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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윤동주, 시로 기억되는 이름 [No.162]

글 |나윤정 2017-03-28 3,762

올해는 시인 윤동주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서울예술단은 시대의 비극에 맞서 시를 써 내려간 윤동주의 이야기를 그린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를 다시 무대에 올린다. 27년 2개월이란 짧은 생을 살았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는 시인 윤동주. 시를 통해 아픈 시대를 견뎌온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았다.




 명동촌에서 꽃피운 감수성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의 기지로 이름난 명동촌은 북간도의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세운 한인 마을로,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진적인 곳이었다. 윤동주는 아름다운 자연과 기독교 신앙, 민족주의가 어우러진 곳에서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키웠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재능이 남달랐다. 또한 자신처럼 문학 소년을 꿈꾸는 벗들과 학교 생활을 함께할 수 있었다. 윤동주보다 석 달 먼저 태어난 고종사촌 송몽규, 외사촌 김정우, 문재린 목사의 아들 문익환 등. 명동소학교 동기생이었던 이들은 5학년 때 손수 원고를 모아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부푼 꿈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1931년, 윤동주의 가족은 명동촌을 떠나야 했다. 명동촌에 공산당의 테러가 만연해져, 조선인들이 몰려 사는 만주 용정으로 피신을 한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미션 스쿨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고, 활기차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는 교내 잡지를 만드는 일에 열성을 다했고, 웅변대회에서도 1등을 했다. 또한 축구도 잘했고, 옷차림에도 관심이 많아 재봉틀을 잘 다루었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학생이었다.


실제로 윤동주는 굉장히 모범적인 문인이었다. 자신의 시가 언제 완성되었는지 꼼꼼하게 날짜를 적어 잘 정리해 놓았다. 그의 시에 처음 날짜가 적힌 것은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인 1934년 12월 24일 쓴 세 편의 시였다. 그런 이유로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는 윤동주의 최초 시로 기록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가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날짜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송몽규의 등단은 윤동주가 시인으로서 출발점을 알리는 데, 큰 촉매제가 되었다.




나라를 뺏긴 문인의 고뇌    


27년 2개월이란 짧은 생애. 그중 윤동주의 삶이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이었다. 1938년,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나란히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입학 동기생이었던 유영 교수는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추억한다. “혈연관계가 있기도 하겠지만 얼굴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해서 마치 쌍둥이 같았다.… 그런데 성격은 완전 반대라 할 수 있다. 동주는 얌전하고 말이 적고 행동이 적은 데 반해, 몽규는 말이 거칠고 떠벌리고 행동반경이 큰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시를 같이 공부하고 창작도 같이하였다. 그러한 성격은 시에서도 나타나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연희전문학교 1학년 시절, 윤동주는 입학 후 첫 작품인 「새로운 길」을 비롯해, 그의 기독교적 사상이 묻어난 「이적」, 민족의식이 담긴 「슬픈 족속」 등 8편의 시, 「산울림」 등 다섯 편의 동시, 「달을 쏘다」라는 산문을 썼다. 그는 기숙사에 입사해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한 방을 썼다. 산문 「달을 쏘다」에는 윤동주가 기숙사 3층 다락방에서 내려다본 가을밤의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소리가 날 듯하다.”


윤동주는 여느 청춘들처럼 청운의 꿈을 품고 있었지만, 시대는 비극적이었다. 1939년 일제의 식민정책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지며, 한민족의 문화를 말살시키려 했다. 각 학교에 한국어 사용이 금지되었는데, 연희전문학교 문과만은 가까스로 한국어 강좌를 개설해 일본의 황국 신민 교육에 힘겹게 맞섰다. 이해 윤동주는 「달같이」, 「자화상」, 「소년」 등 6편의 시만 발표했다. 1940년, 윤동주는 치욕적인 시대 상황에 절망했고, 급기야 신앙에서마저 회의를 느끼며 절필했다. 그러다 12월이 되어서야 「팔복」, 「병원」, 「위로」, 세 편의 시를 창작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반이었던 그는 고뇌 끝에 마침내 마음을 다잡았고, 신앙심도 회복했다. 그리고 그 각오가 드러난 불멸의 시를 완성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그 유명한 「십자가」와 「별헤는 밤」, 그리고 「서시」다. 이 시기 그는 17편의 시를 써 내려가며 시대의 아픔을 극복해 나갔다. 윤동주는 졸업 전 자신의 시 19편을 묶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時』를 출간하려 했지만, 일본의 검열에 통과하지 못할 거란 이양하 선생님의 조언과 경제적 여건으로 출판을 단념한다. 당시 그는 시집의 필사본을 만들어 가장 가까운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는데, 다행히 해방 후 이것이 유족들에게 전해지며 윤동주란 시인이 잊히지 않고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짧은 생, 영원한 시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윤동주와 송몽규는 일본으로 함께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유학 절차를 밟기 전에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절차가 있었다. 다름 아닌 창씨개명. 그에 따라 윤동주는 히리누마 도오쥬우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는 비참한 굴욕을 맛봐야 했다. 그래서일까? 이 시기 그는 「참회록」을 쓰며, 각별한 역사의식으로 스스로를 성찰했다.


1942년 윤동주는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 송몽규는 경도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윤동주는 다시 송몽규가 있던 경도 동지사대학으로 전학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윤동주가 일본에서 쓴 시는 불과 5편뿐이었다.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어진 시」, 「봄」, 이는 모두 동경 시절에 완성된 시이다. 윤동주는 이 시들을 모두 연희전문학교 시절의 친구였던 강처중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다. 이후 경향신문 기자로 활약한 강처중은 시를 고이 보관해 놓았다가 해방 후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건네주어, 정병욱과 함께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3년, 시대는 더욱 험난해졌다. 여름방학을 맞아 북간도로 귀성을 앞두고 있던 윤동주는 돌연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는 비극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경도에 있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의 죄를 물어 윤동주와 송몽규를 심판했다. 이들은 피고자의 신분이 되어 각기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일본의 형무소 중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복강형무소. 두 사람은 이곳에서 징역살이를 시작했고, 쓸쓸한 주검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숨을 거두었고, 얼마 뒤 송몽규 역시 원통함에 눈을 뜬 채로 운명을 달리했다. 1945년, 복강형무소의 사망자 수는 259명(1943년의 사망자 수는 64명), 이러한 수치는 일본이 당시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이름 모를 주사를 놓으며 대규모 생체 실험을 자행했다는 의심을 뒷받침해 준다. 그렇다면 윤동주와 송몽규도 일본의 끔찍한 악행에 희생되었을 것이다. 잔인했던 시대, 결국 젊은 시인은 아름다운 시만을 남겨놓은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2호 2017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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