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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ISSUE] 서커스의 진화, 바넘에서 태양의 서커스까지 [No.179]

글 |박병성 2018-08-23 9,567

 

서커스의 진화, 바넘에서 태양의 서커스까지   

 

올해 국내 공연계는 여느 해보다도 서커스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뉴 서커스를 대표하는 서크 엘루아즈의 <서커폴리스>가 공연했고, 태양의 서커스의 <쿠자>가 국내 첫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지난해 영화 <위대한 쇼맨>으로 소개된 P. T. 바넘의 삶을 다룬 <바넘: 위대한 쇼맨> 역시 공연을 앞두고 있다. 올해 유독 서커스 관련 축제 및 공연들이 많아 주목받고 있지만 이전부터 서커스는 현대 공연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장르이자 표현 양식이었다. <오레르오피스>처럼 서커스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무용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고, 마장마술의 수준을 넘어 말과 인간의 교감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카발리아> 같은 새로운 서커스가 등장했으며, 2013년 리바이벌된 브로드웨이 뮤지컬 <피핀>은 고난이도의 서커스를 표현 양식으로 피핀 왕자의 성장 모험담을 풀어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서커스적인 요소를 반영한 작품들은 무수히 많다. 이미 1920년대에 연출가 메이어홀드는 심리적 사실주의 연극을 완성한 스타니슬랍스키 연극을 넘어서기 위해 서커스를 통해 배우의 감정과 심리 상태를 극대화하여 표현했다. 서커스가 흥행하던 시기든, 아니든 기예와 묘기, 애크러배틱 등 다양한 서커스는 우리와 가깝게 있었으며 그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서커스의 시작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는 로마 지배자들의 통치 원리를 ‘빵과 서커스’라고 비유했다. 식민지에서 수탈한 노예와 물품으로 충분한 경제적 부를 누리던 로마는 시민권자에게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볼 수 있는 티켓과 빵을 무료로 제공했다. ‘빵과 서커스’는 로마의 우민화 정책을 지적하는 표현이었다. 네로나 칼리굴라 등 폭군일수록 그 제공 범위와 양이 많았다고 한다. 로마 시대부터 대중들을 위한 유희 문화로 ‘서커스’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서커스는 원형(Circle)을 뜻하는 라틴어 키르쿠스(Circus)에서 유래했다. 역사상 최초의 서커스는 BC 1세기경 시저 시절 로마의 전차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시에서 열렸다. 최초의 서커스는 마차 경주 같은 비교적 건전한 퍼포먼스도 있었지만, 영화 <글라디에이터>의 검투사와 야수의 혈투처럼 잔혹하고 자극적인 대결이 벌어졌다. 이곳에서 기독교인들이나 범죄자들, 노예 등을 잔인한 방식으로 죽이면서 큰 볼거리로 삼았다. 이외 저글링 같은 묘기와, 이국적인 동물들의 전시 등 이미 로마 시대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서커스의 근간이 마련되었다. 로마가 멸망한 후 서커스를 했던 동물 조련사나 퍼포머 들은 여러 지역을 떠돌며 로마 시대 서커스 형태의 공연을 유지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 서커스는 18세기 영국에서 필립 애슬리(Philip Astely)에 의해 시작되었다. 1768년 퇴역 장교였던 애슬리는 승마학교를 차리고 낮에는 수업을, 밤에는 마장마술을 선보였다. 이것이 인기를 끌자 그는 1770년 런던에 지름 36.5미터의 원형 마당을 갖춘 극장을 만들었다. 이는 말이 최고 속력을 낼 수 있는 최소한의 규모였다. 마장마술이 주요 프로그램이었지만 이후 줄타기 곡예사 등 다양한 묘기들과 맹수들이 출연하는 쇼, 코메디아 델아르떼 식의 광대 쇼가 추가되었다. 이들은 도시를 이동하며 그곳에 마련된 서커스 극장에서 공연했다. 1825년 서커스가 대중들의 인기를 끌자 거대한 천막 극장을 가지고 이동하는 방식의 천막 서커스가 댄 라이스에 의해 시도되었다. 대규모 천막 서커스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지만 또한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서커스가 미국으로 넘어가 1870년대에는 보편화되었다. 이때 활동한 P. T. 바넘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위대한 서커스 흥행사였다. 미국 내 대륙 간 철도 사업이 완성되면서 전 지역을 순회하는 서커스 산업이 더욱 발달하였다.



