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수백 편의 공연이 우리를 만나지만, 유달리 여성 주연 뮤지컬은 드물다. 뮤지컬계의 주요 소비층이 여성임을 고려하면 더욱더 아쉬운 상황. 이런 문제점이 꾸준히 지적되고 있는 탓일까. <위키드>, <레베카> 등 독특하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로 시선을 끌어당긴 작품들이 국내에 소개되며 큰 인상을 남겼지만, 여전히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여성 주연 뮤지컬이 많다. 앞으로 국내에서도 세계 뮤지컬 팬들의 마음을 홀린 여성 주연 뮤지컬을 만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해외 무대 속 여성 주연 뮤지컬을 소개해본다.
<웨이트리스>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핫’한 여성 주연 뮤지컬을 꼽으라면 단연 <웨이트리스>가 아닐까. 2015년 초연된 작품은 2016년부터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은 가정 폭력에 노출된 제니가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벌어지는 성공 스토리를 그린다. 제니가 가정폭력이라는 고난을 물리치고 웨이트리스가 되는 것 그리고 그녀가 일하는 여자 동료들과 ‘파이 만들기 콘테스트’에 나가며 다시 꿈을 찾아가는 과정, 여기에 주변의 여성들이 함께 힘을 모은다는 내용은 그동안 주류의 뮤지컬들이 소홀하게 다루었던 여성의 성공 스토리를 전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밝고 경쾌한 넘버를 통해 여성들의 성공 스토리와 걸맞는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도 매력이다.
무엇보다 <웨이트리스>는 브로드웨이 최초로 전부 여성으로 이루어진 창작팀이 제작한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젊은 여성 팬을 두고 있는 포크록 여성 싱어송라이터 사라 바렐리스가 작곡가로 참여해, 제작 단계부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뷰티풀: 더 캐롤 킹 뮤지컬>
<뷰티풀: 더 캐롤 킹 뮤지컬>은 1960년대에 큰 인기를 누리던 여성 싱어송라이터 캐롤 킹의 인생을 그린 뮤지컬이다. 2013년 샌프란시스코 무대에서 초연된 이후 브로드웨이로 옮겨와 공연했다. 작품은 캐롤 킹의 노래로 구성된 주크박스 뮤지컬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았다. 캐롤 킹은 여성 가수들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후배 여성 가수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던 선구자이기도 하다. 작품은 여학생 시절부터 슈퍼스타에 이르기까지 캐롤 킹이 걸어온 길을 축약했다. 작곡 파트너이자 전남편인 제리 고핀과 음악 작업을 하고 성공 가도를 달렸던 과정, 동료 작곡가 듀오인 배리 맨, 신시아 웨일과의 우정과 경쟁의식을 그린다.
작품은 현재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여성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그런 건 남자들이나 하는 거야”라는 엄마의 구박에도 캐롤 킹은 씩씩하게 자신의 꿈에 도전한다. 물론 <뷰티풀: 더 캐롤 킹 뮤지컬>이 이런 아름다운 캐롤 킹의 성공 가도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임신하고 결혼하며 육아와 창작이라는 상황을 동시에 해내고, 남편의 외도로 고통스러워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장면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그린다. 시대에 순응하는 전형적인 어머니상을 보여줬던 캐롤 킹은 마침내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향해 거침없는 욕설을 내뱉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이후 그녀의 솔로 앨범은 소위 말하는 대박을 쳤고, 캐롤 킹의 성공 스토리는 아름답게 막을 내린다. 작품은 캐롤 킹의 아름다운 노래에 그녀의 인생을 버무려, 여성으로 사는 삶과 현실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더 컬러 퍼플>
1982년 발간된 앨리스 워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더 컬러 퍼플>. 작품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하고 우피 골드버그와 오프라 윈프리가 출연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2005년 초연된 <더 컬러 퍼플>은 2006년 토니 어워즈에서 베스트 뮤지컬 부문을 비롯해 7개 부문의 후보로 오를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작품은 흑인 여성의 권리가 없었던 시대에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는다. 주인공 씰리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의붓아버지의 아이를 낳고, 19세에 시작된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으로부터 노예 취급을 받는다. 작품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씰리가 진정한 삶에 눈을 뜨는 과정을 그린다. 씰리와 그녀 주변의 여성들은 절망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당돌한 여성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다. 무엇보다 <더 컬러 퍼플>이 인상적인 이유는 여성들의 관계를 깊이 있고 듬직한 연대감을 담아 그려냈다는 점이다. 기존에 많은 뮤지컬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벗긴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는 의지를 주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펀 홈>
<펀 홈>은 동명의 그래픽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레즈비언 앨리슨이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후 4개월 뒤에 갑자기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2013년 오프브로드웨이서 막을 올린 작품은 게이, 드래그 퀸,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성 소수자 이야기를 다룬 브로드웨이에서 레즈비언을 주인공으로 하는 뮤지컬로는 처음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또한 여성 작가와 작곡가가 함께 만든 레즈비언의 이야기란 점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펀 홈>에서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앨리슨은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전무한 상황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반가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자신의 첫 여자친구이자 첫경험 상대자인 죠앤을 향한 목소리, 어린 시절 아빠와 식당에 갔다가 남성적인 매력을 품은 여자 우편배달부를 본 후 천천히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된 경험을 고백하는 장면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깨닫는 성 정체성을 진솔하게 풀어내며 감동을 전한다.
