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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미투 운동, 공연계의 목소리 [No.175]

글 |나윤정 2018-05-04 4,530
지난 3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두 차례 집회가 열렸다. 한국여성연극협회와 공연예술인노동조합이 주최한 집회가 그것. 이러한 움직임은 공연계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미투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새로운 변화를 촉구하는 데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공연계에 경종을 울렸다. 이를 중심으로 미투 운동에 대한 공연계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변화를 촉구하는 움직임
한국여성연극협회(이하 협회)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미투를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류근혜 회장(연출가)은 “언어적, 윤리적 폭력으로 인한 연극인들의 상처가 발화되는 것을 보며 경악과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한국 연극을 대표하는 몇몇 연극인들이 괴물이 되어 버린 지금, 현장에서 누군가는 가해자, 누군가는 잠재적 가해자, 또 누군가는 방관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통찰하고 반성하고 변화해야 한다”며 집회의 의미를 알렸다. 그에 따라 협회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내놓았다. 가해자들이 인권을 유린해 만든 공연은 예술이 아니라는 것, 연극의 본질을 기만한 가해자들의 예술 기금 수혜 박탈과 수상을 철회하라는 것, 성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제작 환경 조성을 위해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이런 성명을 밝힌 후 협회는 현 사태에서 느낀 참담함을 알리는 의미에서 침묵 거리 행진을 이어갔다. 또한 그들은 앞으로도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행동을 함께할 것이라며 위드유를 외쳤다. “오랜 세월 가슴 깊이 묻어둔 상처를 지금이라도 드러내 주어 감사하다. 동시에 그 상처를 더 일찍 알지 못해, 더 일찍 보듬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 이것이 한국 연극의 어둠을 정화하고 모순된 구조를 변화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어 3월 18일 공연예술인노동조합(이하 노조)은 문화예술계 평등 문화를 위한 연극인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노조는 “공연예술계의 성폭력 사건은 결코 개인 혹은 단체의 일탈이 아니다. 공연예술계에 만연한 권위주의, 억압적 위계주의의 산물이다. 군사 조직 못지않은 억압적 위계 구조와 권위주의가 공연예술계에 만연해 있기 때문”이란 성명을 내놓았다. 그들은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촉구하는 동시에 공연예술계에 만연한 억압적 위계 구조를 바꾸고 평등한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데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대한 연대 서명 운동도 함께 펼쳤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가 공연예술계의 불평등과 폭력을 주시하며, 피해자를 지지할 수 있는 기구 설치와 지원 마련에 앞장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진행을 맡은 오민애 부위원장(배우)은 “이 자리가 연극계의 자정과 평등 문화를 위한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며 궐기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안타까운 점은 지난 2월 연극뮤지컬관객이 주최한 위드유 집회에는 300여 명이 모였지만, 연극인들이 주최한 두 집회에는 참여자가 그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는 것. 그에 대해 오 부위원장은 “많은 연극인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독려하고 호소했지만, 몇몇 단체들은 미투 운동이 그냥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듯했다. 원로 선생님들조차도 나서기를 꺼려하셨다. 이렇게 위축과 두려움, 혼란이 자리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주소다. 하지만 부끄럽다고 힘들다고 이대로 놔두어서 되겠는가. 함께 호흡하고 교감하며 정의의 소리가 번져 나가길 바란다. 이제 시작이다”라고 연대를 호소했다.




자정의 목소리
노조의 궐기대회는 미투 운동에 대한 발언과 퍼포먼스, 그리고 연극계 규탄과 청원을 위한 행진으로 진행되었다. 발언 무대에는 6명의 발언자가 올라, 미투 운동의 현실을 더욱 실질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성동연극협회 황정원 부회장(배우)은 연극에 입문했을 당시 실제로 성폭력 현장을 마주했다고 고백했다. “한 연출가가 여자 선배님들에게 성적인 언어 폭력을 가했다. 선배님들에게 항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가만히 있으란 거였다. 배우는 연출에게 선택되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더 이상 따져 묻지 못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현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혹자는 연극계에 미투 운동이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잃어버린 것은 연극인으로서의 자존심이다. 이제 그 상처받은 자존심을 다 함께 회복해 나가야 할 것 같다.” 원로 연극인인 박정기 극작가 겸 연출가 역시 오십여 년 전 드라마 연출가의 성폭력을 보고 항의를 했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오늘날 연극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응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의 운동이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올바른 정신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한다. 이곳에 와보니 가슴이 뜨끈뜨끈해진다. 우리는 반드시 변화를 이룰 것이다.”

