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걸스>
Mean Girls
십 대들의 코미디에서 지금을 대표하는 이야기로
한국에서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라는 다소 진부한 제목으로 개봉했던 영화 <민걸스>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돌아왔다. 할리우드에서 인정받는 코미디언인 티나 페이가 글을 쓴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린지 로한, 레이첼 맥아담스, 아만다 사이프리드 등의 데뷔 초창기 시절을 만나 볼 수 있다. 영화는 십 대 소녀들의 이야기로, 유치하지만 그 나이에는 심각하고 진지한 학교 생활의 여러 문제를 다뤘다. 개봉 당시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어 수요일에는 핑크 옷을 입거나 주인공 케이디가 아론을 만나는 10월 3일을 ‘민걸스’의 날로 기리는 나름의 팬덤을 형성했다. 미국 십 대 소녀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고도 코믹하게 잘 풀어낸 이야기가 이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난 2013년 처음 티나 페이와 그의 남편 제프 리치먼드가 <민걸스>를 뮤지컬로 기획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2017년 워싱턴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거쳐 올해 3월 브로드웨이의 어거스트 윌슨 극장에서 정식 공연됐다. 작품은 영화 못지않게 프리뷰 공연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팬덤을 형성해 나가는 중이다. 지난 6월 11일 치른 토니상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상을 못 받은 것마저도 팬들 사이에서는 원작 영화 속 장면과 연결 지으며 ‘민걸스답다’는 반응이다. 마치 뮤지컬에서 레지나가 하는 말을 빌리자면 “남들이 너를 싫어하는 것 따위 신경 쓸 것 없어”랄까.
사춘기의 성장통
원작은 동물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살다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온 케이디의 이야기다. 그녀는 시카고의 한 고등학교에 전학을 와서 마치 정글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십 대들의 관계를 관찰자 입장에서 지켜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들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고 케이디는 여러 상황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새로운 학교에서 케이디는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재니스와 ‘너무 게이라서 일상생활이 어려운’ 데미안과 친구가 되고, 이들을 통해 학교의 여왕벌 레지나와 그의 수족인 그레첸과 케이트를 알게 된다. 레지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재니스와 데미안은 서서히 레지나 일행과 가까워져 가는 케이디에게 염탐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어렵게 사귀게 된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 케이디는 레지나와 한때 사귀었던 사이였던 아론에게 마음이 간다.
이후 여러 사건이 벌어져 살도 찌고, 친구도 잃고, 사랑도 잃게 된 레지나는 케이디에 대한 복수로 자신과 그레첸 그리고 케이트가 같이 만든 험담 노트(Burn Book)를 학교에 뿌린다. 물론 자신의 글은 쏙 빼고 말이다. 거의 모든 여학생에 대한 험담이 담긴 이 노트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여학생들의 심한 몸싸움이 이어지고 결국 학생들이 모두 체육관에 모여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서로를 용서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와중에 레지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체육관을 나서고, 학교 밖에서 케이디와 말싸움 중 버스에 치여 크게 다친다. 험담 노트로 인해 케이디는 학교에서 처벌을 받지만, 그 후 학교에서 열린 댄스파티에서 그해의 여왕으로 뽑힌다. 모두가 속으로는 미워했던 레지나를 버스로 밀었다는 루머 덕택에 말이다. 프롬 무대에 오른 케이디는 여왕으로서 받은 왕관을 조각내서 모두에게 여왕의 자격이 있다며 레지나를 포함한 학생 모두에게 나눠주고,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뮤지컬 역시 이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른다. 단지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영화의 화자는 케이디였지만 뮤지컬에서는 재니스와 데미안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배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케이디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이다.
게이라서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식의 농담을 비롯해 영화 속 인물들의 기억에 남은 농담들도 뮤지컬에 그대로 표현한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난 여학생이 여자 화장실에 들어온 데미안에게 뭐라고 하자 데미안이 그 여자애가 키가 작고 땅딸막한 모습이라며 놀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도 물론 무대에서 볼 수 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현재 미국 사회를 비꼬는 듯한 내용 등 지금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농담들도 꽤 많이 추가됐다. 이외에도 공연 전날 있었던 농구 경기에서 일어났던 일을 언급하며 애드리브를 하는 등 관객들이 즐거워할 만한 여러 요소를 곳곳에 배치해 지루한 부분 없이 빠르게 진행된다.
가벼운 농담 뒤에 담긴 뼈 있는 이야기들
물론 우스운 말장난이 전부였다면 작품은 이렇게 큰 사랑을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뮤지컬의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는 모든 주요 인물의 노래를 통해 인물 내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민걸스>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뒷이야기나 인물의 감정적인 깊이를 알 수 있는 좋은 장치를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작품 속 레지나의 눈치를 보면서 늘 이인자의 자리에 있어야 안심을 하는 그레첸은 1막에서 레지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고민하는 웃기지만 짠한 노래를 통해 그레첸이라는 인물의 깊이를 더한다. 또 케이트는 노래를 통해 자신의 물색없음을 더 코믹하게 그려낸다. 그녀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아주 단순한 멜로디의 노래를 부르는데, 자신의 이름, 예쁜 엉덩이, 짧은 치마 등을 소개하고는 “나는 머리가 나쁠지도 몰라”라며 자기소개를 마무리하며 자리에 앉는다.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이다. 노래로 인물의 깊이가 더해지는 또 하나의 인물은 재니스로, 레지나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인물이다. 재니스는 늘 함께 다니는 데미안과 동시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다지 임팩트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인물이자 레지나를 바라보는 보통 인물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녀의 경험과 감정을 통해 작품의 전체적인 메시지가 전달된다. 1막에서 재니스가 레지나에 대해 얘기하며 엄포를 놓는 장면이나 2막 마지막쯤 체육관에서 자신의 경험을 나누면서 모두에게 그냥 생긴 대로 살면 된다고 말하는 장면은 노래로 전달되기 때문에 임팩트 있는 울림으로 탄생됐다.