 

서커스의 제왕 바넘

지난해 영화 <위대한 쇼맨>이 흥행하면서 바넘의 존재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바넘은 그 자체로보다 ‘바넘 효과’라는 말로 더 친숙한 인물이다. ‘바넘 효과’(‘포러 효과’라고도 한다)는 별자리나 혈액형 성격처럼 사람들이 지닌 보편적인 특성을 자신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심리적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바넘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방법이 우리에게 있습니다’란 말을 곧잘 하곤 했는데 바넘 효과는 이 말에서 기인한 것이다.
 

흔히 ‘서커스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바넘은 흥행의 천재로 지금까지도 홍보, 마케팅 영역에서 그가 했던 방식들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지만 그를 향한 시선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쇼를 위한 동물 학대나 장애인들을 전시하여 돈벌이에 이용한 도덕적 문제의 논란을 차치하더라도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망설임 없이 했다. 아니, 그가 이루어낸 성공은 대부분 거짓말에서 시작했다. 그의 첫 작품은 조지 워싱턴의 간호 노예라고 주장했던 161세 조이스 헤스라는 노파였다. 조이스 헤스는 눈이 멀었고 몸이 마비된 상태였다. 사람들은 놀라운 나이와 초대 대통령을 돌본 노예라는 홍보에 그녀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녀의 죽음 이후 부검 결과 조이스 헤스는 채 80세도 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바넘은 자서전에서 헤스를 판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자신의 사기를 떳떳이 밝혔던 전력을 보면 이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일지도 모른다. 조이스 헤스의 관심이 떨어지자 바넘은 그녀가 인조인간이라고 홍보해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30대에 이른 바넘은 ‘존 스커더의 아메리칸 박물관’을 사들여 ‘바넘의 아메리칸 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이고 기상천외한 전시물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코뿔소를 유니콘이라고 속였고, 하마를 성서 속의 괴수라고 했다. 원숭이 상체에 물고기의 하체를 붙여 피지 인어라고 전시하기도 했다. 그는 다양한 기형의 인간들을 데려다 전시했다. 바넘은 남들과 다른 외모로 소외된 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당당히 쇼에 나서도록 유도했다. 그들이 남다른 외형적 특징에 자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쇼를 통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그의 가장 큰 성공 사례는 톰 섬 장군이었다. 그의 실제 이름은 찰스 스트래턴, 바넘에게 발견된 당시 키 64센티미터에 7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매우 작은 체구의 왜소증 아이였다. 스트래턴의 나이는 5세였지만 12세라 속이고 키가 엄지(Thumb)만 하다는 의미에서 톰 섬 장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이할 정도로 작은 체구에 유명인의 흉내를 곧잘 냈던 톰 섬 장군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톰 섬 장군은 유럽 순회공연 때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공연했으며, 그의 결혼식에는 숱한 유명인사들이 참여했다. 링컨 대통령은 톰 섬 부부를 백악관에 초청하기도 했다. 
 

실제와 다를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과장된 바넘의 홍보는 거의 사기 수준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대 선전이나 홍보, 허풍은 관객들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즐거움을 주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며 자신의 방식을 옹호했다.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바넘의 말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속는 줄 알면서도 그가 이번에는 어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속이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넘의 쇼를 찾았다. 


 

바넘은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제니 린드를 미국으로 데려와 자신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으려고 했다. 엄청난 개런티를 지급했지만 천상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자선 활동을 홍보해 제니 린드의 공연은 티켓을 구하지 못할 정도였다. 바넘은 천재적인 사업성을 발휘해 경매로 티켓을 파는 방식을 고안하기도 했다. 제니 린드는 천문학적인 개런티를 받았지만 이를 성공시킨 바넘은 이 공연을 통해 그 이상의 수익을 거둬들였다. 대중예술에서의 스타 캐스팅은 가장 기본적인 마케팅 전략이다. 바넘은 단순히 스타를 캐스팅한 데 그치지 않고 스타의 매력과 가치를 만들어내고 홍보해 수익을 이끌어냈다. 
 

1865년과 1868년 화재로 그의 박물관이 전소된 후 바넘은 본격적으로 서커스 순회공연에 나선다. 1871년 60대에 이른 바넘은 ‘지상 최대의 쇼’를 창단하며 비로소 본격적으로 서커스 사업에 들어선다. 그의 서커스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유명했다. 세 곳의 무대 공간에서 동시에 아찔한 쇼를 선보였다. 1881년 바넘은 또 다른 서커스 사업자인 베일리와 손을 잡았고, 1919년에는 동물 퍼레이드로 유명한 링링 브라더스 서커스와 합작하여 ‘링링 브라더스 앤드 바넘과 베일리의 지상 최대의 서커스’로 확대시켰다. 이들의 공연은 2017년까지 이어졌다. 기 랄리베르테는 어린 시절 이 쇼에서 감명을 받아 태양의 서커스를 기획할 수 있었다.