최근 성폭력 피해자들이 극심하게 겪고 있는 고통 중 하나는 그들을 향한 사회의 무분별한 폭력으로 발생하는 2차 피해다. 성폭력반대청주대연극학과졸업생모임의 백혜경 씨는 눈물 어린 호소로 2차 피해의 고통을 절실하게 알려주었다. 故 조민기 배우의 자살 이후 청주대 학생들에게 쏟아진 악성댓글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소리 없는 살인자다, 꽃뱀이다, 너도 죽기를 기도한다 등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2차 가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성폭력으로 인한 고통이 가라앉기도 전에 또 다른 범죄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다.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대학 환경을 만드는 것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함께 책임져야 할 공공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 책임이 오로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만 전가되고 있다. 피해자들이 성폭력의 상처를 세상에 드러냈던 이유는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故 조민기 교수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당한 비난을 멈춰달라. 성폭력반대청주대연극학과졸업생모임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피해자를 공격하는 행동에 대해 법적 대응 등 적극적인 대처를 할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해 맹봉학 배우는 “청주대 학생들처럼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겪게 된다면, 미투 운동이 사그라들 수밖에 없다. 우리가 피해자 편에 서 주어야 한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힘을 보태고 싶다”고 미투 운동에 연대하자고 소리쳤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미투 운동이 이끌어낼 변화는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일 것이다. 미투를 외치는 순간이 바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공연계 사람들이 원하는 변화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법안과 정부의 지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된다. 양혜경넋전춤연구소의 양혜경 대표는 궐기대회에서 “이제야 소리를 낼 수 있어. 이제야! 인생을 통째로 말아먹은 지금에서야 소리를 낼 수 있다고”라는 통탄의 외침으로 퍼포먼스를 펼쳤는데, 그는 “실제로 폭행 때문에 내 인생이 통째로 바뀌었다. 정말 피가 솟구치는 일이기 때문에 붉은 천으로 그 심정을 표현했다. 울고 싶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라며,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법안 마련이다. 아무리 조사를 한다고 해도, 법안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에 적용될 수 있는 실질적인 법안을 촉구하기 위해 서명 운동을 펼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교육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지영 배우는 “성폭력이 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 잘못된 교육을 바로잡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폭력적인 문화와 교육들. 실제로 이런 환경들이 바뀌어야 자신의 행동이 범죄라는 것을 알고 개선될 수 있다. 성폭력범들에게 전자발찌를 채우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을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가도 집중해야 한다. 미투 운동은 가해자들을 매장하자는 게 아니라 그들을 진짜 살려내자는 것이다. 연극계에 미투 운동이 활발한 것은 그만큼 자성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연극계가 더욱 깨끗하고 의미 있는 변화를 이뤄 낼 것이란 기대를 드러냈다.

한편 세종대 교수로 재직 중인 김재엽 극작가 겸 연출가는 미투 운동으로 학교와 무대에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변화는 민주주의가 성숙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성폭력이 벌어졌을 때, 가해자는 공연을 계속하고 피해자는 공연에서 빠지는 일들이 벌어졌다. 다수가 공연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가장한 다수의 폭력이 이뤄졌던 거다.” 또한 그는 “권력에 복종하게 만드는 예술 교육 속의 군대식 문화는 학교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지 학생들을 위한 게 절대 아니다”라며 예술 교육 시스템의 변화, 그리고 각 분야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하는 위원회나 심사 구성원에 제도적으로 양성 평등이 이뤄지길 바란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거리로 나가 행동한 것은 바로 관객들이었다. 그만큼 관객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관객들은 더욱 진취적이고, 더욱 새로운 감각을 원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탄핵이 정치적인 혁명이었다면, 지금은 문화적인 혁명이다. 예술인 모두에게 감각의 변화가 필요한 순간인 것이다. 내가 언제라도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지금의 미투 운동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5호 2018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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