야기다. 살인이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불운한 삶과 우울, 불안, 분노,
예민 사이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줬던 예술가들을 살펴보자.




평생 죽고 싶어 했던 여자, 실비아 플라스       

실비아 플라스는 분노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던 여자다. 그녀의 작품은 여성의 상처를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실비아 플라스는 평생 자살 시도를 한 것으로 유명한데, 심지어 여러 번의 자살 시도를 통해 ‘자살 징크스’를 얻었다. 자살을 시도하고 실패한 뒤 발표한 작품마다 큰 주목을 받은 것. 그래서 그녀는 글이 잘 써지지 않거나 우울할 때마다 자살 시도를 이어 나갔고 그때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재적인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녀는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자살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만다. 이 충격으로 실비아 플라스의 우울증이 발병했고 다음 해엔 첫 자살을 시도한다. 운 좋게 살아난 그녀는 창작 활동을 통해 죽음을 견뎌냈다. 그녀의 두 번째 자살 시도 시기는 하버드 여름 학교의 입교가 거절당했을 때였다. 심각하게 좌절감을 느낀 실비아 플라스는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지만 다시 깨어났고, 이번에도 우울증을 시로 치유했다.


영국으로 유학을 간 그녀는 당시 시인이자 비평가인 테드 휴즈를 만나 불같은 사랑을 나누고 두 달 만에 결혼식을 올린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첫 번째 시집 『거상』을 출판하지만, 삶은 여전히 암울했다. 남편이 창작 활동에 매진할 동안 실비아 플라스는 육아와 살림을 책임져야만 했고, 심지어 남편의 외도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자동차를 직접 운전해 강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자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녀는 당시 이별의 고통과 헤어짐을 토대로 대표작 「아빠(Daddy)」를 포함해 약 30편의 시를 썼다. 당시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에는 남성 중심의 사고를 강하게 비판한 자유로운 여성상이 담겨 있다.


이혼 후 어려웠던 생활과 외로움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통이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1963년 어느 겨울날, 옆방에서 잠든 두 아이가 일어나면 먹을 수 있도록 간식을 준비하고 가스가 아이 방으로 새어 들어가지 않게 문에 꼼꼼하게 테이프를 발랐다. 그리고 가스 밸브를 열고 오븐에 머리를 박았다. 마침내 금발의 아름다웠던 천재 작가는 자살에 성공했다.




삶의 의미를 다한 남자, 다자이 오사무           

일본 문학계에서 실의와 허무를 꼬집은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는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집안을 평생 부끄러워했으며, 이 때문에 자신을 경멸하고 평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지역에서 영향력 있던 유지의 집안에서 태어난 다자이 오사무는 청년 시절 좌익 운동에 열중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자신의 출신 계급을 고민하다가 수면제를 다량으로 먹고 혼수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집에서 보내오는 돈으로 화려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자신을 경멸했다. 이런 고민에서 헤어날 수 없던 다자이 오사무는 도쿄 긴자의 술집 여종업원을 만나 두 번째 자살을 시도한다. 수면제를 복용한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 발견되었지만, 여종업원은 죽고 다자이 오사무는 겨우 살아난다.


살아난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혐오에 빠져 마르크스 주의에 심취한다. 마침내 집안에서 그의 좌익 활동을 알게 되자 다자이 오사무는 마음을 다잡고 본격적인 소설가로의 길을 걷는다. 그의 세 번째 자살 시도는 한 신문사의 입사 시험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은 직후다. 충격을 받은 그는 산으로 올라가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하지만, 또 실패하고 만다. 이후에도 다자이 오사무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맹장염과 복막염의 진통을 없애려 투여한 마취약을 통해 평생 지독한 약물 중독에 빠졌다. 약물 중독의 증세가 심해지자 주변 사람들은 결핵을 핑계로 다자이 오사무를 정신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는 한 달 후에 완치해서 퇴원했지만 “나를 인간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고 했을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다. 정신 병동에서의 체험과 여러 번의 자살 시도 경험은 그의 소설 『인간실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이어가던 그는 고등학교 교사인 이시하라 미치코를 만나 결혼한 뒤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밝은 분위기의 단편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자살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다자이 오사무는 「버찌」와 유작 「굿바이」를 쓴 후 가벼운 평상복 차림으로 집을 나가 전쟁 미망인이자 애인이었던 야마자키 도미에와 강에 몸을 던졌다. 이들의 시신은 다자이 오사무의 생일에 발견됐는데 두 사람은 기모노 끈으로 서로 묶여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죽음엔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유서에 “소설을 쓰는 것이 싫어졌기 때문에 죽습니다”라고 밝혔다.




