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컨버트>,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편 51:3)
무대 공연은 그것이 어떠한 장르가 됐건 관람하는 관객에게, 무대 위의 퍼포머에게, 짧게는 40분에서 길게는 4시간에 달하는 시간의 경험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행위자인 퍼포머는 매일 반복되는 공연이어도 그 반복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관객은 그러한 공연에서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뼈저리게 무언가를 느끼기도 한다. 물론 그 무언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확실한 것은 100명이면 100명 모두가 같은 무대를 다르게 바라볼 것이라는 점이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졌기에 지구 반대편에서도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의 공연 실황을 스크린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영국 내셔널 시어터의 공연 실황 상영 프로그램인 NT Live 같은 시스템이 너무나도 좋은 생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건이 안 돼서, 시간이 안 돼서 놓쳐버린 공연을 스크린으로나마 만날 수 있다면 이런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으로 정말 그 공연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극장의 환경과 배우들의 호흡을 전부 온전히 느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논쟁은 요즘 한창 이슈화되고 있는 ‘넷플릭스를 과연 영화 콘텐츠라 볼 수 있는가’라는 논쟁과 비슷할 것 같다. 개인적으론, 무대 공연은 직접 보고 경험해야 하며 스크린을 통해 공연을 봤다고 해서 그 극장의 시스템과 여러 환경을 모두 안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과 의견이 내가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서 치기 어린 마음에 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마음껏 비판해도 좋다. 그런 비판을 하지 말아달라고 할 권리가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이번 달에 소개할 작품과 연관이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필자로서 배우로서 그리고 공연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 번쯤은 하고 싶었다. 이번 달에 소개할 <더 컨버트>라는 작품이 나에게 보여준 무대는 내가 진정으로 이 공연을 경험하게 해준 공연이었고, 단순히 요소요소가 좋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피가 자기에게도 돌아가리라 (에스겔 33:5)
이번 공연은 여러모로 나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스토리만으로도 많은 생각이 들게 했지만, 나아가서는 나 개인의 삶에도 고민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처음 이 작품의 소식을 접하게 된 건, 2018년 말 즈음 영 빅의 새로운 시즌 발표가 있었을 때였다. 몇 달 전 내가 썼던 <십이야>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영 빅의 새로운 예술감독인 콰메 퀘이-아마가 가진 영 빅을 향한 비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라인업이었다. <십이야>가 막을 내리고 12월 초에 막을 올린 공연이 바로 <더 컨버트>였기에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작가인 다나이 구리라와 주인공인 ‘예키사이/에스터’ 역을 맡은 레티샤 라이트 때문이다. 이들이 누구인지 좀 더 쉽게 얘기하자면, 영화 <블랙 팬서>에서 블랙 팬서의 오른팔이자 호위 무사인 오코예와 블랙 팬서의 여동생 슈리이다(다나이 구리라는 미드 <워킹 데드>에서 미숀 역할로 출연 중이기도 하다). 이들 둘의 이름을 봤을 때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하다면 핫한 마블의 영화에 출연해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며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그녀들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다나이 구리라가 배우가 아닌 작가로서 작품을 썼고, 무대에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던 레티샤 라이트가 출연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이 더 컸다. 공연을 본 뒤에 나의 무지함에 땅을 쳤지만 말이다.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번 더 얘기하자면 난 나의 글로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 글이 건강하고 좋은 질문을 던졌으면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4:17)
‘The Convert’. 전환시키다. 개종하다. 세단에서 오픈카로 변환되는 차종을 컨버터블이라고 하듯이 ‘컨버트’는 A에서 B로 변환되는 것을 일컫는 단어이다. 흔히들 영어권에선 종교를 개종하였을 때 이 단어를 쓰곤 한다. <더 컨버트>라는 작품 역시 종교적인 내용을 꽤나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종교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간단히 줄거리를 먼저 얘기하자면, 배경은 1896년 영국이 아프리카에 위치한 짐바브웨로 진출했을 무렵이다. 식민지 개념이 아닌 영국 무역 회사들이 남아공을 중심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하며 서양의 문화가 서서히 아프리카로 퍼지기 시작할 때쯤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주인공인 예키사이는 돈을 받고 자신을 노인에게 결혼시키려는 삼촌에게서 도망쳐 숙모가 하녀로 일하고 있는 목사의 집에 정착을 하게 된다. 