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더 큰 에너지를 내뿜는 배우 양희경을 뮤지컬에서 만나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지난 9월 <피맛골 연가>의 살구나무 정령 행매 역으로 오랜만에 뮤지컬 무대에 올라 사연 많은 울림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녀가 <넌센세이션>을 통해 또다시 관객들을 만난다. <넌센세이션>은 올해로 국내 공연 20주년을 맞는 <넌센스>의 다섯 번째 시리즈. 1998년 <넌센스1>과 인연을 맺은 이후 <넌센스2>, <넌센스 잼보리>를 통해 서로 다른 캐릭터를 선보이며 웃음과 감동을 선사해 온 양희경을 만났다. 한 시간 남짓한 만남에서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배우로, 두 아이의 엄마로 무대와 가정을 오가며 살아온 30여 년의 삶을 들려주었다.
<피맛골 연가>를 마치고 바로 이어 <넌센세이션>에 참여하셔서 반가우면서도 조금 놀라웠어요. 팝콘하우스에서 공연한 <브로드웨이 42번가> 이후로 더 이상 뮤지컬은 힘들어서 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연이어 두 편의 뮤지컬에 출연하신다니까요.
그때가 내 나이 쉰을 넘었을 때였으니까 춤추고 노래하는 게 벅차지 않았겠어요. 6년 만에 뮤지컬을 하게 된 것도 우리 둘째 아들이 공연하면 건강해질 것 같다고 해서 하게 된 거였어요. 연극 <민자씨의 황금시대>를 마치고 기운이 바닥을 쳐서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아팠거든요. 촬영 없는 날에는 집에서 누워만 있을 정도였죠. <피맛골 연가> 할 때도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는데 젊은 친구들과 에너지를 나누다보니 정말로 많이 좋아졌어요. 근데 <넌센세이션> 연습실에서 기절할 것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자니 가슴이 터져서 죽을 것처럼 힘이 드네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젊은 친구들도 똑같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이 힘든 작품을 내가 왜 했을까 후회하고는 있어요. 공연 올라가면 숨통이 좀 트이겠지. 이럴 줄 알고 김미혜가 작품 하자고 할 때 못한다고 했던 건데….(웃음)
<넌센스> 시리즈가 맺어준 김미혜 대표님과의 오랜 인연 때문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신 건가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넌센스>부터 <브로드웨이 42번가>까지 계속 무대에서 만났으니 꽤 오랜 인연이긴 하죠. 하지만 그것보다는 청춘을 불태우고 번 돈을 땅이나 빌딩을 사는 게 아니라 뮤지컬 제작하는 데 쓰겠다는 황정민, 김미혜 부부의 마음이 참 예뻤어요. 무대에 대한 그들의 진심 어린 사랑에 감동을 받은 거죠. 그렇지 않았다면 개런티 깎아가면서까지 출연을 했겠어요, 드라마 두 편 하는 게 낫지. 다른 배우들도 모두 김미혜와의 돈독한 관계가 있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결과가 좋아야 만든 사람의 예쁜 마음도 다치지 않고, 출연하는 배우들과의 좋은 관계도 그대로 유지될 텐데…. 프로의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돈이거든요. 인간관계도, 유대 관계도. 그거 생각하면 자다가도 잠이 깬다니까요.
