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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여름과 연기>, 연기처럼 사라진 그해 여름의 바람 [No.184]

글 |남윤호 배우 사진 |Marc Brenner 2019-01-21 7,622

<여름과 연기>, 연기처럼 사라진 그해 여름의 바람

Summer and Smoke



 

오랜만에 무대에 오른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또다시 그 시즌이 돌아왔다. 어떤 작품에 대해 리뷰를 써야할지 고민하게 되는 시즌 말이다. 나의 생각을 담는 글인 만큼 내가 보고 좋았던 작품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큰데, 최근 웨스트엔드에서는 뮤지컬보다는 연극 쪽에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달에는 최근에 본 공연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여름과 연기>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알메이다 시어터가 제작한 이번 프로덕션 공연을 보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물론 지금껏 리뷰로 썼던 작품들 모두 내 취향이 반영된 선택이긴 했지만, 이번 작품을 고른 데는 더욱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테네시 윌리엄스 희곡은 아마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와  『유리동물원』 , 그리고 『뜨거운 양철 지붕위의 고양이』 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여름과 연기>가 특별한 이유는 학창 시절 UCLA에 들어가 이제 막 연기를 배워가고 있을 때 나를 아주 많이 괴롭게 하고 그만큼 사랑에 빠지게 만든 역할이 <여름과 연기>의 남자 주인공 존 뷰캐넌 주니어이기 때문이다. 당시 학교에서 파트너와 단 둘이 별다른 소품이나 세트 없이 장면을 구성하느라 테이블을 뒤집어 분수를 만들고 벤치를 활용해 배경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이 작품이 알메이다 시어터에 올려진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반가웠다. 게다가 요즘에는 앞서 언급한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작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은 거의 공연되지 않기에 더 반가운 소식이었다. <여름과 연기>를 포함해 <이구아나의 밤>, <로즈 타투>, <지옥의 오르페우스>같은 작품들이 왜 자주 공연되지 않는지 개인적으로는 무척 의아하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이 작품들이 공연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영국이란 나라에서, 특히 알메이다 시어터에서 만드는 <여름과 연기>는 어떤 모습일까 무척 설레고 기대가 컸다. 참고로 <여름과 연기>는 지난해 2월부터 4월까지 알메이다 시어터에서 초연된 후 11월 웨스트엔드의 듀크 오브 요크 시어터로 극장을 옮겨 다시 올라갔다. 나는 두 공연 모두 관람했는데, 이번 글에서는 이번 프로덕션 공연 자체에서 받은 인상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글 속에 담긴 아픔과 낭만

테네시 윌리엄스는 1911년 3월, 미시시피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났다. 정식 이름은 토마스 레니어 윌리엄스 3세였는데, 누나 로즈 이자벨 윌리엄스와 남동생 윌터 데이킨 윌리엄스 사이에 태어난 삼남매 중 둘째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어찌 보면 불행했다. 아버지는 가정 폭력을 일삼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행복하지 않은 결혼에 묶인 그의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테네시 윌리엄스에게 과잉보호라 할 정도로 관심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디프테리아라는 급성 호흡기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급격히 몸이 약해져 아버지가 바랐던 것보다 덜 활동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덟 살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는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에 자리한 신발 회사에 취직하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알코올 중독과 폭력 때문에 윌리엄스 가족은 세인트 루이스 내에서만 여러 번 이사를 다니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가 『유리동물원』 의 배경이 됐다고 전해진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십 대 후반인 1939년부터다. 그는 스무 살 무렵부터 희곡과 소설, 시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극작가로 발돋움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37년 아이오와 대학에서 일 년 동안 들었던 극작 수업이라고 알려진다. 1945년 시카고에서 공연된 <유리동물원>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극작가로서 크게 이름을 알리지 못했지만, <유리동물원>의 성공 이후 1947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까지 큰 성공을 거두며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테네시 윌리엄스는 성공으로 유명세와 부를 얻게 됐음에도 글쓰기를 쉴 줄 모르고 항상 자신이 거둔 성공 이상을 해내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해했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1940년대 후반부터 자신의 연인이자 비서였던 프랭크 멀로(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테네시 윌리엄스는 동성애자였다)와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살았다. 그가 좀 더 폭넓은 관객층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50년에 영화로 개봉한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유리동물원>과 비비언 리, 말런 브랜도 주연의 1951년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일 것이다. 하지만 1963년 프랭크 멀로가 죽은 후 윌리엄스의 작품들은 혹평을 받으며 실패를 거듭한다. “그들은(관객들과 평론가들) 나의 초창기 작품들과 지금의 작품을 비교하지만, 지금 나는 그때와 다르게 글을 쓰고 있다.” 이는 1970년대에 테네시 윌리엄스가 한 말을 따온 것인데, 그의 말처럼 새로운 시도를 인정해 주지 않고 늘 잘하는 것만 하라는 대중의 시선은 그에게 얼마나 슬픈 딜레마였을까. 아마 예술이라는 장르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딜레마일 듯싶다. 
 

