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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위대하고 불경했던 어느 천문학자의 삶, 갈릴레오 갈릴레이 [No.187]

글 |김주연 공연 칼럼니스트 2019-04-16 5,379

위대하고 불경했던 어느 천문학자의 삶, 갈릴레오 갈릴레이  

 

올 상반기 공연계가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야기로 분주하다. 뮤지컬 <최후진술>과 <시데레우스>, 그리고 연극 <갈릴레이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봄 시즌에만 그를 주인공으로 한 공연 세 편이 연이어 무대에 오른다. 올해 탄생 455주년을 맞은 이 오래된 천문학자의 무엇이 이토록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일까. 


 

‘갈릴레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종교 재판소를 나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리는 한 늙은 천문학자의 모습이지만, 사실 갈릴레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도 스스로 자신의 학설을 부인하고 죽을 때까지 침묵을 지켜야 했던 위대한 과학자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든 안 했든 간에 지구는 여전히 돌고 있듯, 갈릴레이가 자신의 학설을 부정했다 할지라도 그가 천문학과 물리학의 지형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별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의 창시자  

밤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빛나는 갈릴레이의 업적 중에서도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망원경을 사용해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 기록함으로써 ‘관측 천문학’의 장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 등의 선배 천문학자들이 직관과 추론으로 천체를 이해하고자 한 것과 달리, 갈릴레이는 직접 개량한 망원경으로 매일 밤 꾸준히 별들을 관측했고, 자신의 눈을 통해 확인한 결과를 토대로 수많은 가설들을 증명해 냈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이탈리아로 처음 망원경이 전파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으로 남의 집 안뜰이나 멀리 있던 적의 동태를 살피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눈이 향하는 곳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렌즈를 수십 배 개량한 뒤, 곧바로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고 이로써 수천 년간 정체되어 있던 천문학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달의 표면과 분화구, 은하수가 수많은 별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목성을 회전하는 4개의 위성, 금성의 공전 궤도와 태양의 흑점 등 그가 망원경을 이용해 밝혀낸 것들은 그 자체로 상상을 뛰어넘는 발견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천문학과 세계관을 완전히 뒤엎을 만한 획기적인 자료들이었다. 그는 이렇듯 눈으로 직접 보고 관찰한 자료와 계산을 토대로,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냈다. 즉, 이전까지 가설과 추측만 난무하던 천문학의 논제들을 구체적인 데이터로 논증함으로써, 갈릴레이는 ‘천동설 vs. 지동설’ 논란을 종식시킴과 동시에 천문학을 철학이 아닌 과학의 영역으로 확고히 옮겨놓은 것이다.  

 

진리에 대한 열망과 그 대가 

코페르니쿠스가 가설을 세우고, 갈릴레이가 증명해낸 지동설은 과학적으로는 2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오류를 바로잡는 위대한 발견이었지만,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종교 세력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자 뻔뻔스러운 도전이었다. 갈릴레이의 주장은 일찍이 조물주가 모든 별과 우주를 자신의 계획대로 창조하고, 그중 가장 사랑하는 피조물인 인간(그리고 그들이 사는 지구)을 중심에 두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구는 무한한 우주의 한 부분일 뿐이며 모든 별들은 각각 궤도와 속도에 따라 움직이면서 각자의 운행을 이어가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그때까지 교회가 정해 놓은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절대 순종하던 민중들의 의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신과 교회가 아니라 어쩌면 제 자신이 인생의 중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민중들에게 빠르게 퍼져 나갔고, 실제로 1632년 사육제 기간 북부 이탈리아 지방에서는 천문학과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카니발과 가장행렬의 주제로 채택되기도 했다. 더 이상 이 사태를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로마 교황청과 종교 재판소는 결국 이듬해인 1633년, 갈릴레이를 저 악명 높은 종교재판에 회부하기에 이른다. 오랜 친구였던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배려로 끔찍한 고문이나 사형 판결을 받지 않았지만, 갈릴레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지금까지 주장한 학설을 모두 거짓이라 부인하고, 이와 관련한 모든 연구를 중단한다고 맹세해야 했다. 

저 옛날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인간은 언제나 그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어려서부터 호기심 많고 앎에 대한 갈망이 남달랐던 갈릴레이는 평생 우주의 진리를 알고자 했고, 결국 그 진실을 아는 대가로 종교 재판이란 혹독한 시험을 치러야 했다. 또, 낮이나 밤이나 망원경을 끼고 산 덕분에 말년에 완전히 시력을 잃은 갈릴레이의 모습은 두 눈을 잃고 먼 길을 떠나는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모습과도 겹쳐진다. 진실을 아는 대가로 고통을 짊어진 인간이라는 점에서, 갈릴레이는 오이디푸스의 또 다른 후예일지도 모르겠다. 

 

때론 곡선도 최단 거리일 수 있다  

종교 재판 이후의 갈릴레이의 삶에 대해,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의 인생의 클라이맥스는 언제나 종교 재판, 그리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에 멈춰져 있다. 하지만 재판에서 가택연금을 선고받고 피렌체의 옛집에 돌아온 뒤에도 갈릴레이는 죽을 때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또 다른 과학의 영역에서 눈부신 성과들을 이루어냈다. 

시력을 완전히 잃은 데다 교회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더 이상 천문학 연구를 계속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딸과 몇몇 제자들의 도움으로 진자와 물체의 운동에 대한 실험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연구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과학의 새로운 두 분야: 기계역학과 낙하법칙에 대한 담론』을 완성했고, 신교국인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이 책은 이후 근대 물리학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만약 갈릴레이가 선배 과학자인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화형대에서조차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는 더욱 드라마틱하고 비극적인 위인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영웅적 죽음 대신에 비굴하더라도 끈질긴 삶을 택했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말년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과학자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물론 아무리 그의 학문적 성과가 뛰어나다 한들, 그가 자기 입으로 자신의 주장을 부인하고 권력 앞에 비겁하게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과학의 순교자로 남지 않은 것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전에 갈릴레이 스스로도 말했던 것처럼 장애물이 있을 때,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직선이 아닌 곡선을 택한 덕분에, 천문학과 물리학을 비롯해 근대 과학의 많은 부분이 그로부터 크나큰 은혜를 입고 발전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7호 2019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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