짐바브웨의 원주민인 쇼나 부족 사람인 예키사이는 주인인 목사 칠포드에게 에스터라는 영어 이름을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되어 간다. 이런 과정에 그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토착 문화와 외부 문화의 갈등이 이 작품의 주된 줄거리이다. 역사적으로도 1896년은 짐바브웨에서 혁명이 일어난 해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은데벨레 족과 쇼나 부족이 영국 무역 회사에 맞서 일어난 혁명으로 세컨드 마타벨레 전쟁 또는 퍼스트 치뮤렌가라고 불린다. <더 컨버트>는 직접적으로 이 혁명을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영리하게 그 당시에 서서히 일어나고 있던 문화적 충돌과 종교적 변화, 그리고 그 안에서의 개개인의 고뇌에 대해 이야기한다. 역사상 많은 나라들이 그러했듯 타지의 문화가 토착 문화를 집어삼키기 시작할 때는 언어와 종교가 먼저 개입되기 마련이다. 원주민들이 쓰던 언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신앙 또는 믿음은 잘못된 방향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가르치고 자신들의 믿음으로 개종시킨다. 여기서 이 작품이 개인적으로 좋았던 점은 이러한 행위들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단순하게 관객들에게 영국은 나빴고 짐바브웨 원주민들은 불쌍하다는 점만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부분들이 코믹하게 보였다. 연극은 관객을 선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관객이 극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어떻게 이 극의 일부분으로 끌고 들어오려 했는지였다. 객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극장 안은 낮게 깔려 있는 새소리로 가득하다. 무대는 4면으로 구성된 사각형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마치 링 안에서 벌어지는 복싱 경기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공연 시작 전에는 샤막으로 이루어진 프레임이 벽처럼 4면을 이루고 있다가 공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벽들은 천장으로 올라간다. 마치 제4의 벽이 눈앞에서 허물어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남겨진 것은 정사각형의 단 위에 가구들과 배우들뿐이다. 그러곤 객석 뒤쪽에서 불에 타는 듯한 이글거리는 석양 같은 조명이 비치며, 강렬한 타악 소리와 함께 토착민의 복장을 한 두 명의 배우가 2층 발코니 양쪽 끝에서 서로를 향해 쇼나어로 말을 주고받는다. 여기에 이 작품이 지닌 또 하나의 장점인 연출과 작가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 공연은 7명의 흑인 배우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아프리카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로 대사를 하며 때때로 쇼나어로 연기한다. 기본적으로 장면 장면의 속도가 빠른 데다가 강한 억양이 섞이다 보니 알아듣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내 뒤에 앉았던 노년의 영국 관객분은 대본을 사야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작품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작품이 좋으니 더 세세하게 대사를 알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영어와 닮은 소리라곤 전혀 없는 쇼나어로 대사를 할 때조차 관객의 이해를 돕는 자막을 넣지 않았다. 마치 관객들이 못 알아듣는 것 또한 작품의 의도인 듯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도 정확해서 말을 몰라도 상황이 이해돼 심지어 웃기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세련된 유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억지로 웃기려는 장치가 아닌 상황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유머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극은 전개될수록 불편한 진실들을 관객들에게 넌지시 던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더욱 영리하게 단 한 명의 백인 캐릭터도 보여주지 않으며, 역동적이라 느낄 수 있는 사건들은 모두 무대 밖에서 일어난다. 극 중 인물들도 관객들도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 후의 상황과 감정들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그럼으로써 이야기는 선악 구도가 아닌, 인종의 문제가 아닌, 개개인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존재 이유와 믿음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믿음에 대한 값이 있다면 언제 그 값을 감당하기 힘들어지는가를 주된 질문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이런 면들, 즉, 무대 밖에서 이루어지는 주요 사건들, 주요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 등은 때로 체호프의 작품들을 떠올리게도 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 8:7)