체력적으로는 힘드시지만 작품 안에 웃음을 주는 요소들이 워낙 많다보니 연습실 분위기는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좋아졌지만 처음엔 후배들이 내가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쳤어요. 아홉 명의 배우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친구가 이태원인데 그래도 나랑 열두 살 차이가 나니 그럴 수 있죠. 게다가 내가 좀 완벽주의자라 블로킹 전에 모든 걸 머릿속에 담아야 하거든요. 대사와 가사를 제일 먼저 외우다보니 후배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긴 해요. 하지만 <넌센스> 시리즈는 배우들 간의 ‘쫀쫀한’ 유대 관계가 없으면 실패를 하거든요. 그래서 열 명의 배우 전부가 한데 모여서 같이 연습을 해요. 어떤 조합을 만나도 친숙하게 공연을 잘할 수 있게. 또 우리나라 관객들은 재밌으면서도 뭔가 감동적인 코드를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원작에 없는 기부를 작품 안에 넣었어요. 우리도 남의 도움을 받고 이만큼 성장했으니 돌려줄 때가 됐잖아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게 뭐예요. 물이잖아요. 그래서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자’가 이번 공연의 새로운 주제가 됐어요. 연습 초반 2주 동안 배우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각색 작업을 했어요. 공연 대본은 작가 혼자서는 완벽하게 만들 수가 없거든. 미국적인 코믹 요소와 노랫말도 우리 식으로 다 바꾸면서 원작보다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나왔어요. 노래도 우리 배우가 훨씬 더 잘하고. <넌센스1>, <넌센스2>, <넌센스 잼보리> 모두 번역과 번안, 각색 과정을 겪어서 나온 거예요.
<넌센스>는 시리즈마다 출연을 하시고 10주년 기념 공연, 그리고 2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공연에까지 출연하세요. <넌센스>와의 특별한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1998년 정진수 씨가 연극협회장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연극협회가 세계연극제를 하느라 진 3억 원의 빚을 갚기 위해 박정자 선생님과 저, 하희라, 신애라, 임상아가 뭉쳤죠. 당시 연극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스타 캐스팅 덕분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공연 전 회를 만석으로 채웠어요. 관객들이 정말 많이들 좋아하셨어요. 덕분에 빚도 거의 다 갚았죠. 10주년 공연은 특별한 의미를 모르고 그냥 했던 것 같고, <넌센스 잼보리>는 허버트가 아니라 엠네지아를 맡아서 스토리를 끌어가서 재밌게 했죠. 근데 시리즈를 통틀어서 드라마가 가장 강한 작품은 <넌센스1>이에요. <넌센세이션>은 완전히 쇼 뮤지컬인데 우리가 감동을 넣은 거고.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1기 출신이시죠. 연기는 어떻게 하시게 된 거예요?
우리 언니 덕분이죠.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면서 저보고 배우인 것 같다고, 그 학교에 들어가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 전까지 연극이라는 건 고1땐가? 교회에서 <꽁지 빠진 암탉>이라는 성극을 한 게 전부였어요. (언니가 배우의 재능을 제대로 발견하고 길을 열어주신 거네요.) 그렇죠. 차석으로 입학해서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학교에서 배운 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200퍼센트 최선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나는 자기 아이의 달란트가 뭔지 빨리 발견하고, 어렸을 때부터 밀어주는 부모가 제일 훌륭한 부모라고 생각해요. 난 훌륭한 언니를 둬서 오늘날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잖아요.
방송으로 얼굴을 알리기 전에 먼저 연극으로 데뷔하셨어요. 1981년 <자아 1122년>이었던가요?
그건 프로 무대고, 74년인가 75년부터 학교에서 연극을 했어요. 대학 연극제에도 나가고. <자아 1122년>은 결혼을 하면서 무대를 떠났다가 학교 동문들끼리 하는 작업이라 불려 나갔던 거예요. 작업을 하면서 다시 무대에 서야겠구나 생각했는데 둘째 애를 가져서 또 쉬고 1985년에 <한씨연대기>를 통해 다시 무대에 복귀했어요. 공백기가 있긴 했지만 그사이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연기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애기 낳고, 시집살이 하고, 남편하고 살면서 지지고 볶고 한 경험들이 없었다면 무대 위에서 삶이 묻어나지 않는, 좀 심심한 연기를 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연기를 할 만하면 쉬어야 했으니, 연극배우와 엄마로서의 삶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을 것 같아요.
