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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YORK] <선셋 블러바드> [No.162]

글 |여지현 뉴욕 통신원 사진 |Joan Marcus 2017-04-04 4,896

디바의 귀환    

<선셋 블러바드> SUNSET BOULEVARD



휘황찬란한 브로드웨이 47번가의 거대한 전광판 중 요즘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1993년에 내놓은 <선셋 블러바드>의 재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다. <선셋 블러바드>는 무성영화 시대에 할리우드를 주름잡았지만, 유성영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설 자리를 잃고 은둔자처럼 살아가는 왕년의 스타 노마 데스몬드에게 가난한 젊은 작가 조 길리스가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1950년에 발표된 동명의 누아르 영화가 원작으로, 앤드루 로이드 웨버 이전에 스티븐 손드하임이 뮤지컬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원작자 빌리 와일더가 이 작품은 뮤지컬이 아닌 오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뮤지컬 작업을 포기했다는 것. 빌리 와일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셋 블러바드>는 ‘왕관을 빼앗긴 여왕’에 대한 이야기인데, <오페라의 유령>이나 <캣츠> 등 레치타티보가 많이 쓰인 오페라에 가까운 뮤지컬을 만들었던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음악 스타일을 떠올려 봤을 때 그가 왜 이 작품을 뮤지컬로 만들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93년 런던에서 초연한 후 이듬해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900회 동안 공연을 이어가며 토니상에서 작품, 음악, 대본상을 거머쥐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번 프로덕션은 지난해 웨스트엔드에서 5주간 선보인 워크숍 형태(동선이 있는 리딩 형식의 공연)의 공연을 거쳐 무대에 올랐다. 이번 프로덕션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당대에 심미적으로 앞섰던 원작 영화의 아우라를 잘 살려냈다는 점이다. 공연 시작 전, 무대 앞에 설치된 반투명 막에 프로젝션 이미지를 투영해 차를 타고 LA 대로를 달리는 영상을 보여주는 연출은 영화와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융합하는 데 특히 효과적이었다. 서곡과 함께 빗살무늬가 흐르는 흑백의 LA 대로 영상이 나오는데, 얼마 후 막이 올라가고 무대 하수에 파란 조명이 비치면 익사체로 보이는 마네킹이 엎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얼마 후 한 남자가 관객들에게 6개월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공연을 시작한다. 남자는 조 길리스라는 젊은 영화 작가로 수입이 없어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다. 어느 날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영화 촬영장에 갔다가 빚쟁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을 피해 도망치다 우연히 노마 데스몬드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죽은 침팬지의 장의사를 기다리고 있던 노마의 집사 맥스는 조를 장의사로 착각해 그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간다. 조가 맥스에게 자신은 장의사가 아니고 영화 작가라고 설명해 오해는 곧 풀리는데, 노마가 자신이 쓰고 있는 살로메에 대한 영화 대본을 각색해 주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돈이 필요했던 조가 노마의 제안을 수락하자, 노마는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자신의 집에 들어와서 각색 작업을 하라고 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조가 대본 각색을 끝내자, 노마는 세실 드 밀이라는 잘나가는 감독에게 대본을 전달한다. 과거의 친분도 있고,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으니 틀림없이 대답을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 밀 감독이 속한 영화사 파라마운트에서 노마를 찾는 전화가 오는데, 노마는 드 밀 감독과 직접 얘기하겠다며 무작정 영화사로 찾아간다. 자신을 알고 있던 청원 경찰 덕분에 무리 없이 촬영장에 들어간 노마는 드 밀 감독을 만난다. 드 밀 감독은 대본을 좋게 보지 않았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노마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집사 맥스는 노마에게 전화를 걸었던 영화사 사람이 드 밀 감독이나 그의 조감독이 아니라 노마의 차를 촬영에 쓰고자 하는 다른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노마가 상처받을 것을 걱정해 그녀에게는 비밀로 하고 조에게만 이 사실을 조용히 알려준다. 집으로 돌아온 노마는 드 밀 감독의 연락을 기다리며 열여섯 살인 살로메의 역할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연말이 다가오자 노마는 조를 위한 파티를 준비하고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조는 노마의 사랑을 거절하고 친구들이 모여 있는 파티에 간다. 그 사이 큰 상처를 입은 노마는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조는 노마의 집으로 돌아가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듯 노마와 키스한다. 이로서 1막이 끝난다. 2막에서는 조가 함께 대본 작업을 하는 베티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노마와의 관계가 점점 불편해지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노마가 베티를 질투하자 조는 그녀를 떠나려 하다 노마가 쏜 총에 죽는다. 노마는 그녀를 체포하러 온 경찰과 기자들 앞에 살로메로 분장한 채 등장해 “나는 준비가 다 됐다(I’m ready for my close up now)”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포즈를 잡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주연 배우들의 호연