지금까지 테네시 윌리엄스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그가 아서 밀러, 유진 오닐과 함께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작가로 꼽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희곡을 읽거나 공연을 보거나 또 공연을 만들 때, 사람들이 작품을 대하는 과정과 방식은 아마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작품을 알아가는 방식이라고 믿는 과정 중 하나는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이다. 작가는 왜 이 작품을 이 시기에 썼는가. 당시 그가 속한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그 일은 작가에게 또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내 경우에는 이런 질문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에 등장하는 콘스탄틴 트레플레프와 보리스 트리고린은 체호프가 자신의 모습을 반영해 만들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 자기의 실제 삶을 투영시키곤 하는데, 테네시 윌리엄스의 경우엔 특히나 해당 사항이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테네시 윌리엄스 연구가인 브렌다 머피는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만약 1937년 이후의 그의 삶이 그의 작품들이 빛을 발하는 무대였다면, 그 이전의 삶은 그의 작품들의 원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들에는 그의 어린 시절과 가족들이 녹아들어 있다. 앞서 잠깐 이야기했던 것처럼 『유리동물원』은 톰 윙필드라는 인물을 빌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것으로, 흔히 테네시 윌리엄스의 ‘메모리 플레이’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 속에서 무엇보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그의 누이인 로즈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 듀보아, 『유리동물원』의 로라 윙필드, 『지난여름 갑자기』의 캐서린 홀리 그리고 『여름과 연기』의 알마 와인밀러까지. 로즈의 존재는 윌리엄스의 작품 속 여러 인물들 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몇몇 평론가들은 테네시 윌리엄스 작품들의 진정한 주제는 ‘근친’이라는 말까지 했다. 윌리엄스는 이 같은 시선에 대해 자신의 회고록에 “내 누이와 나는 아주 가까운 관계였지만, 성욕적인 지식으로 봤을 때 전혀 더럽혀지지 않았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 삶에서 가장 깊은 사랑이었고, 가족으로서 그리고 그 밖에서도 가장 적절한 관계였다”고 밝힌다. 이렇다 보니 그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의 작품 또한 이해하지 못하지 않을까라는 게 나의 짧은 의견이다.



 

욕망에 관한 질문

<여름과 연기>는 1948년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초연되었다. 그러곤 뉴욕으로 옮겨와 공연되었지만, 바로 직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던 테네시 윌리엄스로서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게 된다. 1945년부터 약 3년간 이 작품에 매달렸던 윌리엄스는 성공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초연 직전 공연을 올리지 말라는 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여름과 연기>가 알메이다 프로덕션과 레베카 프렉놀 연출을 만나 신선한 충격에 가까운 새로운 해석으로 재탄생했다. 
 

목사의 딸인 알마 와인밀러와 의사 아들인 존 뷰캐넌 주니어의 관계가 중심이 되는 이 극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면서 서로에게 욕망을 품지만 욕망의 표현이 엇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매력적인 바람둥이에 장난꾸러기인 존은 알마를 향한 자신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목사의 딸로서 정절을 지키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알마 또한 존에게 자신의 몸이 반응하는 것을 보며 그것이 어떤 욕망인지 알지 못한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버려서 둘의 삶이, 아니 어쩌면 알마의 삶이 다른 길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공연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물론 이는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말이다. 
 

<여름과 연기>를 보고 나서 얻은 질문은 ‘인간의 욕망은 무엇일까?’였다. 사람은 각자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또 원하는 바가 다르다. 서로 생각이 다르기에 마찰이 일어나고 그 마찰로 인해 갈등이 생기지만, 시간이 지나 조금 더 현명해졌을 때 과거를 돌이켜보면 해결할 수 있는 갈등이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갈등을 해결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흔히 얘기하듯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다른 모든 부수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욕망에만 충실하면 그 욕망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머리 아픈 질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여름과 연기>를 보면서 품게 된 질문이었다. 이는 어떻게 보면 감정의 마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본능적인 욕망을 갈구하지만 그 본능을 처리할 감정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숫자는 있는데 공식이 없어서 답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스타일리시한 비주얼로 새롭게 탄생한 고전 