<폴리스>
<폴리스>는 197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후 500회 이상 공연될 정도로 인기를 끈 작품이다. ‘폴리스’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화려한 의상의 쇼걸이 출연하는 레뷰 쇼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잘못을 뜻한다. <폴리스>는 곧 헐릴 예정인, 레뷰 쇼를 공연하던 극장에서 파티를 연 쇼걸과 배우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오랫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왔던 이들은 파티장에서 30년 만에 다시 만나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폴리스>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휘황찬란한 공연용 의상을 입은 채로 각자의 인생을 보여주는 쇼걸들이다. 과거 쇼걸들은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에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녀들이 현재 어떤 모습이든 무대 위에는 할머니가 된 쇼걸들의 젊은 날을 투영하는 ‘유령’이 등장한다. 베테랑 쇼걸이었던 여성들은 TV 스타가 되거나,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늙어가는 독거노인이 되거나 프랜차이즈 사장이 되어 있다. 각기 다른 이들이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유령’들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현재와 과거를 극명하게 대비한다. 그러나 이러한 젊음과 늙음의 적나라한 대비는 의외로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다. 베테랑 쇼걸들만이 가지고 있는 능숙함, 30년 전 화려했던 쇼걸로서 느끼는 자긍심, 무대 위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 등이 전해지며, 주체적이고 아름다운 쇼걸들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작품이다.
<이프/덴>
2014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사랑에 실패하고 마흔 무렵 뉴욕으로 돌아온 여자 엘리자베스를 주인공으로, 여성들이 처한 상황과 고민을 다룬다. 도시설계사로 일하다 결혼과 함께 은퇴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 살았던 엘리자베스는 이혼 후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옛 친구인 케이트와 루카스를 만나는데, 케이트는 엘리자베스를 리즈라 부르고 루카스는 그녀를 베스라고 부른다. 작품은 특이하게도 이 만남에서 엘리자베스가 두 친구를 따라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리면, 이에 따른 결과를 보여준다. 만약 리즈로서의 삶을 선택하면 군의관과 만나 다시 결혼하게 되지만, 외국에 출전한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는다. 또다시 혼자된 리즈는 도시설계사로 일하게 된다. 또 베스로서의 삶을 선택하면 대범하고 매력적인 커리어우먼의 삶을 살게 된다.
작품은 선택의 과정을 통해 여성이 처하는 현실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냈다. 여성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다가 결혼과 함께 은퇴하는 것, 이혼 후에 다시 일을 시작하며 생활력을 되찾는 것, 그리고 다시 사랑에 빠지고 원하지 않는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것, 그 아이를 심사숙고 끝에 낙태하게 되는 것 등 다양하다. 대부분 뮤지컬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는 한정적이거나 특별한 능력 혹은 지위를 원했는데, <이프/덴>의 엘리자베스는 그저 미래를 향한 고민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내리는 결정 이후의 삶에 주목했다. 무엇보다도 베스는 충분히 자기중심적이자 주체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 또 엘리자베스가 어떤 결정을 내린다 하더라도 그녀는 남자의 도움 없이도 잘 살아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3호 2018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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