제프 리치먼드가 작곡하고, 넬 벤자민이 작사한 작품의 음악은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다. 십 대들이 들을 만한 노래이거나 작품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듣기 좋은 팝뮤직에서 힙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은 고등학생들이 겪는 여러 상황을 표현한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뮤지컬 넘버는 없었지만 팝을 기반으로 인물들의 진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장면들은 비트가 강한 힙합을 사용해 흥미를 끌었다.
영화적인 상상력을 펼쳐낸 무대와 안무
영화를 무대화할 때, 까다로운 점 중 하나는 장면을 매끄럽게 전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민걸스>는 이런 전환 속에서도 전혀 템포와 텐션이 떨어지지 않는 데다가 코믹하고 부드럽게 잘 진행된다. 특히 극 초반에 재니스와 데미안이 강당의 무대로 보이는 무대 앞쪽에서 관객에게 이야기를 소개하는 장면은 암전 없이도 배경을 상징하는 소품이나 바퀴 달린 책상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교체된다. 케이디가 아프리카에 살던 모습에서 시카고의 교외에 자리한 집으로 이사하고, 낯선 학교생활의 첫날과 재니스와 데미안을 만나고 학교 카페테리아를 둘러보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말이다. 또 장면이 전환되거나 무대를 사용하면서 코미디를 잘 섞어 지루할 틈이 없는 것도 장점이다. 예를 들면 케이디가 살던 아프리카 장면에서 라이언 킹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은 앙상블 멤버들이 동물로 분장해서 공연하는데, 굳이 변을 보는 장면을 넣기도 했다. 또 바퀴 달린 책상에 앉은 친구들은 처음 학교에 가 낯설어 어리바리한 케이디를 놀리는데, 이들은 이 장면에서 의자에 앉아 보행기를 탄 듯이 미끄러져 무대 뒤로 사라져 재미를 더했다.
여기에 연출이자 안무를 맡은 케이시 니콜라우의 재치를 빼놓을 수 없다. 학생들을 소개하는 장면은 고등학교의 상징적인 빨간 식판을 사용한 군무를 이용했고, 레지나가 등장할 때 카페테리아 책상에 올라간 채 슈퍼스타처럼 등장하는 안무도 큰 인상을 남겼다. 빨간 식판 안무에서 식판은 소품이면서 거대한 캐스터네츠로 사용됐다. 학생들의 삶을 대표하는 카페테리아라는 공간과 이곳을 상징하는 빨간 식판을 이용해 뮤지컬다운 장면을 연출해 냈다. 이 장면은 케이시 니콜라우의 코미디스러움과 재치를 잘 보여줌과 동시에 배우들의 역량도 크게 부각됐다. 또 작품을 통틀어 신 스틸러는 데미안과 그레첸인데, 데미안을 맡은 그레이 헨슨은 직설적이지만 따뜻하고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게이스러운’ 데미안의 역할을 충실히 해줬다. 아쉽게도 토니상을 받지 못했지만, 한국계 미국인 배우인 애슐리 박 역시 그레첸이라는 인물이 지닌 신경질적인 특징들을 노래와 작은 움직임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그려냈다.
여성이 쓴 여성의 성장 이야기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지난해에 이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미투 운동을 비롯해 여성의 권익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시점에 무대를 선보였다는 점이다. 원작 영화에서도 학생들은 결국 각자가 지닌 내재적인 가치에 눈을 뜨게 되고, 서로를 헐뜯는 게 아니라 연대의 중요성을 깨닫는다는 점에서 의미를 던졌다. 그러나 서로를 뒤에서 비방하면서, 남자를 두고 싸움이 난다는 이야기는 여학생들에 대한 사회의 선입견을 지속시키는 효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물론 뮤지컬도 기본적인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에 이런 지적을 피할 수 없었지만, 앞서 말했듯 작품의 여성 주조연들을 더 깊이 있게 다루어 인물의 행동에 적절한 이유와 배경을 그렸고, 동시에 각자 개성이 있는 인물들로 표현했다. 이런 부분은 원작 영화에서 한 발자국 앞선 지금의 사회상을 잘 담아냈다는 평이다. 특히 내용과 무대에 소셜 미디어를 많이 포함해 <디어 에반 한센>과 남매 작품 같은 느낌까지도 받았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민걸스>를 오래전부터 아껴왔던 팬들과 지금의 젊은 층이 이 작품에 애정을 보이는 것이라고 믿는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8호 2018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