매번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알메이다 시어터이기에 기대에 부풀어 객석에 들어서자, 무대 위엔 쓸데없는 케이스를 다 제거해 마치 나체인 것 같은 업라이트 피아노 일곱 대가 무대 뒤쪽을 따라 반원을 그리며 늘어서 있었다. 각 피아노 앞에는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고, 무대 중앙에는 스탠드에 마이크가 꽂혀 있다. 여기서 잠깐 헷갈리면 안 될 것이 이 무대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이 공연되는 무대이다. 윌리엄스는 그야말로 무대 세트와 소품, 심지어 음악이 들어오는 큐까지 대본에 써놓을 정도로 치밀한 작가였다. 예를 들어 『여름과 연기』 첫 지문에는 이렇게 써 있다. “막이 오르기 전, 밴드가 인기 많은 음악들을 연주한다. 장면은 글로리어스 힐에 위치한 공원이다. 시간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년 전, 7월 4일 저녁이다. 공원에는 밴드가 콘서트 중이고 불꽃놀이가 진행 중이다. 장면이 진행되면서 조명은 햇빛에서 황혼으로 바뀐다.” 이 지문 전엔 무대 인테리어와 세팅에 관한 작가 노트가 약 3페이지 정도 쓰여 있다. 그리고 당시의 작가들이 그러했듯 윌리엄스 또한 사실주의에 바탕을 둔 작가였기에, 마음 한쪽엔 내심 그러한 무대를 기대했다. 그런데 모든 예상을 뒤집고 피아노 일곱 대와 마이크 하나가 놓여 있는 빈 무대라니. 물론 이런 빈 무대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예전에 출연했던 <더 정글북>도 다섯 명의 배우가 마이크 두 대를 가지고 무대를 채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대를 테네시 윌리엄스 작품에서 보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증폭되었다.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보고 느꼈던 것들을 모두 다 이야기하긴 힘들 것이다. 무대는 어디까지나 관객들과 배우들이 같이 공유하고 경험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먼저 피아노 활용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일곱 대의 업라이트 피아노는 때로는 악기로서, 때로는 세트로서 활용된다. 배우들이 피아노 위에 앉아 있거나 위를 걸어 다니면서 피아노의 활용도를 높이는 식이다. 피아노 활용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피아노를 건반만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페달 쪽 현을 튕기거나 건반 위쪽 현에 활을 연결해서 소리를 내고, 나무 케이싱 부분을 두드려서 타악기적인 소리를 내는 등 여러 방식으로 피아노를 활용한다. 두 번째는 완전히 오픈된 피아노 안에 설치된 조명이었다. 이 피아노 속 조명이 특히 빛을 발할 때는 극 초반 불꽃놀이 장면이다.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따뜻한 조명은 그저 조명만으로도 이 작품의 제목을 경험하게 해준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극이 진행되는 두 시간 반 동안 몇몇의 앰비언스 노이즈를 제외한 나머지 소리는 배우들이 직접 만들어내거나 마이크를 통해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알마와 존이 전화하는 소리를 마이크의 조작으로 마치 통화음처럼 들리게 한다. 때문에 배우들은 본인이 등장하는 장면이 아닐 때도 거의 퇴장하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목격자 또는 방관자로서 극의 진행을 돕는다. 또한 모든 배우가 맨발로 연기를 펼치면서 개개인이 해줘야 하는 역할을 명확하고 적절하게 소화한다. 팻지 페런, 매튜 니덤, 포브스 매슨 등 배우들은 자신의 역할은 물론 작가와 연출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한 듯 보였고, 한 팀으로서 서로를 밀고 감싸주며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었다. 배우로서 무척 부러운 모습이었다.

 

정답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 

어쩌다 보니 이번 리뷰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이야기가 주가 된 것 같지만, 나는 그를 이해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몫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테네시 윌리엄스와 같이 많은 작업을 했던 연극 연출가이자 영화감독인 엘리야 카잔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의 모든 작품 속엔 그의 모든 인생이 들어 있고, 그의 모든 인생 속엔 그의 모든 작품들이 들어가 있다.” 알메이다 시어터가 보여준 <여름과 연기>는 전통적인 테네시 윌리엄스 스타일의 공연이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지금 현시대의 흐름에 맞게 일구어졌고, 관객들에게 어떤 답을 주기보단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고마운 작품이었다. 당연히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공연은 어디에도 없지 않을까. 어떤 작품을 누군가는 좋아하고, 누군가는 좋아하지 않아서 함께 건강한 토론을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공연의 긍정적인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극 중 호칭인 미스 알마와 자신이 가장 닮았다고 했던 테네시 윌리엄스도 이번 공연을 보면 저 세상에서라도 많은 사람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며 시간이 멈춘 듯 토론할 것 같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4호 2019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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