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은 완성을 모색하는 장르
2011년 아힘 프라이어의 <수궁가>를 시작으로 2012년 국립창극단에 김성녀가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창극의 현대화, 대중화 작업은 전통 유산으로만 여겼던 창극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국립창극단은 그리스 비극(<메디아>)부터 브레히트의 서사극(<코카서스의 백묵원>, 사실주의 연극(<산불>)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스릴러, 오페라 양식 등을 접목시켜 창극의 현대성을 실험했다. 판소리 다섯 바탕 역시 전통 연희 연출가가 아닌 해외 유명 연출가나, 오페라 연출가 등 전통 양식에 관습적 인식이 덜한 예술가를 기용해 창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전승 판소리 다섯 바탕 중 남은 작품이 대중적으로 인지도도 높고 사랑받는 <심청가>이다. 이번 <심청가>는 전통과 현대 연극을 넘나들며 탁월한 작품을 만들어낸 국내 대표 연출가 손진책이 맡았다.
소리 중심의 창극 <심청가>
국립 창극단의 현대화된 창극이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동안의 작업을 평가한다면?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판소리를 좋아하는 소수의 귀명창을 위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그분들을 위한 완창 판소리는 지속되고 있으니까) 창극의 다양화, 대중화를 이뤄냈다. 창극은 해외에서도 승부할 수 있는 무대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국립창극단의 작품은 그동안 창극이 공연예술의 변두리에 있었는데 중심으로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번에 선보일 <심청가>도 그러한 작업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을까?
김성녀 예술감독이 다양한 시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전통성이 있는 창극을 담백하게 보여주려고 한다. 판소리 <심청가>에는 아름다운 대목이 많다. 연출적으로 요란하지 않고 판소리의 멋과 맛을 살리는 작품이 될 것이다. 전통적인 판놀음 위주의 우리만의 연극 양식을 발전시킬 것이다.
서구적인 연극과는 다른 우리만의 연극 스타일이 무엇인가?
창극의 역사가 100년 남짓 된다. 중국에는 경극이, 일본에는 가부키가 있지만 한국에는 대표적인 공연이 없다고 이야기들을 하는데 우리에게는 판소리가 있다. 협률사 시대에 판소리를 분창 형식으로 나누어 불렀고, 신극의 효시라는 <은세계>가 사실 창극 형식이다. 창극은 완성된 장르라기보다는 완성을 모색하는 장르이다. 그래서 우리의 원초적인 연극을 현대적 무대예술로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서구 리얼리즘에 판소리를 넣은 것은 창극이 아니라는 생각에 동양 연극 정신에 입각한 다양한 전통적 무대 어법을 실험해 보았다. 창극은 진행형이라는 측면에서 몇 가지 실험을 했고 김성녀 예술감독의 작업들로 창극이 진부한 공연 양식이 아니라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됐다. 지금부터의 창극 작업이 중요하다.
이전에 했던 창극 작업을 소개해 준다면.
국립창극단의 <광대가>가 있고 동아일보와 작업한 <천명>을 비롯한 신창극 시리즈가 있다. 그리고 베세토 연극제에서 고전소설 『춘향가』를 중국은 월극(越劇)으로 일본은 가부키로 우리는 창극으로 1, 2, 3부를 나눠서 올렸다. 판소리는 창을 중심으로 고수의 1인 반주로 연주된다. 그러한 특성을 살려 소리 중심으로 극에 들어가고 나가는 연극을 선보였다. 서구적 연극 개념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려고 했다.
창극에서도 도창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는데, 이번 <심청가>에서는 안숙선 명창이 도창으로 출연한다.
이번에는 도창이 중심이 된다. 판소리 중 극 중 인물을 대사로 노래하는 것 중에서도 좋은 소리가 많지만, 장면을 서술하는 것 중에서도 그런 소리가 많다. 창극을 극 중심으로 각색하면 그런 대목의 소리들이 빠지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좋은 소리를 살려보겠다는 취지다.
각색도 직접 한다. 각색 방향은?
판소리 원본에서 이음새 대사만 정리하는 수준일 것이다. 전래되어 오는 소리 위주로 정리할 생각이다. 판소리 중에서도 더늠(판소리 명창이 각자의 개성을 발휘해 소리를 바꾸거나 새로 소리를 짜서 추가하는 대목)이 있지 않나. 좋은 더늠을 다 살리는 방향으로 각색했다. 예컨대 <심청가>에서 제일 좋아하는 대목이 ‘범피중류’인데 한두 소절 하고 넘어가기도 하는데 이 대목을 오랫동안 한다든지 이런 방향으로 각색될 것이다.
창극은 판소리와 다르게 무대화를 기대하게 된다.
무대는 심플하게 할 것이다. 동양 연극의 특징을 살려 극적인 약속으로 진행하는 거다. 도포를 묶으면 선원이 되고 관객의 눈앞에서 그런 과정을 보여주려고 한다. 창극 배우들의 연기 자체도 최소화할 것이다. 소리만 돋보이고 의상이나 배우들의 연기, 무대장치 등은 미니멀한 양식으로 갈 것이다.