 

뉴 서커스의 등장과 태양의 서커스

대중들의 인기를 얻었던 서커스는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퇴락의 길을 맞는다. 시민 의식이 향상되면서 동물 학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TV와 라디오, 영화 같은 경쟁 매체의 발달로 대중의 관심이 줄어들었으며, 천막 이동 공연 형식으로 인한 막대한 경비를 감당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규모만 커졌을 뿐 근대 서커스를 확립한 필립 애슬리의 공연 형태에서 조금도 진전하지 못했던 형식은 세계대전 이후 발달한 시민 의식을 따라가지 못했다.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서커스는 프랑스 68혁명의 열기가 남아 있던 1970년대 초 부활의 조짐을 보인다. 거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던 젊은이들이 신체 언어의 의미를 재발견하면서 서커스의 가치가 새롭게 떠올랐다. 새로운 서커스는 1971년 찰리 채플린의 손녀인 빅토리아 채플린과 그녀의 남편인 장 밥티스트 띠에르가 ‘서커스 봉주르’를 창설하면서 본격화된다. 전통적인 서커스와 팝 음악, 초현실적인 연극 방식을 결합한 이들의 공연은 관객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유사한 서커스 단체들이 늘어났다. 1970년대 말 몬테카를로 국제 서커스 페스티벌, 미래의 서커스 페스티벌(Le Festival Mondial du Cirque de Demain)은 서커스의 기술적이고 미학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이 페스티벌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당시 등장한 뉴 서커스는 동물을 더 이상 등장시키지 않고 천막보다는 실내 공연을 선호했다. 서커스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새롭고 현대적인 공연 양식들을 결합해 그들만의 서커스를 만들어갔다. 1980년대 창단한 프랑스의 바로크 서커스단은 프랑스의 누보 서커스를 대표하는 단체이다. 바로크 서커스단의 작품은 서커스와 의미를 결합해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바로크 서커스단의 작품 중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서커스로 만든 <트로이>는 2000년대에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77년 정치적인 목소리를 낸 호주의 서커스단 오즈나, 서정적이고 시적인 서커스를 추구하는 캐나다의 서크 엘루아즈 등이 뉴 서커스를 이끌어가는 단체들이다. 
 

뉴 서커스를 세상에 알리고 상업적인 성공을 달성한 대표적인 극단은 태양의 서커스이다. 1980년대 초반 캐나다의 퀘벡시 근교에서 새로운 형태의 쇼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이 죽마를 타고, 마임이나 저글링 등 거리 공연을 펼쳤다. 기 랄리베르테는 이들을 모아 하이힐 클럽을 결성하고 서커스 축제를 열었다. 1984년 프랑스 탐험가 자끄 카르띠에가 캐나다를 발견한 지 45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축제의 일환으로 기 랄리베르테가 하이힐 클럽을 확대해 ‘태양의 서커스’라는 팀을 결성하고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지금의 단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 
 

태양의 서커스는 전통 서커스의 동물쇼와 원형 극장을 버리고 인간의 몸에 집중해 상상할 수 없는 기술을 선보여 관객들을 꿈의 세계로 인도했다. 기예 중심의 쇼는 한편의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스토리 라인을 갖추고 있으며 그에 맞는 캐릭터를 창조했다. 태양의 서커스의 대표작 <퀴담>은 익명의 남자 퀴담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개인의 고독과 관계의 단절을 그린 작품이다. 라이브 연주와 작품을 위해 새롭게 작곡한 음악은 그것만으로도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전통 서커스가 짜릿한 기술과 놀라운 묘기가 중심이었다면 태양의 서커스는 놀라운 기예는 물론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무대 기술의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위해 각 공연에는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소요되었다. 퍼포머가 물속에서 솟구쳐 오르고 고공 다이빙을 하는 는 5백만 리터의 물을 이용해 수중 장면을 연출하고, 는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회전하는 거대한 무대에서 다채로운 쇼를 펼친다. 이 쇼를 위해 사전 제작비만 각각 1,200억 원과 1,850억 원이 들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태양의 서커스 공연은 현재 21개의 작품이 상설 또는 투어의 형식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태양의 서커스는 사양 산업인 서커스를 새로운 부가가치의 장르로 발전시킨 성공적인 블루오션의 예로 소개되었으나 지속되는 사고와 새로운 흥행작의 부진으로 최근에는 예전만큼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9호 2018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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