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로 보는 경성의 유행
<사의 찬미> 정사(情死)
1920년대를 휩쓴 연애열의 중심에는 ‘사랑은 죽음과 만날 때 가장 강렬하고 순수하게 타오른다’는 발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인 간의 동반 자살을 뜻하는 정사(情死)는 일본에서 건너와 소설의 소재로 인기를 끌다가 곧 현실에서도 유행했다. 당시 신문에는 하루에도 서너 건씩 연애 자살과 정사에 대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1923년 사랑했던 부호의 아들과 맺어지지 못하고 음독자살한 기생 강명화는 숭고한 사랑의 아이콘으로 부상했으며, <사의 찬미>의 모티프가 된 1926년 윤심덕과 김우진의 현해탄 정사 역시 끝없는 뒷이야기를 낳는 대중적 흥밋거리로 소비되었다. 절망적인 식민지 현실에서 연애가 현실 도피적이고 비극적인 애상 취미에 가까워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근대적 개인의 존재가 막 수면 위로 떠오른 이 시절, 죽음을 불사한 사랑은 개인의 개성과 단독성을 드러내는 가장 극적인 행위로 낭만화되었다.
<경성특사> 탐정 소설
<경성특사>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비밀결사』를 경성을 배경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실제로 국내에 탐정 소설이 유행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1920년대에 홈스와 뤼팽의 이야기가 번역되어 인기를 끌었고, 잡지와 신문에 창작 탐정 소설이 연재되었다. 1939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돌풍을 일으킨 김내성의 『마인』이 대표적이다. 근대 대도시 경성은 인구 집중과 익명화에 따른 범죄 증가, 매체를 통한 범죄 스캔들의 범람, 과학적 범죄 수사 등 탐정 소설이 유행할 수 있는 다양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문제 해결 방식을 보여주는 탐정 소설은 모던한 문학 취향으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과학 탐구의 경험이 충분하지 못했던 식민지 조선의 탐정 소설은 추리 과정을 밀도 있게 그리지 못하고, 갈수록 기괴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수사 주체 대부분이 일본 경찰 제도에 소속된 인물로, 탐정 행위가 일제의 감시와 통제 시스템에 조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은 식민지 탐정 소설이 지닌 한계로 지적된다.
<콩칠팔새삼륙> 동성애
<콩칠팔새삼륙>은 1931년 영등포역 기찻길에 뛰어들어 동반 자살한 김용주와 홍옥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다. 이들이 동덕여고 동문 출신의 동성애 커플이었다는 사실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그들의 정사(情死)를 더욱 자극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1920~30년대 여학생 사이에서 동성애는 하나의 유행이었다. 당시에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금기도 없어, 대중 잡지 『별건곤』에 여류 명사의 동성연애 경험담이 공공연하게 실리기도 했다. 수많은 여학생이 학교 안에서 동성애를 경험했고, 그러다가도 학교를 졸업하면 남성과 결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유독 여학생 사이에서 동성애가 유행한 근본적인 원인은 봉건적 인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유연애 사상이 도입되었음에도 여전히 여성의 순결을 요구했던 당대 사회는 여학생의 이성 교제를 마뜩잖게 여기면서도, 동성애는 문제 삼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집을 떠나 기숙 학교에서 생활하던 10대 소녀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우정 이상의 감정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팬레터> 연애편지
‘남녀칠세부동석’을 벗어나 처음으로 청춘 남녀가 한 공간에 모였던 1920년대. 남녀는 공공장소에서 시선을 주고받으며 연애의 가능성을 키워 나갔지만, 여전히 서너 발자국 떨어져 걸으며 스치듯 조심스레 대화를 나눠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편지는 연인들의 가장 직접적인 소통 수단이었다. 우편 제도의 발달로 빠르고 안전하게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근대화와 함께 개인의 내면과 자기표현이 강조되면서 연애편지가 절절한 내면 고백의 장으로 각광받은 것이다. 연인의 육체를 대신해 손에 쥘 수 있었던 편지는 그 물질성 또한 내용 못지않게 중요했다. 처음에는 제비꽃을 그린 편지지가 큰 인기를 끌다가, 곧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 어떤 편지지와 향수, 마른 꽃을 쓰라는 등 세세한 조언이 나돌았다. 연애편지의 유행과 더불어 문학계에는 서간체 소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1923년 출간된 노자영의 연애서간집 『사랑의 불꽃』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조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집안이 정해준 상대와 결혼해야 했던 시인 백석과 그런 애인을 떠나보내야 했던 기생 자야의 안타까운 사랑을 그린다. 사실 1920~30년대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러브 스토리는 상당수가 기혼남과 미혼녀의 사랑이었다. 자유연애라는 신문화와 조혼이라는 인습이 공존한 탓이다. 특히 여학생은 재학 중에 결혼이 금지된 반면, 여유 있는 집안의 남학생은 대부분 재학 중에 조혼했기 때문에, 교육받은 신여성이 자신의 수준에 맞는 배우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신여성의 선구자였던 나혜석, 윤심덕 등이 기혼 남성과 공개적으로 연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기혼 남성들 또한 부모의 강요로 맺어진 구여성 아내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신여성 애인 사이에서 갈등에 빠졌다. 그 결과 조혼의 부정과 자유 이혼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날로 커져갔다. 어쨌거나 이 무렵 남성이 여성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미혼임을 증명하는 호적등본이었다.
<청춘, 18대1> 댄스홀
<청춘, 18대1>은 1945년 동경의 댄스홀을 배경으로 조선 청년들의 동경시청장 암살 시도를 그린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동경시청장은 굉장한 댄스광으로 나오는데, 경성의 모던보이, 모던걸 역시 서양 춤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나 동경과 달리 경성에서 댄스홀의 운영과 출입은 전면 금지되어 있었다. 일제는 풍기문란을 그 이유로 내세웠지만, 동경에서는 이미 수십여 곳의 댄스홀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레코드회사 문예부장과 다방 마담, 기생들은 1937년 잡지 『삼천리』에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공개 탄원서를 싣기도 했다. 계속되는 일제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사교댄스는 댄스홀 대신 카페에서 공공연히 성행하였다. 1930년대 초에는 사교댄스를 대신해 재즈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찰스턴이 대유행하였는데, 당시 모던보이와 모던걸에게는 이 찰스턴을 얼마나 잘 추느냐가 곧 미의 척도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9호 2017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