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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TRAVEL] 정재진 영상디자이너, 다카라즈카 극단 <Singing In The Rain> 제작기 [No.178]

글 |정재진 영상디자이너 사진제공 |Epitaph. Corp 2018-07-31 11,126

 

정재진 영상디자이너, 다카라즈카 극단 제작기

아름다운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꿈, 다카라즈카


공연 시작 5분전 무대 스크린의 영상 이미지

 

내게 ‘다카라즈카’는 대략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가극단’ 정도였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주로 작업을 하는 내게 그 이름은 멀고도 막연한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 달 간의 인상적인 협업을 하면서 다카라즈카의 매력에 흠뻑 빠진 지금, 그 이름은 새삼 벅찬 설렘으로 다가온다. 


<싱인 인 더 레인> 포스터
<싱인 인 더 레인> 포스터

 

‘다카라즈카’와의 첫 만남 

참여하게 될 작품이 <싱인 인 더 레인(Singing In The Rain)>이라는 사실만 알고 연출가와 첫 만남을 갖기 위해 일본 도쿄로 향했다. 사실 얼마 전 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출국 하루 전날에서야 깁스를 풀고 발목 보호대를 착용한 터라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함께할 나카무라 카즈노리 연출가가 하네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준 덕분에 안심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푸근한 인상의 나카무라 연출가는 유창하지는 않아도 소통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로 한국어를 잘했다. 공연 관람을 위해 한국을 자주 방문한다는 그는 내가 참여했던 <에비타>, <그날들>, <서편제>, <신과함께_저승편>, <아리랑> 등을 모두 섭렵한 ‘한국 마니아’였다. 자기 이름을 한글로 바느질해 놓은 가방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도쿄의 중심지 긴자에서도 수많은 백화점과 고급 상점들 사이에 있는 다카라즈카 빌딩은 그 위상만큼 눈에 띄게 높다. 다카라즈카의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 덕분에 거리는 더 붐비는 것 같다. 출연자 및 스태프 출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한큐 창립자인 코바야시 이치조의 위패가 보였다. 이때만 해도 코바야시 이치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하루밖에 없어서 장면 회의와 세부 계약에 대한 협의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작업할 때 식사도 거르고 화장실도 안 갈 정도로 몰두하는 나조차도 지독하다고 느낄 정도로 이곳 프로덕션 사람들은 회의에만 장시간 집중하는 편이었다. 속으로 ‘스고이데스네!’라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다카라즈카 작품 제작에 참여하는 한국 아티스트가 내가 처음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작품에 영상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것 역시 연출가나 다카라즈카에게 첫 시도였다. 기존 다카라즈카 공연은 물리적인 세트 중심의 프로시니엄 무대였고 영상도 극히 일부만 잠깐 등장하는 정도였다. 이번 <싱잉 인 더 레인>은 스크린용 작화막이나 패널을 활용해 프로젝션 공간을 따로 제작한다. 물론 한국 뮤지컬에서보단 덜 실험적이지만, 오랜 무대 전통을 이어온 다카라즈카에서 이런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큰 모험이다. 한국에서 늘 해오던 일이라 익숙하게 생각했지만, 이번 제작의 의미를 알게 되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지켜본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 앞의 풍경에서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출퇴근하는 배우들을 보려고 질서정연하게 조용히 서 있는 팬들 때문이다. 약속이나 한 듯 길게 정렬된 줄을 이루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선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이런 모습은 오사카의 다카라즈카 대극장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었다. 



출근하는 배우를 기다리는 팬들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본고장 오사카 효고현

본격적인 제작 회의를 위해 이번에는 오사카로 향한다. 드디어 막연하게만 알던 진짜 다카라즈카를 만나는 것이다. 한큐전철주식회사가 운영하는 여성 가극단으로 유명한 ‘다카라즈카’는 지역명이기도 하다. 원래는 철도 사업의 일환으로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에 있는 온천 방문객의 확장을 위해 만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공연을 보기 위해 이 도시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다. 온천은 일본 어디에나 있어도 이들의 공연과 문화를 항상 접할 수 있는 곳은 이곳 다카라즈카밖에 없다. 
 