둘째 애 갖고 기분이 참 그랬어요. 뮤지컬을 준비하다가 작업을 멈췄거든요. 그러다 <한씨연대기>로 다시 나올 때도 애들 교육에 힘쓸 것인가, 연극을 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이 수만 가지였어요. 그때 내가 <가요 응접실>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배철수 씨의 부인이 당시 PD였어요. 그 친구가 나한테 그러는 거야. “양 선배가 집에 있다고 해서 애들이 잘 크는 건 아니에요. 그럼 모든 가정의 아이들이 잘 커야지.”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더라고요. 또 애들 아빠 일이 계속 안 풀려서 내가 도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도 했어요. 가장으로서 열심히 뛸 수밖에 없다는 게 굉장히 스트레스였는데 바꿔서 생각해보니까 애들 때문에 내가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거예요. 모든 예술은 고통이 없으면 안 나오는 거거든요. 절박해야 최선의 최선을 다할 수가 있잖아요. ‘너는 무대에 서야 한다’고 등 떠밀어주고 우리 애들을 맡아서 키워주신 친정 엄마와 언니의 힘도 컸어요. 나는 절대 못할 일이죠.
드라마 출연은 어쩌다가 하게 되신 거예요?
<한씨연대기>를 공연하던 중에 <호랑이 선생님> 마지막 시리즈에 섭외가 됐어요. 처음엔 영화와 드라마, 연극 연기가 서로 다르다는 걸 몰라서 고생을 꽤나 많이 했어요. 카메라가 나를 잡고 있을 땐 상대 배우가 연기를 안 하는 거야. 처음엔 뭐 저런 사람이 있나 했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당시 연극배우들은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세 대 놓고 촬영하는 연속극이 아니라 베스트극장이나 미니시리즈처럼 ENG로 촬영하는 드라마로 TV 데뷔를 했어요. 그러다 스튜디오에 와서 짜여진 콘티 안에서 움직이는 데 적응을 못하고 떠난 사람이 대부분이었죠. 근데 나는 처음부터 6~7개월짜리 연속극으로 시작한 덕분에 살아남은 거예요. 어디 그들이 나보다 연기를 못해서 포기했겠어요. 두 번째 작품이 <꾸러기>라는 어린이 드라마였는데 그때부터는 귀신이 됐어요. 콘티가 뭔지, 원투쓰리가 뭔지, 원샷, 투샷, 풀샷 잡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클로즈업 잡을 때 손 연기는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근데 드라마는 어쩔 수 없는 생계 수단이었지 작업하는 데서 오는 희열이나 즐거움은 무대와 비교할 수가 없어요. 관객과 주고받는 팽팽한 긴장감과 호흡이 없거든요. 그래서 나는 카메라, 조명, 음향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을 내 관객이라고 생각하고 연기를 했어요. 누가 있든, 어떤 상황에서도 연기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래도 연극 무대를 꾸준히 찾으셨던 것은 배우로서의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회귀본능이죠. 저는 TV에서 할 수 있는 역이 정해져 있어요. 이모나 고모, 커리어우먼, 교수, 간호사, 의사, 선생님 정도. 게다가 짝도 없이 늘 싱글이에요, 노처녀이거나 돌싱이거나. 가끔 베스트극장 같은 단막극에서 캐릭터 있는 배역을 맡아서 잠깐 숨통을 틔었던 것을 제외하고 십여 년을 비슷한 역할을 하다보니 너무 지루한 거예요. 난 캐릭터를 창출하면서 희열을 느끼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과정을 좋아하는데 아무리 연기를 뛰어나게 잘해도 뭐가 크게 다르겠어요. 그러던 중에 후배한테서 송기원의 소설 『늙은 창녀의 노래』를 받은 거예요. 어느 날 잠이 안와서 밤에 읽었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잖아요. 제가 지금까지 연기를 해오면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 때 ‘빠박!’ 하고 느낌이 오는 건 기가 막히게 했거든요. 책을 읽는데 느낌이 온 거죠. 처음엔 어떤 배우가 하면 좋을까를 생각했는데, 늙은 창녀는 길에서 언제나 마주칠 수 있는 아줌마, 예뻐도 안 되고 날씬해도 안 되고 섹시해도 안 되고 그냥 펑퍼짐한 일상의 아줌마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할 수도 있겠다, 하면 좋겠다 생각을 했죠.