극은 3막으로 구성되어 있고 굉장히 빠른 템포로 진행된다. 3막 모두 흑인 목사이자 영국의 교육을 받은 칠포드의 집이 배경이다. 등퇴장로는 무대가 4면인 만큼 4군데를 사용하는데, 극이 진행될수록 그중 주로 사용되는 두 곳 중 하나는 집 밖으로, 다른 하나는 집 안 침실 쪽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체 런닝타임인 2시간 40분 동안 10분의 인터미션이 두 번 있고 각 막 사이에 시간의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에스타의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처음 시작할 때 원주민의 복장을 하고 원주민의 말을 하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의라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을 신기해하는 아이 같던 에스타가 점차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고 성경을 외우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양의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모습 변화가 명확하니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이해가 쉽다. 1막과 2막의 대부분은 칠포드 목사의 믿음과 영국을 향한 마음에 대한 서사와 원주민 예키사이에서 점점 완벽한 가톨릭 신자 에스타로 변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2막 후반부에 다다라서 생각지도 못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부분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쇼나 부족의 혁명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주인공인 에스타의 가족들 중 삼촌과 사촌 동생은 여전히 원주민으로서 살아가고 숙모만이 칠포드 목사의 하녀로 살아가고 있다. 칠포드 목사에겐 같이 영국 교육을 받은 찬슬러라는 바람둥이 친구가 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쇼나 부족이 영국인들에 대항하며 그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찬슬러 또한 배신자로 낙인찍혀 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피를 흘리며 칠포드 목사 집으로 찾아온다. 그런데 찬슬러는 자신을 치료해 주던 에스타를 겁탈하려다 그 순간 들이닥친 에스타의 삼촌과 사촌 동생에게 발각돼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다. 에스타는 사촌 동생의 죄를 덮기 위해 도둑이 든 것처럼 현장을 꾸미고 찬슬러가 도둑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위장한다. 3막의 시작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상태이다. 찬슬러의 약혼녀였던 프루던스는 담배와 술에 절어 폐인처럼 살아가고, 칠포드 목사는 찬슬러를 죽인 범인을 찾으려 노력한다. 에스타는 모든 사실을 숨기고 죄책감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중 에스타의 사촌 동생이 범인으로 밝혀지고 그를 죽이려 드는 칠포드 목사에게 에스타와 프루던스는 자비를 빌며 벌을 주려거든 그가 속해 있는 쇼나 부족의 법대로 처벌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며 부탁한다. 그렇게 부족에게 재판을 받으러 간 그들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살인이라는 죄명으로 사촌 동생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아주 강하게 나를 움직였던 것은 관객은 이 재판과 부족에서 일어난 일들을 직접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에 의해서 칠포드 목사가 전해 듣는 방식으로 듣게 된다는 점이다. 어쩌면 가장 극적이고 무자비할 수 있을 만한 장면을 일부러 보여주지 않는 것에서 체호프의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두 번째로는 극이 진행되는 동안 원주민들을 몰아내는 영국인들을 일종의 빌런(악역)들로 생각해 오다가 이 장면에서 나의 믿음이 깊은 딜레마에 빠져버린 것이다. 누구의 믿음이 옳고 그른지, 어떤 이데올로기가 옳고 그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하나의 문화를 잠식해 자신들의 문화로 탈바꿈시키면서도 문명화된 의식으로, 논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선조 때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땅과 문화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통탄하며 자신들의 것을 지키려 애쓰지만 현대 문명과는 거리가 멀어 논리적인 법도도 없이 그저 죽음으로 무자비하게 다스리는 사람들이 옳은 것인가.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딜레마를 겪으며 어쩔 줄 몰라하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라 극의 주인공 에스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스타는 자신이 입던 원주민의 복장을 하고 등장하여 칠포드 목사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묻는다. 자신은 어느 곳에 용서를 빌 수 있느냐고. 자신을 회개시켜 달라고.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모두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문화와 믿음 그 너머에 존재하는 이유와 인간의 본능, 죄책감과 용서에 관한, 그저 그런 어느 아프리카 부족의 역사극이 아닌 인간의 본질에 더 다가가는 작품이었기에 감동이 지나간 자리에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운이 남는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박국 2:14)
참 부러웠다.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아프리카계 영국인, 미국인 아티스트들이 협업하여 그들의 역사와 이야기를 그들끼리만 아니라 무대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 나 또한 관객의 한 명으로서, 무대에 서는 배우들 중 한 명으로서 그들이 배우로서, 작가로서, 연출로서 전해 준 경험과 이야기 속 인물들이 전해 준 그들의 문화와 역사로 큰 깨우침을 얻었다. 그저 너무도 좋은 경험이었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런던에서 이런 공연들을 만날 때마다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르침과 격려도 얻는다. 앞으로 더 많은 놀라움을 안겨줄 공연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6호 2019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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