다카라즈카 역에 내리자마자 춤추는 커플 동상이 보인다. 이번 <싱잉 인 더 레인>에 참여하는 세트디자이너가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동상은 마치 이곳에 도착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카라즈카 월드’의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도쿄와 달리 다카라즈카는 마치 <트루먼 쇼>의 세트장 같은 느낌이다. 극단 특유의 유럽풍 건물 양식을 의식해서 만든 주변 맨션들도 다카라즈카 건물인 것처럼 이어져 있다. 깨끗하고 잘 보존된 거리, 1980~90년대의 정서를 보존한 듯 예스러운 보도블록과 기차 플랫폼, 그리고 유독 깨끗해 보이는 사람들. 영락없는 영화 세트장이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실 입구에도 춤을 추는 커플의 동상이 있다. 동상 발밑에는 ‘아름답게 빛나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동판이 놓여져 있다. 다카라즈카의 정신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문구답다. 다카라즈카 가극단 전시관에서는 극단의 역사와 연도별로 활약한 톱 배우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오랜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영상미술을 도입하고 더욱이 외국인 스태프를 고용해 문화 교류를 시도한 다카라즈카는 여전히 젊은 단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정신에 걸맞게 참신한 결과물을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책임감도 커졌다.
 

이 지역은 모든 것이 다카라즈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이날(수요일)이 휴관이어서 그런지 다카라즈카 대극장 주변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문을 연 상점도 없어서 지역 전체가 극장과 같이 휴관에 들어간 상태 같다. 그만큼 다카라즈카 극단이 지역 경제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다카라즈카 문화를 체험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그 옛날에 이런 미래지향적 설계를 한 코바야시 이치조의 안목과 사업 수완이 놀랍다. 그런 도전과 아이디어가 ‘다카라즈카’라는 도시 전체를 하나의 문화로 혁신한 것이다.



다카라즈카 역에 설치된 다카라즈카 가극단을 상징하는 동상

 

매력 넘치는 ‘월조’와 다카라즈카 정신의 정수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또 다른 혁신적인 부분은 가극단 내 대규모의 세트 제작소가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프로덕션에서 자체 제작할 수 있는 환경 덕분에 세트의 색감을 확인한 후 영상 회의와 런스루 참관까지 일사천리로 할 수 있었다. 한국에 도입하고 싶은 인프라다. <싱잉 인 더 레인>은 다카라즈카 5개조 중 월조(月組)가 출연하는 작품이다. 이들의 매력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공연계에 몸담는 동안 배우들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전무하던 내가 어느새 사인을 받으려고 전전긍긍했다는 정도다. 특히 월조 톱스타인 타마키 료의 매력은 군계일학이다. 런스루 후 설레는 마음으로 미리 구입한 사진에 사인을 받았다.
 

특히 타마키 료와 상의해서 작업한 ‘You stepped out of a dream’ 부분은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장면이다. 돈이 캐시와의 재회에서 사랑에 빠져, ‘지금 이 순간이 꿈같아도 꿈에서 깨어난다 해도 사랑에 빠진 마음은 그대로’라는 내용의 곡이다. 돈이 캐시를 생각하며 밤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이 대목은 가사처럼 별빛 밤하늘이 보였으면 해서 돈이 하늘을 쳐다볼 때 영상도 하늘로 이동하는 연출을 제안했다. 이때 가사와 영상의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타마키 료와 상의한 결과 ‘夢から(꿈에서)’에서 밤하늘로 올라가고, ‘(깨어나도)’에서 밤하늘이 보이며 별똥별이 지나가는 것으로 작업이 완성됐다. 이처럼 배우와 협업해서 만들어가는 부분도 즐거움을 더했다. 이들이 연기하는 전막 런스루를 보다 보니 다카라즈카 뮤지컬은 지루할 틈이 없는 쇼가 돋보이는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의 모습도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들었다. 특히 앙상블의 빈틈없는 군무와 돈과 코즈모의 탭댄스는 압권이다. 


다카라즈카 대극장 입구

 

이런 독특한 다카라즈카의 매력 덕분에 팬덤 역시 엄청날 수밖에 없다. 다카라즈카 대극장에 오니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의 뒤로 질서정연하게 줄 서 있는 그룹이 보인다. 성비에서는 여성의 수가 절대적이다. 한국에서는 여성 관객 점유율이 높긴 해도, 장르에 따라 남성 관객들도 보이는데, 이곳은 남성 관객은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다. 또 여기에서는 뮤지컬이 젊은 관객의 전유물도 아니다. 젊은이들과 똑같은 간절한 눈빛으로 줄을 선 중년 여성들을 보면 다카라즈카가 이토록 다양한 이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 회의를 시작할 때 나는 다카라즈카의 이름 정도만 알고 있던 ‘어이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카라즈카처럼 나만의 색깔을 가지고 성장해 가는 좋은 아티스트가 되어야겠단 다짐을 하게 된다. 어떤 작품이든 책임감과 부담감이 크지만, 이번 <싱잉 인 더 레인>은 정말 혼신을 다해서 잘 해내야겠다는 결의를 하게 된다. 영상을 처음 시도하는 연출가와 한국 창작진과 처음 작업하는 다카라즈카에게 한국인의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다카라즈카에 도착한 첫날에는 날씨도 컨디션도 우중충했는데, 떠나는 날 하늘은 맑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 기분이 좋아진다. 건물 밖 테이블에 앉아서 오늘의 일지를 쓰는 순간 작은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잘 봤니?’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그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마지막 날까지도 다카라즈카 세트장 안의 조련된 ‘배우 새’가 등장한 것 같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전시관 풍경

