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케이프 투 마가리타빌>
Escape to Margaritaville
일상으로부터 도피
한량의 목소리
한국 관객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지미 버핏은 미국 사람들에게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체인 음식점의 주인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음악은 바닷가 휴양지에서 자주 들을 수 있을 법한 여유 넘치는 분위기가 주를 이루어, ‘해변 한량(Beach Bum)’의 음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70~80년대 전성기를 보낸 그는 자신의 음악에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마가리타빌이라는 이름의 리조트와 음식점 체인을 열었다. 미국 문화의 아이콘 중 하나로 이름을 알린 지미 버핏은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지금까지도 전국 곳곳을 다니며 투어를 하고 있고, 골수팬들(특히 백인 중장년층)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참고로 그는 워런 버핏과 성만 우연히 같을 뿐 연결고리는 없다고 한다). 주로 1인칭 전지적 시점의 내러티브를 담은 그의 음악은 별명에 알맞게 바닷가 해변에 앉아서 꽃무늬가 크게 그려진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유유자적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한량’ 청년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미 버핏의 음악은 아일랜드 이스케이피즘 바닷가 섬을 떠올리게 하는 도피주의적인 장르의 대표적인 예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노래 중 가장 잘 알려진 곡들은 ‘마가리타빌’이나 ‘술 마시고 (한 번) 할까’, ‘어딘가는 5시’ 등 술과 음주와 관련이 있거나 혹은 ‘선원 아들의 아들’, ‘해적이 삶을 반추한다’ 등 바다의 삶과 이어져 있다. 이 정도에서 눈치챘겠지만, 이런 지미 버핏의 음악과 분위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뮤지컬은 제목 그대로 그가 실제로 소유한 마가리타빌 리조트와 같은 이름의 상상 속 휴양지 마가리타빌로 관객을 초대한다.
<이스케이프 투 마가리타빌>이 공연되는 마르퀴스 극장은 1982년 브로드웨이 45가와 46가에 위치한 다섯 개의 극장을 헐고 새롭게 오픈한 매리어트 마르퀴스 호텔 2층에 자리하고 있다(1982년 당시 ‘극장 대학살’이라고 불리며 많은 연극인이 재건축 반대 시위를 하기도 했다). 호텔 2층에 위치한 특성 때문에 다른 브로드웨이 극장들과는 달리 공연장 앞에 여유 공간이 좀 더 있는데, 이곳에는 관객을 위해 포토월도 세우고, 바닷가 휴양지에서 보일 법한 짚을 엮은 나무 오두막들과 나지막한 라운지 의자 그리고 다양한 색의 종이 갓을 씌운 등불을 장식해 두었다. 술과 음료 그리고 스낵을 파는 컨세션 스탠드의 바텐더들은 당연히 꽃무늬 장식의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마가리타와 후르츠 펀치 등의 휴양지 음료를 판매한다(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프리뷰 공연 중 어느 날은 마가리타 믹스가 동이 나서 마가리타를 더 팔지 못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최근 대다수의 브로드웨이 공연의 추세가 극장에 들어서면서부터 관객들이 공연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공간의 이점을 십분 활용한 이 작품은 여타 브로드웨이 공연들보다 더 꼼꼼하게 이 부분을 고민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말하면, 창작진과 프로듀서들이 공연의 성공을 위해 관객이 조금 더 작품 속 환경에 빠져 감정 이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휴양지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에 대한 이야기
이 작품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백 투 더 퓨쳐> 등의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프랭크 마셜의 권유로 가시화됐다. 그는 지미 버핏의 음악을 통해 어쿠스틱하고 때론 거칠게 그리는 바닷가 한량의 이야기가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작품의 주인공은 마가리타빌에 사는 한량 털리로, 호텔의 투숙객들을 위해 공연하는 밴드의 리더다. 그는 휴양지의 로맨스를 기대하는 여자 투숙객들과 짧고 뒤끝 없는 만남을 즐기며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털리는 미국 중서부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에서 친구 태미의 결혼을 앞두고 함께 베첼러렛 파티 답사를 위해 섬을 찾은 레이첼을 만난다. 친환경 에너지를 연구하는 레이첼은 털리와는 다르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때문에 털리는 이제껏 만났던 여자들과는 달리 똑똑하고 진취적인 그녀에게 알게 모르게 마음이 끌린다. 하지만 털리의 마음을 모르는 레이첼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쿨하게 섬을 떠난다.