높은 자의식의 소유자, 찰스 밍거스         

미국 재즈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재즈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는 자신의 음악적 능력을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그의 성격은 매사에 거칠고 공격적이었다. 특히 찰스 밍거스는 음악에 관해 극도로 예민하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많았다. 연주자들과 사소한 다툼은 기본이고, 클럽 공연 중에 관객들의 말소리가 크다 싶으면 연주를 멈추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애칭인 ‘찰리’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괴팍하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티후아나 무즈」 앨범에서 그의 이름이 ‘찰리 밍거스’라고 인쇄되는 실수가 벌어졌는데, 사실을 안 찰스 밍거스는 커버 디자이너를 죽여버리겠다고 화를 냈다는 후문도 떠돌았다.


찰스 밍거스의 예민함이 극에 달한 사건은 바로 동료 트럼펫 연주자 지미 네퍼와 벌인 일이다. 찰스 밍거스는 동료들의 연주가 마음에 안 들면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곤 했다. 연주 여행으로 클리블랜드에 방문한 찰스 밍거스는 공연 도중 지미 네퍼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고, 2주 후에 해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두 사람의 언쟁은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는데, 찰스 밍거스는 지미 네퍼의 앞니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트럼펫 연주자에게 앞니는 마우스피스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므로 지미 네퍼는 한동안 연주를 하지 못했고, 찰스 밍거스는 진짜 그를 해고했다. 분노한 지미 네퍼는 찰스 밍거스를 경찰에 고발했고 두 사람의 싸움은 법정까지 갔다. 이뿐만이 아니다. 찰스 밍거스는 음악 활동을 시작할 무렵 재즈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와 공개적인 석상에서 서로 비난을 퍼부었고, 멘토였던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에 대해서도 “음악 빼고는 본받을 가치도 없는 막장 인생”이라고 칭해 논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런 괴팍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찰스 밍거스는 1950년 이후 즉흥으로 곡을 연주하는 색다른 방식을 선보여 후대의 재즈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춤이 전부였던 소년, 니진스키      

비슬라프 포미치 니진스키는 전설적인 러시아의 발레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손꼽힌다. 천재적인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의 외도와 형의 추락 사고로 유년 시절부터 전성기까지 우울증을, 이후에는 신경쇠약으로 인한 조현병으로 30년 동안 고통 속에서 살다 죽었다. 춤에 대한 명성이 높아질수록 주위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를 숨기지 않았고, 소극적인 성격의 니진스키는 늘 외톨이였다.


러시아 황실의 로보프 왕자는 황실 발레 학교에서 뛰어난 두각을 보이던 니진스키의 후원자였다. 그는 동성애자였지만 니진스키의 육체보다 예술성을 더 사랑한 사람으로, 부유한 지식인이자 예술가였던 디아길레프가 니진스키에게 관심을 보이자 선뜻 소개해 줬다. 디아길레프와의 만남은 니진스키에게 선물이자 저주였다.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의 예술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안에 넣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고, 이 대가로 니진스키는 무용수이자 안무가로서 화려한 전성기를 맞는다. 그는 디아길레프가 세운 발레 루스에서 <목신의 오후>, <희롱>, <봄의 제전> 등 발레 작품의 안무와 주인공을 맡았다. 시대를 훨씬 앞서 나간 니진스키의 안무는 고전무용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새로운 형태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최고의 자리에 있던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와 등을 돌리는 결정적인 선택을 하는데, 바로 남미 순회공연 도중 만난 무용수 로몰라와 결혼을 한 것. 디아길레프는 분노하며 니진스키가 더는 무용계에서 활동할 수 없도록 파면시킨다. 내성적이고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니진스키는 자신의 전부였던 춤을 못 추게 되자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니진스키는 자신만의 무용단을 만들고 계속해서 춤을 추려 했지만 모든 공연이 실패한다. 2년 후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를 다시 찾아가 여러 발레 공연에서 주역으로 내세웠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결국, 스물아홉이 되던 1919년 니진스키는 신경쇠약을 이유로 <틸 오일렌슈피겔> 무대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신경쇠약은 조현병으로 이어졌고 그는 나머지 생애를 정신 병원과 보호 시설에서 보냈다. 니진스키는 정신이 멀쩡할 때면 어김없이 춤에 대한 열망을 내비쳤다고 한다. 그렇게 30여 년 동안 고통받던 니진스키는 1950년 런던의 한 사설 정신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1호 2017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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