 

인상적인 첫 공연이 남긴 메시지

드디어 공연을 위해 다시 도쿄 아카사카 ACT 극장으로 왔다. 완성된 세트를 보니 예상보다 미술적 효과가 충분히 살아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프로젝터 한 대로 모든 장면을 진행해야 하는 한계가 있어서 걱정했는데, 실제로 투사해 보니 예상보다 잘 보여서 안심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셋업 시스템은 다른 프로덕션과 달리 셋업 2일, 연습 2일, 본 공연으로 짧은 편이다. 아마 효고현 다카라즈카에서 충분히 연습을 하고 오기 때문에 배우에게 주어진 리허설 기간이 짧은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2일 안에 세트에 프로젝션 맵핑을 마쳐야 하는 익숙한 밤샘의 시간이 찾아왔다. 처음 만나는 일본 영상 팀과 3일 동안 얼마나 호흡을 잘 맞추느냐가 관건이다. 비록 언어는 달라도 제작 소스를 무대 위에 100%로 펼쳐내려는 공통의 목표 아래 작업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드레스 리허설과 프레스콜까지 실수 없이 마치고 개막을 기다린다. 
 

드디어 첫 공연 날. 다카라즈카 공연의 첫날과 마지막 날은 대부분 다카라즈카의 오랜 팬들이 많이 관람한다고 한다. 역시나 아침부터 출연자 출입구에는 출근하는 배우들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팬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한 첫 공연은 다행히 무사히 마무리됐다. 특히 가장 오랜 시간 밤을 새우며 공들인 첫 장면의 반응이 좋았다. 공연 5분 전, 서곡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시작되는 인트로 영상은 관객의 시점으로 움직이면서 작품의 세계로 관객들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컨셉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이 장면은 제작 단계부터 배우와 스태프의 호평을 받아 자신 있던 부분이다. 무엇보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이 로비에서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눌 만큼 좋아해 줘서 뿌듯했다.


다카라즈카에서 하이라이트인 커튼콜 퍼레이드 실제 의상과 소품을 착용해 본 필자

사실 이번 공연의 창작진에는 일본에서 오랜 활동을 이어온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해서 그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긴장을 바짝 했다. 이날 인터미션 때 조명디자이너가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고, 세트디자이너와는 향후 협업을 위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나누었다. 이 모든 것들이 내게 큰 가르침이 되었다.

 

공연을 마치고 마련된 자리에서 다카라즈카 배우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다카라즈카 음악 학교 출신의 단원들은 극단에 입단한 후에도 ‘생도’나 ‘학생’으로 불리는데, 눈을 반짝이면서 묻는 모습이 정말 학생 같다. 그 질문은 ‘영상 작업을 할 때 어디서 영감을 얻었나?’였는데, 사실 그 영감의 출처는 다름 아닌 이 학생들이었다. 순수하고 맑은 학생들의 눈빛, 매일 연습 후 촬영한 영상을 모니터링하는 열정, 스태프 역할도 하면서 연습실 청소도 스스로 하는 청결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경쟁 속에서도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 이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고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모습에서 눈물 나게 감동받았다. 뮤지컬은 무대 위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이들의 삶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다카라즈카의 <싱잉 인 더 레인> 

 

이곳에서의 감동을 품은 채 다시 한국 공연 환경을 돌아보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남성 배우 중심의 작품들이 대부분인 까닭에 여성 배우들의 실력이 출중해도 마땅한 배역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남성 역할까지 여성 배우들이 맡아 그들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독자적인 장르를 개척한 다카라즈카 배우들의 개성은 감탄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한국의 뮤지컬 제작 환경도 그 규모와 발전 속도에 걸맞게 좀 더 다양한 접근 방식을 고민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두 함께 꿈을 만들고 그 과정을 통해 관객들의 삶에도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성별과 연령, 국경을 떠나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이번 작업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 그 인류애적인 경험에 잠시나마 함께한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소득이다. 이 체험은 창작자로서, 공연인으로서 내가 걸어가야 하는 방향에 큰 교훈을 준 계기가 되었다.  돈 락우드 역할을 맡은 타마키 료의 커튼콜 인사 메시지를 다시 떠올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험난한 일도 좋은 일도 있지만, 빗속에서도 행복해하는 돈처럼 우리 모두가 희망을 갖고 그 꿈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공연 영상

 

夢から?めても(꿈에서 깨어나도) 

- You stepped out of a dream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8호 2018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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