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쉬워진 비극의 미덕과 한계
비극, 만들어지는 텍스트
보고 또 봐도 새롭다는 말은 사람보다는 이야기에 적합한 수사이다. 사람이 그렇다면 그 새로움은 신선함이기보다는 낯섦일 가능성이 높다. 볼 때마다 낯선 사람, 생각만 해도 어색하지 않나. 볼 때마다 신선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이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도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평범함이야말로 그만의 특별함으로 드러나니 말이다. 사람을 이루는 겹은 페스트리의 결보다 많다. 현실에서는 그 수많은 겹 중의 하나를 ‘그 사람’으로 받아들이지만, 이야기에서는 마치 페스트리를 뜯어 먹듯 그 사람의 겹을 하나하나 들춰내고 들여다본다. 만약 현실에서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라고 한다면 차라리 아무도 안 만나고 사는 게 나을 것이다. 인정하자. 우리는 사람을 알아가는 일에 많이 미숙하다. 그래서 이야기가 있는 것일 게다. 모든 이야기는 사람을 알아가는 안전한 시뮬레이션이다. 고전 비극을 읽는다는 것이 언제나 새로운 해석과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극의 인물들은 생각이 복잡하고 내면이 두터워서 하나의 겹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인간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다. 억울한 건 이것이 자기가 자초한 일이 아니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선한 의도에서 시작한 일이라는 거다. 하지만 의도와 결과는 서로 상관이 없다는 게 인생의 규칙이고, 그 규칙에서 예외는 없다는 게 소위 인간의 운명이다. 이렇듯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처했을 때 그들은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까. 사람의 진짜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 사람의 인생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이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껏 수많은 비극이 수없이 공연되어 왔지만 이름난 작품 중에 똑같은 공연이 단 한 편도 없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비극이란 서로 다른 해석으로 채워지는 인생과 인간에 대한 주석이다. 해석이라는 창작을 통해 지금 여기서 만들어지는 현재 진행형의 텍스트, 그것이 비극이다.
오이디푸스를 해석하다
샘컴퍼니에서 제작한 연극 <오이디푸스>가 선택한 현재 진행형의 코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코러스를 없앤 것이다. 이 극에서 코러스는 단순한 군중으로 축소되어 있고 그들의 말은 코러스장이라는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다. 원래 개념에 가까운 코러스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연출가 서재형은 이미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라는 제목으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해석한 바 있다. 그때 선택한 장르의 이름은 음악극이었다. 음악극에서 주인공은 크게 둘로 나뉜다. 의미의 주인공과 행위의 주인공. 행위의 주인공은 오이디푸스이지만 상황과 해석을 주도하는 의미의 주인공은 코러스이다. 코러스의 말과 행위는, 수평적인 조언자였다가 수직적인 운명이었다가, 다양한 상징으로 변용될 수 있었다. 그에 비하자면 이번 작품은 코러스장을 내세우고 코러스는 없앴다는 점에서 전작과 완전히 다른 접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현재형 코드는 서사의 방향이 오이디푸스라는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오이디푸스는 ‘오만한 자’가 아닌 ‘더러운 놈’으로 지칭되는데, 이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의 의미가 싸워야 할 운명에서 피할 수 없는 원죄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결함은 오만함이 아니라 죄책감이니, 라이오스를 죽인 이유도 그가 ‘콤플렉스’(더러운 놈!)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가뭄과 재앙을 멈춰달라는 테베의 시민들에게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호소하는 오이디푸스의 ‘인간적인’ 모습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그의 행위가 아니라 내면이다. 그는 재앙의 원인을 찾는 영웅적인 행위를 할 것이지만 내면은 회피하고 싶은 마음과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이 빚어낸 오이디푸스의 새로운 얼굴은 신화의 영웅보다는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에 가깝다.
설명과 사유로 가득한 코러스의 시적 대사를 모두 없애고 오이디푸스 한 사람만 내세웠을 때 가장 오래된 고전 비극은 한결 쉬운 텍스트로 탈바꿈한다. 오이디푸스 개인이 겪는 사건 위주로 다듬어진 이야기는 여러모로 간결하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속도감이다. 90분 남짓한 시간으로 압축된 이 방대한 비극은 시작하자마자 일사천리로 내달리는데, 바로바로 이어지는 사건의 전개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이 간결함은 재미있게도 각색된 텍스트보다도 소포클레스의 원작에 주목하게 만든다. 오이디푸스의 결백을 증명할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이 파멸의 증거임이 드러나는 반전의 짜릿함!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찬한 극적 구조를 잘 정리한 것만으로도 <오이디푸스>는, 샘컴퍼니의 전작 <리차드 3세>가 ‘리차드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것처럼, 오이디푸스를 대중화시키기에 적합해 보인다.