<늙은 창녀의 노래>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어요. 2005년에 재공연하기 전까지 다른 여배우들은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작품이 될 정도로 말이에요.
명계남 씨가 제작을 하고 김태수 씨가 연출을 했는데 처음엔 거절을 당했어요. 대본을 읽고 느낌이 안 온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직접 하겠다며 거둬들였는데 마침 극단이 공연을 해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공연을 올렸는데 대박이 났죠. 1995년이니까 인터넷도 없고 예매 문화도 활성화되지 않은 때였잖아요. 그래서 아침 7시부터 아줌마들이 극장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덕분에 극단 식구들도 새벽같이 나가서 티켓을 팔았죠. 220석 공연장이었는데 260~270명 정도의 관객들이 객석을 채웠던 것 같아요. 덕분에 극단은 7천만 원 상당의 빚도 다 갚고 영화 <초록물고기> 제작 기반까지 마련할 수 있었어요. 그 작품이 왜 고맙냐면,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천편일률적인 연기를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는 에너지를 줬거든요. 뭘 해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래서 재공연 하기를 꺼려했어요. 죽을 때까지 첫 느낌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거든요. 마흔둘에 초연을 하고 쉰둘에 다시 공연을 해보니 늙은 사랑도 괜찮을 것 같긴 하더라고요. 예순두 살 때 다시 하면 더 절절하겠구나 싶긴 하지만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웃음)
그때 꼭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방송보다 무대 위에서 더 큰 빛을 뿜어내는 배우 양희경의 에너지를 더 많은 관객들이 접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내 바람은 일 년에 두 번 정도 무대에 서서 희열과 보람을 느끼면서 사람들한테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지내는 거예요. 연습 두 달에 공연 한 달이면 6개월 이상은 일하는 거거든. 난 애 둘 낳고 1985년에 무대에 복귀해서 오늘날까지 단 한번도 편하게 쉬어본 적이 없어요. 쉰 살이 되어서야 나 자신에게 휴가를 줬는데 그 전까지는 일요일도, 공휴일도, 명절도 없이 일을 했어요. 애들 때문에 집을 비울 수가 없으니까 지방 촬영이 많은 미니시리즈나 대하연속극보다는 일일연속극, 주말연속극, 아침드라마같이 정확하게 출퇴근 스케줄이 나오는 작품 위주로 출연했거든요. 쉰 살이 되면서 다음 드라마 콜이 오기 전에 그냥 떠나기 시작했는데, 일주일, 보름, 석 달, 6개월까지, 원 없이 쉬어본 것 같아요. 이제는 영화도 해보고 싶어요. 애들도 다 컸고 우리 아저씨는 혼자서 심심해하거나 말거나 자리를 비울 수 있거든.(웃음)
선생님께 무대는 어떤 곳일까요?
연기자로 치면 내가 태어난 곳이겠죠. 늘 그곳이 궁금하고, 함께 머무르고 싶고, 좋은 작업이 있으면 찾아가서 하고 싶은…. 아마 죽을 때까지 나를 제일 편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곳이 아닐까요. 그곳에서 나는 우리들의 삶이 묻어나는 공연을 하고 싶어요. 판타지도 필요 없고 초현실주의도 필요 없죠. 어느 곳에서나 느낄 수는 있지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 시대의 관객과 나눌 수 있는 공연을 무대 위에서 작업하고 싶어요.
이번 공연에서도 관객들과 함께 나눌 무언가를 찾으시겠죠?
그래야겠죠. 일단은, 기부 문화 확산부터.(웃음)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7호 2010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