레이첼과 태미가 떠난 후, 갑자기 섬의 화산이 분출할 조짐을 보이자 다들 섬을 떠나게 된다. 그 와중에 레이첼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털리는 그녀를 찾아 신시내티로 향한다. 털리는 태미의 결혼식 전날 리허설 파티에 와 있는 레이첼에게 노래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아직 자신에겐 일이 더 중요하다며 털리의 마음을 거절한다. 그리고 우연히 그 자리에 왔다가 털리의 노래를 들은 에이전트가 그와 계약하고, 곧 인기 스타가 된다. 레이첼 역시 그녀의 프로젝트를 지원해 줄 투자자를 만나 각자의 바쁜 삶을 살아간다. 3년쯤 흘렀을까. 화산 폭발로 망가졌던 호텔이 새로 개장하면서 털리가 축하 공연을 하게 되는데, 레이첼이 그 공연에 참석한다. 레이첼은 털리에게 과거 그의 고백을 들었을 때, 자기 일을 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돼 거절했다고 밝힌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마음을 알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털리 역시 그간에 레이첼을 못 잊었다고 마음을 털어놓는다. 결국 작품은 둘이 마가리타빌에서 결혼하면서 해피엔딩을 맞는다.
작품의 주요한 스토리는 털리와 레이첼의 진부한 사랑이지만 이외에도 두 커플의 이야기가 더 있다. 하나는 레이첼의 친구이자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태미가 자신을 무시하고 개념 없는 약혼자 채드를 버리고 바텐더 브릭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털리와 함께 레이첼을 찾아 나선 브릭은 리허설 디너에서 다시 만난 태미와 마음을 확인하고, 오하이오에 정착해 그녀와 가정을 꾸린다. 다른 하나는 호텔에서 한량처럼 살아가는 할아버지 제이디와 호텔의 안주인격인 말리와의 사랑 이야기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호텔에서 사는 제이디는 말리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는데, 결국 말리가 그의 마음을 받아줘서 그들 역시 다시 개장한 호텔에서 가정을 꾸린다.
주크박스 뮤지컬과 시트콤의 어색한 조합
자신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주크박스 뮤지컬을 만들면서 지미 버핏은 음악과 가사를 맡아 편곡에서 개사까지 창작진의 뜻대로 작업해 줬다고 한다. 대본은 TV 코미디 시트콤 경력을 지닌 그렉 가르시아와 배우이자 극작가인 마이크 오말리가 집필했는데, 작품 속 인물 묘사가 다소 전형적이다. 이것뿐 아니라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주고받는 짧은 말장난이나 농담조의 대사들은 뮤지컬보다는 1980~90년대에 유행했던 가족 시트콤에서나 들었을 법한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조금은 어리석어 보이는 남자들과 똑똑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자들을 커플로 엮은 것이 그렇다. 또한 말리에게 자꾸 들이대는 제이디의 캐릭터도 시트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딱히 대단한 스타는 없었지만 나름 브로드웨이와 지역 극장에서 베테랑인 배우들의 연기 역시 뮤지컬보다 시트콤에 더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주크박스 뮤지컬로서 전체적으로 느슨한 얼개를 가졌지만 독립적인 에피소드들로 구성되는 시트콤 특성들과 나름 어우러진 느낌을 받았다. 물론 갑작스러운 장면들도 있었다. 그중 가장 도드라진 부분은 2막 중간에 등장하는 탭댄스 군무 장면이었다. 1막에서 레이첼이 연구 목적으로 섬에 있는 화산 근처 흙을 채취하러 화산에 올라갈 때 태미와 브릭 그리고 털리가 함께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화산이 분화했을 때 당시 화산재 배출로 인해서 학회차 이 섬에 와 있던 많은 보험 판매원들이 산 채로 묻혔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2막이 되어 화산 분화를 앞두고 자신의 추억 상자를 찾으러 간 제이디를 구하러 브릭과 털리가 화산으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브릭의 눈앞에 죽은 보험 판매원들의 영혼이 나타난다. 브릭은 처음에는 두려워하지만 곧 그들은 환영이며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은 늘 탭댄스 군무를 추고 싶었다며 갑자기 잿빛 양복을 차려입은 보험 판매원들의 영혼들과 탭댄스를 추기 시작한다. 이렇게 전혀 앞뒤 연결고리가 없는 환상은 그나마 있던 개연성마저 뚝 끊어놓는 결과를 낳았다.
