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처 | [SPECIAL] 바른 제작 문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할 때 [No.175]
글 |배경희 2018-05-04 3,927성폭력 사태 대응에 나선 극장과 공연 단체
“연일 폭로되는 연극계의 성폭력 및 권력 남용에 의한 사태에 대해 참담함을 느끼며, 모든 책임을 통감합니다. 이로 인해 상처받은 많은 피해자분들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지난 2월 28일, 한국연극연출가협회가 발표한 공식 입장문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됐다. 최근 공연계를 초토화시킨 성폭력 폭력 사태에 대한 입장 표명문이었다. 2월 초, 배우 이명행의 성추행 의혹이 불거진 이후 매일 새로운 피해자가 등장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공공 예술 단체와 각종 공연 협회가 서둘러 공식 입장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담’, ‘통감’, ‘책임’. 이 시기에 발표된 대부분의 성명서에는 이 세 가지 공통 키워드가 담겨 있다.
미투 운동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국립극단은 2월 24일 발표한 입장문을 통해 성범죄 가해자로 지목된 이윤택, 이명행, 오동식과 작업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성폭력을 비롯한 인권 침해 문제를 어떻게 개선해 갈 것인지 빠르게 대응책을 내놓았다. 법률자문을 통한 계약서 내 성폭력 관련 조항 추가, 극단 임직원 및 협업 배우/스태프들의 성교육 강화, 피해자 보호를 위한 신고 및 대응 시스템 구축, 문제 발생 시 예외 없는 조치 단행 등이 그 내용이다. 서울 시내 대표 극장인 국립극장과 세종문화회관 역시 성범죄 예방 차원에서 성희롱 교육은 물론 인권 교육을 강화할 것이며, 자체적으로 신고·상담 센터를 운영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계약서 내 성폭력 내용 추가’는 미투 운동의 공통된 대응책 중 하나로, 서울예술단의 경우 미투 운동 시기에 연습이 진행되고 있던 <신과 함께_저승편> 팀부터 곧바로 이를 적용했다. “본인은 공연을 위한 작업 수행 시 예의와 품위를 준수하여 일체의 불미스러운 일을 사전에 방지한다. 본인은 어느 일방이 서울예술단 임직원을 포함한 공연 참가자에게 인권 침해(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를 유발하는 물리적,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게 새롭게 추가된 내용이다. 이는 권고 사항이 아닌 의무 사항으로, 계약서에 불이행 시에는 어떠한 처벌이나 징계를 감수한다는 내용이 명시된다. 서울예술단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연습 중에 개별적으로 서약서를 받았지만 이후 진행되는 작품들은 연습에 들어가기 앞서 전체 배우와 스태프가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에서 서명이 진행될 예정이다.
사실, 공연계에, 더 나아가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권력 남용과 그로 인해 일상화된 성폭력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수위와 규모가 이 정도일 줄 누가 알았을까. 공연계 미투 운동으로 충격에 휩싸인 관객과 자책감으로 마음에 타격을 입은 공연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깊이 고통받아온 피해자들. 바르고 안전한 제작 환경을 만드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야 하는 협회와 극장, 제작사가 빠른 대응책을 발표하는 것은 분명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공연 팀에 성교육을 실시한 제작사 랑의 신동은 이사의 한 발언은 지금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거리를 던진다. “공연계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스스럼없이 스킨십이 이뤄지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솔직히 성희롱이냐 아니냐의 경계가 모호한 게 사실이다. 미투 운동 이후 환경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해 우리 프로덕션이 진행 중인 작품에서 성교육을 실시해 본 결과 이런 것도 성희롱에 해당하냐고 놀라는 반응이 많았다. 빠르게 준비하느라 내용 면에서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었지만, 최소한 경각심을 갖게 한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공연계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들에게 제대로 된 인권 교육이 실시된다면 우리 사회는 변할 수 있지 않을까.”
남성과 여성이라는 권력 관계에서 나오는 폭력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으며, 일상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폭력의 경계가 모호하다. 당장 성희롱 예방 교육에서 이것도 성희롱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만큼 말이다. 여기서 잠깐, 지난해 권력 남용 및 성폭력 예방 안내서를 발표한 영국 로열 코트 시어터의 예술감독 비키 페더스톤 말을 옮겨보자. “성차별 문제는 복잡한 문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복잡하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이 상황은 매우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다. 말 그대로, 멈추기만 하면 된다. 문제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다. ‘문제의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선적인 논의와 공통된 합의가 필요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 지침 매뉴얼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안전장치 마련이 필요하다. 표현의 자유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 예술성이 만들어지는 공간은 반드시 올바르고 안전한 곳이어야 하니까.
MINI INTERVIEW 두산아트센터 김요안 PD
두산아트센터는 성폭력 예방을 위해 어떤 대응책을 마련 중인가.
두산은 그룹 차원에서 연례적으로 전 직원 성희롱 예방 교육과 인권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두산아트센터 공연 프로덕션의 스태프나 배우에게 이를 적용하진 못했다. 아무래도 극장과 배우, 스태프의 관계가 일반적인 기업 내의 고용주와 고용자의 관계가 아니다 보니 강제 실행에 어려움이 있다. 또 다른 데서 이뤄지지 않는 성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성추행 사건이 불거지고 나서부터 무대예술 팀이 기본적으로 행하는 안전 교육에 성희롱 예방 내용을 추가해 실시 중이다. 보통 셋업 기간 중에 안전 교육이 이뤄지기 때문에 일정 문제나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외부 강사가 아닌 극장 스태프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데, 성희롱 예방 교육을 위해 전문 기관에서 추가적인 교육을 받았다. 장기적으로는 성폭력 문제만이 아니라 인권 문제 교육도 강화할 계획이다. 계약 내용 추가는 물론이고, 성폭력 문제 방지를 위한 윤리 강령 지침이나 대처 방안을 담은 내부 매뉴얼을 만들어가고 있다.
성적인 묘사가 있는 작품의 준비 과정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는지.
성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담긴 작품의 경우 공연에 참여하는 배우 입장과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의 입장을 고려해 표현 수위와 방식을 고민해 왔다. 보통 연습 과정 중 연출과 관련 내용에 대해 상의하는데, 필요하다면 배우와 직접 소통하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공연 사전에 프로덕션과 스태프, 배우가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에 상호간 합의가 이뤄진 것에 한해서만 무대에서 실행한다는 것이다. 작품에 따라 노출 수위나 표현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보편적인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번 사태 이후 성적인 묘사가 필요한 작품에 대해 더욱 섬세한 논의를 거칠 계획이다.
미투 운동 이후 어떤 변화를 기대하나.
이번 미투 운동으로 외부에 드러난 사실 중 하나는 공연계에 권력 남용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다. 공연을 제작하는 기술력은 많이 발달했지만, 작품이 만들어지는 환경은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게 밖으로 드러난 셈이다. 위계 폭력이 일상화돼 있다 보니 어느새 우리 모두 권위주의에 무감해졌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공연계 내 권위주의 문화가 청산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길 바란다. 조금 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제작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길 바라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선 이번 운동이 중요한 흐름이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론 미투 운동을 다루는 언론 보도가 지나치게 가해자나 피해자 개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아 아쉬운데, 그보단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 구조를 바꾸어갈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5호 2018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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