멜로드라마가 된 비극
하지만 이런 현재 진행형의 코드가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의미를 확장시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례로 코러스를 없앤 과감한 시도는 좋지만, 코러스장의 극적 역할이 모호한 것만큼 그 과감함의 극적 이유는 불분명하다. 물론 실용적인 이유는 충분히 알겠다. 황정민이라는 원톱 배우를 내세운 만큼 행위의 주인공과 의미의 주인공이 나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을 거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온전히 황정민, 아니 오이디푸스여야 하니 말이다.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되짚어가는 동기 역시 비극의 방향과는 각도가 다르다. 이 작품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주인공이 답하는 내용은 전통적인 비극의 주인공과는 차이가 있다. 비극의 주인공은 무모할 만큼 진실을 파고들다가 신탁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했을 때 지금까지 확신했던 자기 자신이 무너짐을 깨닫는다. 오만한 자의 오만이 꺾이면서 파멸을 통한 자기 발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러운 자라는 죄책의 심증에서 출발한 주인공이 마지막에 확인하는 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태어나지 말아야 할 자식을 낳은 자라는 사실의 물증이다. 더러운 자라고 생각했는데 더러운 놈이 맞는 거다. 자기에 대한 의심과 불안이 명증한 실체로 확증되는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비극의 주인공은 자기 부정으로 답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에게서 보게 되는 것은 자기 동일성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의 오이디푸스는 비극보다는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에 가깝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파멸을 자초한다? 천만에. 오이디푸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임과 고통을 짊어지는 사람이다. 이오카스테를 향해 ‘엄마!’라고 부를 때 그는 영락없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다. 그가 자기의 눈을 찌르는 행위는 사랑하는 이들, 특히 가족에 대한 자기의 죄책을 심판하는 것으로 의미를 바꿔버린다. 작품에서는 이 심판의 본질을 오이디푸스의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타자를 위해 자기를 소멸시키는 오이디푸스, 그를 설명할 한 단어는 ‘자아’가 아니라 ‘사랑’인 것이다. 멜로드라마의 완벽한 주인공이다.
하지만 멜로드라마로서 이 작품이 갖는 재미에는 한계가 있다. 멜로드라마의 맛이 살아나려면 <리차드 3세>처럼 악마의 사랑과 복수같이 짜릿한 재료를 갖춘 원작이 적당하겠건만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자기와의 대결이니 그만큼의 재미를 일궈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무난하고 깔끔한 무대 연출 덕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 다행이다. 그중에 몇 가지 의아한 게 있긴 하다. 이 작품에서 ‘길을 떠난다’는 것은 인물을 설명하는 키워드이다. 그런데 이러한 키워드를 공간으로 설명하는 상상력을 보기 어려운 거다. 그 깊은 CJ 토월극장의 공간을 놔두고 길 떠나는 오이디푸스의 발걸음을 제자리걷기로 표현한 것은 사정이 있었다 치자. 하지만 눈을 찌르고 추방의 길로 나서는 오이디푸스가 무대에서 내려와 고작 객석 5열을 돌고 들어가는 모양새는, 그의 흰 내복 같은 의상과 더불어 과할 만큼 끌어올린 에너지가 무색하게 희화적이다. 이 작품의 의미를 압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두 장면이 갑자기 허무해져버렸다. 서재형은 대본의 의미를 무대 언어로 번역하는 데 뛰어난 작업자라서 그가 만든 작품은 극작이 제시하는 의미보다 시각적 언어로 확장된 의미가 더욱 명확했더랬다. 심지어 배우보다도 연출이 먼저 눈에 띄었건만 이번 작업은 다소 의외다.
비극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비극답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그것이 해석을 하는 사람의 특권이자 책임이며, 거기에서 인간을 통찰하는 깊은 시선은 벼려질 테니 말이다. 서재형 연출과 한아름 작가에게 이 정도는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6호 2019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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