이번 공연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대부분의 리뷰에서 말하듯 주인공 글렌 클로즈의 호연이다(국내 관객들에게는 영화 <101 달마시안>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졌다). 글렌 클로즈는 1993년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노마 역을 맡았던 오리지널 캐스트로, 25년 만에 이 작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왕년의 스타 노마와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다. 클로즈는 과거의 영광에 갇혀 살아가는 노마의 어그러진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연기해 내는데, 실제 그녀의 삶과 맞닿아 있는 인물이라서인지 그녀가 등장할 때나 노래를 끝냈을 때 나오는 박수 소리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작품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노마의 첫 남편이자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영화감독의 길을 포기하고 집사로 살아가는 맥스와 궁궐 같은 저택에서 외부와 접촉 없이 살아가는 노마가 과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장면은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슬프게, 때론 우스꽝스럽게 다가온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드 밀 감독을 만나러 간 노마가 화려했던 과거를 추억하며 ‘As If We Never Said Goodbye’를 부를 때인데, 흑백의 드레스를 입고 털 장식을 두른 노마가 영화 촬영장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노래하는 이 장면에서 클로즈는 완벽하게 무대를 장악한다. 맥스 역할을 맡은 스웨덴 출신 배우 프레드 요한슨의 호연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프레드 요한슨은 작년 런던 공연부터 참여했는데,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노마의 욕망을 용인해 주며 그녀와 아픈 공생 관계를 이어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아쉬움을 남긴 음악, 돋보였던 무대


앤드루 로이드 웨버 음악의 가장 큰 강점은 클래시컬한 장중함과 팝적인 친밀함 중간 어딘가에 있는 멜로디로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노마의 ‘As If We Never Said Goodbye’뿐 아니라, 1막에서 노마가 과거를 추억하며 부르는 첫 곡 ‘With One Look’은 유려하고 장중한 멜로디로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극 중 뮤지컬 넘버를 변주해 이야기 중간중간에 짧게 삽입해 극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그 음악들 역시 작품의 누아르적인 감성을 살린다. 하지만 마치 어디에선가 들어본 것 같은 친숙한 멜로디는 단조로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한 대부분의 뮤지컬 넘버들이 레치타티보와 팝으로 구성됐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두 인물의 대화 장면에 쓰인 음악은 극의 분위기 전달이나 이야기 전개, 혹은 인물들과의 관계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극의 일관성을 해쳐 몰입도를 떨어뜨렸다. 1막 초반 조가 영화 촬영장에 도착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부르는 ‘Let’s Have Lunch’나 2막에서 조가 사랑에 빠진 베티와 대본 작업을 하면서 부르는 ‘Girl Meets Boy’에서 특히 그러한 단점이 두드러졌다. 음악적 일관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가사가 음악과 어울리지 않고 겉돌아 많이 아쉬웠다. 조가 베티와 함께 부르는 노래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장면이기에 아쉬움이 더 컸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멜로디가 좋았음에도 영화가 지닌 누아르적인 매력을 무대에서 풀어내는 데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반면 공간 연출은 이번 프로덕션의 돋보이는 점이다. 무대 가장자리에 3층 높이의 계단이 위치해 있는데, 가장자리에서 무대 상수 위쪽 공간으로 돌면서 X자로 교차해 노마의 집과, 영화 촬영장, 그리고 노마의 머릿속에서만 펼쳐지는 다른 시공간의 접점들을 잘 형상화한다. 또한 무대 양쪽에 2층 높이의 구조물이 있어 무대 공간을 전체적으로 잘 활용했다는 인상을 준다. 초연 의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노마의 의상은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부피가 크고 화려해서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노마라는 인물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다른 작품에서도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연출가 로니 프라이스는 몇몇 장면에서 그의 재치를 발휘하는데, 특히 극 초반 조가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장면에서 양손에 큰 플래시를 든 두 명의 앙상블 배우가 조와 간격을 두고 무대 위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연출로 LA 언덕길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차 두대의 모습을 표현한 부분에서 두드러졌다. 뿐만 아니라 무대 천장 와이어에 마네킹을 달아 조명과 함께 수영장에 떠 있는 시체를 연출한 것 역시 연출과 무대 팀의 연극적인 상상력을 보여줬다. 족히 20명은 되어 보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 중앙에 위치하는데, 오케스트라는 노마의 무의식이 의식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을 상징하며 음악의 존재감을 더한다.




낡은 관점의 아쉬움


개인적으로 <선셋 블러바드>가 지난 시즌과 비교해 보수적인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는 브로드웨이의 분위기를 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아쉬웠다. 애초에 원작이 1950년 작품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다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해도(어느 정도는 그렇게 해야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할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노마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노마를 바라보는 시각은 남성적이라 불편함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는 내내 오리지널 캐스트 글렌 클렌느가 노마로 돌아온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이야기 전개 방식이 노마의 관점이 아니라, 조나 맥스라는 남성과의 관계로 편협하게 드러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2017년 현재에 왜 봐야 할까 하는 궁금증이 끊이질 않았다. 지난해 브로드웨이에 오른 <펀 홈>이나 <앨리전스>, 그리고 <해밀턴>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미국 관객들에게 대담한 질문들을 던졌던 작품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은 어쩌면 정치적으로 급유턴을 하고 있는 미국의 현재 모습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2호 2017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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