무논리가 아닌 초논리의 연희 창극
<심청가>의 중심 주제는 ‘효’이다. 현재도 중요한 가치이지만 눈먼 아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심청에게 공감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심청가>는 전통적이고 유교적이고 불교적인 효를 다루고 있다. 어떤 면에서 뒤집어 보면 심청이가 무지막지하게 효를 실현해 버림으로써 ‘이렇게 하는 게 효란 말인가’ 하는 역설적인 시대의 반항으로도 볼 수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주제는 효로 삼았지만 <심청가>의 ‘효’는 아버지를 위한 효라기보다는 희생을 통한 구원의 의미가 크다. <심청가>가 만들어질 당시 민중들의 삶은 핍박을 받고 힘들었다. 가난하지만 자신을 희생해서 연꽃으로 화(化)해서 정화되어 돌아오는 내용에는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판소리는 표면적 주제와 이면적 주제로 나뉘는데 그런 면에서 양면성을 지닌 형태이다.
표면적 주제와 이면적 주제를 좀 더 설명해 준다면?
판소리는 서민들의 염원을 담은 이면적 주제와 보수적인 관념론으로서 양반들의 지배 원리를 담은 표면적 주제를 모두 가지고 있다. 심재효가 판소리를 집대성하면서 양반들이 좋아하고 어전에서도 부를 수 있는 표면적 주제를 살리고, 이면적인 주제는 축소시켰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수궁가>이다. 이 작품의 표면적인 주제는 ‘충(忠)’이다. 민중들이 부르던 판소리에선 용왕이 주야로 정사를 돌보다 병이 든 것이 아니고 맨날 물개만 잡아먹고 주지육림(酒池肉林) 하며 살다가 병이 든다. 토끼 간을 가지러 갈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신하들이 다 안 가려고 하던 중에 별주부는 돈 없고 빽 없어서 떠밀려 가게 된 것이다. <심청가>에는 이면적 주제가 뺑덕이네를 통해 골계미로 드러난다.
<심청가>를 보면 심봉사가 몰락한 양반집 자제로 등장하는데 곽씨 부인과 청이를 잃고 뺑덕어멈에게 어리숙하게 이용당하고, 궁에 가는 길에 방아를 찧는 등 인물의 일관성이나 개연성이 부족해 보인다.
등장인물의 일관성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우리 전통극의 인물이 양식화된 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플롯-인물-주제-문체-음악-볼거리’ 순으로 중요하게 봤는데 동양 연극은 그 순서가 반대다. 탈춤의 플롯이 엉성하다, 논리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서양은 과학주의나 합리주의가 낳은 문화이고 우리는 정의 문화이다. 문화의 근본이 다르다. 자꾸 서구 우월주의 시각에서 보니까 엉성해 보이는 것이다.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초논리이다. 서양의 전위 연극은 초논리이지 않나. 그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전통 연극이 덜 진화하고 열등한 것처럼 규정하는데 그게 아니다.
판소리의 소리는 기존 음악의 틀을 넘어서는 듯한 초현대적이라는 인상을 받곤 한다.
<심청전>을 유럽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 아니리를 창조로 바꾸어서 템포 있게 진행시켰다. 서구 연극학자들이 시놉시스를 보지 않았는데도 소리로 다 전달이 되었다면서 연기론을 다시 써야겠다고 극찬했다. 고리타분하게 생각해서 못 봐서 그렇지 창극은 미학과 힘이 있는 장르다. 최근에는 현대연극적인 창극을 많이 봤기 때문에 이번 <심청가>에서는 우리 소리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고 싶다.
극단 미추에서 마당놀이를 개발, 발전시켰다. 마당놀이와 창극의 뿌리는 다른가?
판소리는 전라도 무가에서 발전한 우리 민속극 중 하나인 일인 독연 형태다. 마을에서 이야기를 맛깔나게 하는 사람이 이웃 마을로 원정을 다니며 이것이 전문화돼서 발전했다. 민중들 사이에서 자생한 소리꾼들의 소리에는 건전한 비판 정신과 해학이 있었는데 사대부 위주로 정리하다 보니 그러한 성질이 많이 훼손되었다. 마당놀이는 판소리, 가면극, 인형극, 대동굿까지 우리 연극 유산을 모두 차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희극 정신을 바탕으로 한 우리 전통 예능의 총화된 양식이 마당놀이이다. 창극이 판소리의 소리 중심의 극이라면 마당놀이는 산대 계통의 전통극 양식의 영향을 받은 장르이다. 우리 전통 연희극의 기원을 제천의식부터 잡아서 역사적으로 내려오면 마당놀이에 이르게 된다.
<심청가>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어떤 매력을 지닌 작품인가?
<심청가>는 계면조 스타일을 잘 살린 작품이다. 소리가 굉장히 세련되고 세밀해서 소리의 맛이 있다. 이번에는 연출로 무엇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욕심보다는 판소리를 사랑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겠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판소리를 많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소리로 내용을 상상하게 만드는, 소리의 맛과 멋을 듬뿍 느끼고 간다면 만족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5호 2018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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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ECIAL INTERVIEW] <심청가> 연출 손진책 [No.175]
글 |박병성 사진 |심주호 2018-04-17 4,542sponsored adv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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