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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죽음까지 함께한 연인들 [NO.167]

글 |나윤정 2017-08-29 4,518

뮤지컬 <사의 찬미>는 우리나라 최초 여성 성악가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윤심덕과 김우진은 1926년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지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죽음마저 뛰어넘은 두 사람의 사랑. 윤심덕과 김우진이 그러했듯 한날한시에 눈을 감은 역사 속 불멸의 연인은 누가 있을까?



윤심덕과 김우진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 두 사람은 서로의 뮤즈로서 사랑을 나누었지만, 김우진이 유부남이었던 탓에 세간의 비난을 면치 못하는 사이였다. 더욱이 식민지 시대의 불안과 혼란은 그들을 더욱 비관에 빠트렸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은 1926년 8월 4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가던 부관연락선에서 함께 현해탄으로 몸을 던졌다.


1897년생 동갑이었던 윤심덕과 김우진. 두 사람 모두 일본에 유학한 신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1921년 일본 유학생들로 구성된 극예술협회에 참여하며 처음 만났고, 서로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김우진은 일찍 결혼해 고향에 아내와 딸이 있었다. 그럼에도 윤심덕은 조선에서 순회공연을 하는 동안 적극적으로 김우진에게 호감을 표시했고, 결국 이들은 연인이 되었다. 윤심덕은 1923년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란 타이틀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변하지 않는 생활고와 뜻하지 않은 스캔들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한편 조선에서 희곡과 평론을 쓰고 싶었던 김우진은 아버지와의 갈등을 참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버린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윤심덕은 김우진을 만나기 위해 오사카로 홀연히 떠난다. 그리고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김우진에게 “오사카로 와요. 오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예요”라는 전보를 보낸다.


오사카에서 재회하게 된 윤심덕과 김우진. 두 사람은 며칠을 함께 보내며 깊은 생각을 나누었고, 그 결과 바다에 몸을 던지며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이들의 특별한 사연 때문일까? 윤심덕이 마지막으로 남긴 노래 ‘사의 찬미’는 당시 일본과 조선 양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들의 자살 장면을 목격한 사람과 두 사람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점은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설사 죽음에 이른다고
해도 그 어디든 그를 따르기로 맹세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을 위해서만 살아간다.”



1945년 4월 30일 독일 베를린의 지하 비밀 벙커에서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나치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옆에는 연인 에바 브라운이 함께 있었다. 히틀러의 마지막 연인 에바 브라운은 청산가리를 마시고 히틀러와 함께 눈을 감았다.


히틀러와 에바가 처음 만난 것은 1929년. 사진작가 히인리히 호프만의 조수로 일하고 있던 에바는 뮌헨의 아틀리에에서 히틀러를 보고 묘한 끌림을 느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7세로, 히틀러와 스물셋의 나이차가 있었다. 나치당에 반감을 갖고 있던 가족들은 에바를 만류했지만, 그녀는 히틀러의 정부가 되었다. 하지만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와의 사랑은 쉽지 않았다. 그는 여성 편력이 심한 데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럼에도 에바는 히틀러의 알프스 산장에 혼자 머물며 그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보냈다. 심지어 히틀러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다.


물론 히틀러는 14년 동안 자신의 곁을 지킨 에바에게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이내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감했다. 자신 앞에 놓인 길은 죽음밖에 없다고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에바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다. 자신의 오랜 룰을 깨고 에바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런 뒤 두 사람은 죽음을 향한 절차를 하나씩 밟았다. 결혼한 지 40여 시간 뒤, 두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생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황태자 루돌프와 마리 베체라       


“내 행동을 용서해 줘요.
사랑에 저항할 수 없어요.
사느니 죽는 것이 행복해요.”



1889년 1월 30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에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황실 사냥용 별장인 마이얼링에서 30세의 황태자 루돌프가 17세의 어린 연인 마리 베체라와 동반 자살을 한 것이다. 루돌프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스 황후 사이의 유일한 아들이었지만, 늘 부모에 대한 결핍을 느꼈다. 아버지는 원치 않는 정치적 노선을 강요했고, 어머니는 자신에게 애틋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황태자 루돌프는 벨기에 공주 스테파니와 정략결혼을 했지만, 마음은 사촌 리리슈 백작 부인에게 소개 받은 남작의 딸 마리 베체라에 있었다.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던 황태자 루돌프는 요제프 황제와 빈번하게 의견 충돌을 했고, 그때마다 마리가 그를 위로해 주었다. 결국 황태자는 자신의 사상과 사랑을 지지해 주지 않은 아버지에게 대항하기 위해 충격적인 선택을 한다. 황실 별장 마이얼링에서 권총 자살을 한 것이다. 그는 죽기 전 가족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두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아내 스테파니에게 전하는 편지에는 “이제 나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죽음을 택하려 하오”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 


황태자 루돌프는 마지막 순간을 연인 마리와 함께했다. 그들이 시종에게 발견되었을 때 방 안은 피로 흥건했고, 바닥엔 권총이 떨어져 있었다. 전날 밤에 켜둔 초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 루돌프와 함께 숨을 거둔 마리는 두 손에 장미 한 송이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죽음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황태자 루돌프는 자신의 시신을 마리와 함께 묻어달라는 부탁을 남겼지만, 그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7호 2017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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