무대 구성과 장면 전환 역시 연극적이기보다 시트콤적인 요소들이 더 많았다. <컴프롬 어웨이>로 앙상블의 힘을 보여주었던 크리스토퍼 애슐리 연출은 이 작품에서도 앙상블이 나오는 장면을 통해 효과적인 연출을 선보였다. 그러나 극본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주요한 인물 위주의 장면들은 시트콤적인 장면을 연상시켰다. 예를 들면 오하이오에서 마가리타빌까지 가는 동안에 레이첼과 태미는 공항으로 가는 버스, 비행기 그리고 섬에 들어가는 배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통수단을 타고 움직이는데, 그들의 여정을 각각 교통수단을 나타내는 대도구를 이용해서 관객들에게 문자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렇다. 또 그들이 화산 분출을 코앞에 두고 제이디가 운전하는 비행기를 타고 움직이는 장면에서는 비행기의 외양을 갖춘 대도구를 이용해서 보여준다. 도피 혹은 이동을 주제로 삼고 있는 내용이라 이동 수단들을 무대 위에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장면의 전환을 문자 그대로 풀어낸 것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다. 이와 비슷하게 진부한 내용을 연출과 안무 그리고 무대 구성으로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듯한 순간들이 공연 전반에 많이 보여서 아쉬움이 짙었다.
청량하지 못한 어른들의 바다
바다를 배경으로 화산 폭발과 그로 인해 달라지는 관계를 그린 또 다른 뮤지컬 <스폰지밥 스퀘어팬츠>가 같은 시즌에 오픈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보면서 <스폰지밥 스퀘어팬츠>가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물론
<스폰지밥 스퀘어팬츠>의 내용이 이 작품에 비해 특별히 더 창의적이었다거나 색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나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서 <이스케이프 투 마가리타빌>은 <스폰지밥 스퀘어팬츠>에 비해 훨씬 더 진부하고 과거 지향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지미 버핏의 음악이 1970~80년대에 가장 큰 사랑을 받았고, 당시의 음악을 중심으로 만든 작품이기에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던 결과이긴 하다.
작품은 나름대로 현재 감성에 맞춰서 진취적이고 씩씩한 여성 레이첼을 내세웠지만,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진취적이고 매력적인 여성은 어떤 여성일까’에 대한 대답으로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과 가사를 맡았던 지미 버핏을 시작으로 극작 그렉 가르시아와 마이크 오말리, 연출 크리스토퍼 애슐리에 이르기까지, 안무 켈리 데빈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 창작진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의 전반에 걸친 인물 묘사나 유머 그리고 내용 구성에서 아쉬웠다.
특히 미투 운동이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미국을 비롯해 한국에서도 큰 이슈가 되고 있고, 기존의 남성 중심의 시각을 벗어나 여성을 주체적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고 계속해서 농담을 던지는 장면들이 가볍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스폰지밥 스퀘어팬츠>가 만화 속 세상이었다면 마가리타빌은 가상의 장소지만 꽤 사실적인 무대였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과 흡사한 이 작품에 녹아 들어있는 젠더 감수성의 부재가 더 씁쓸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나름 미국 대중문화의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 중 하나인 지미 버핏의 음악을 통해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반응을 기대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많은 관객들은 말장난 같은 유머와 남성 캐릭터들의 농담, 태미가 쇼비니스트 같은 약혼자 채드에게 주먹을 날리는 장면에 큰 웃음으로 화답했다. 또 공연을 보면서 지미 버핏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함께 따라 부르는 관객들도 많았다. 즐겁게 공연을 관람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극장을 나오면서, 창작진과 프로듀서들이 예상했던 관객은 현실을 떠나 바닷가 휴양지로 도피를 위해 찾아온 방문자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외국인이고 지미 버핏이 대표하는 한량 문화에 대한 향수가 없는 필자는 그런 기대감을 지닌 관객이 아니었다. 공연의 취지에 맞춰서 마가리타를 한 잔 사서 마시면서 공연을 봐서 그나마 좀 더 즐거웠을까. 그렇지만 마가리타를 꼭 마셔야만 행복한 마가리타빌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할 만한 곳이 아닐 수도 있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5호 2018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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