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남자>, 일본에 오른 한국 뮤지컬
빠르게 일본 시장에 진출한 대작
<웃는 남자>가 일본에서 막을 올렸다. 도쿄 닛세이극장에서 29회 일정으로 시작된 투어는 나고야 미소노좌, 토야마 나이카와 문화홀, 오사카 우메다예술극장과 후쿠오카 기타큐슈 소레이유홀 등 모두 다섯 개 지역을 순회하며 공연을 이어간다. 대한민국에서 글로벌 제작진이 만든 뮤지컬 작품이 초연 이듬해에 일본을 순회한다는 기록 자체가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을 다시 정립하는 것 같아 뿌듯하다. 대한민국의 뮤지컬 산업은 이렇게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뮤지컬 시장은 우리와 꽤나 비슷하면서 동시에 무척 다르다. 유사성은 아마도 한국 뮤지컬 산업이 일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이유일 테고(국내의 원로급 인사나 경륜 깊은 공연 예술계 관계자 또는 배우들 중에는 일본에서 수학하거나 인적 교류를 경험한 이들이 적지 않다), 차이점은 문화나 역사 인식에서 비롯한 이질성이 반영된 결과라 유추해 볼 수 있다. 같은 독일어권이지만 오스트리아 빈의 뮤지컬과 독일 함부르크의 그것이 다르고, 같은 영어권이지만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의 객석 반응이 다른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 시장과 일본 시장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 <웃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일단 일본어 버전은 우리말 초연과 유사점이 상당히 많다. 기본적인 극의 골격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오리지널 제작진인 오필영 무대디자이너가 만든 초연의 비주얼을 일본 역시 약 50퍼센트가량 그대로 활용해 이야기를 꾸민 탓이다. 때문에 서울에서 관극을 했던 관객이라면 다소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자동화 장치를 대거 활용해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물 흐르듯 전개되던 우리말 무대가 일본 공연에서는 많은 부분이 간소화됐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본에서는 초연이다 보니 장기 공연보다 단기 상연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서 제작사인 토호 주식회사가 점진적인 시도를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초연이 성과를 거둬 향후 재연에서 장기 상연이 시도된다면 일본 관객들을 배려하기 위해 더 꼼꼼한 무대 적용과 그에 대한 관객들의 만족도도 높아지지 않을까.
서정성이 강조된 엔딩
일본 배우들의 연기와 우리말 버전의 싱크로율은 비교적 높은 편이다. 특히, 주인공인 그윈플렌으로 등장하는 스타 배우 우라이 켄지의 보이스 컬러는 꽤나 날카롭고 예민하게 표현되며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목소리의 느낌 자체만 놓고 보자면 박효신과도 어느 정도 오버랩되는 묘한 동질성이 느껴진다. 도쿄 개막 당시 국내 언론에서 우라이 켄지가 2017년 제67회 예술선장문부과학대신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받았다는 점을 많이 언급해 혹자는 그를 신인 배우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1981년생으로 삼십 대 후반인 그는 텔레비전과 무대를 오가며 큰 인기를 누리는 일본의 대표적인 스타 연기자이다. 2000년에 데뷔해 올해로 20년 경력을 이어가고 있는 그는 <앨저넌에게 꽃을>과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의 열연으로 2009년 키쿠타 카주오상을 받은 바 있다.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익숙한 역할로는 우리말로도 제작됐던 뮤지컬 <데스노트>의 라이토나 <두 도시 이야기>의 찰스, 프랑스 뮤지컬의 일본어 프로덕션이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벤볼리오 그리고 <황태자 루돌프>나 <엘리자벳>의 루돌프 등이 있다. <웃는 남자>에서도 특유의 섬세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세련된 이미지를 잘 담아내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국내에서는 양준모와 정성화가 맡았던 인정 많은 우르수스로는 오스트리아산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토드(일본 버전의 토드는 관록의 배우가 맡아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로, 또 토호의 빅 히트작이었던 일본어 버전의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 역으로 출연했던 일본의 국민 배우 야마구치 유이치로가 나온다. 가창력에서는 정성화나 양준모를 따라잡을 수 없지만, 특유의 온화함과 부드러운 연기는 극의 중심을 잘 잡아주는 진중한 힘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객석의 온도는 한일 간의 큰 차이점 중 하나다. 일본 관객들은 비교적 차분하다. 열정적으로 기립 박수를 열렬히 보내는 국내 관객들과 비교해 보면, 객석의 에너지가 꽤나 이질적이다. 그래도 작품에 대한 집중도나 몰입도, 이야기와 배우들에게 보내는 지지와 환호는 마니아스런 경우가 많다. 극이 끝나면 배우 출입구에 줄을 길게 서서 선물을 건네거나 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의 관객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나 배우들에게 얼마나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다가서려 하는지 짐작케 한다.
일본 공연의 연출은 우에다 잇코가 맡았다. 일본어 버전 <금발이 너무해>의 연출을 맡았던 그는 한국 초연을 만들었던 로버트 요한슨과는 조금 결이 다른 해석을 덧붙였다. ‘죽음의 미학’을 잘 다루는 일본 특유의 심미적 시각이 데아의 죽음을 맞는 그윈플렌의 처연함에 담겨 서정성이 더욱 강조된 엔딩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여러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미국, 일본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작품이 완성됐다”고 소감을 밝힌 이면에는 일본어 버전이 한국 초연보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일본 특유의 엔딩에서의 변화가 어느 정도 반영됐을 것으로 보인다. 주말을 이용해 방문한 오사카 우메다예술극장 메인홀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곳저곳에서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치는 일본 관객들을 적잖이 발견할 수 있었다.
쉬지 않고 이어지던 박수갈채는 결국 주연 배우들을 세 차례나 다시 무대로 불러내고서야 마무리됐다. 특히, 박자에 맞춰 극장을 크게 울렸던 박수갈채는 그윈플렌과 데아 그리고 어린 그윈플렌을 연기했던 아역 배우가 함께 손잡고 무대에 등장하자 절정에 달했다. 1층 객석은 전원 기립 박수가 펼쳐졌고, 배우들은 함박웃음으로 답례했다. <웃는 남자>가 성공적으로 일본에 안착되는 모습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과거 뮤지컬 산업의 한류가 단지 ‘우리 것’을 ‘남’에게 파는 것에 집중했다면, <웃는 남자>의 사례는 이제 ‘공연 한류의 2.0시대’라는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남겼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적이고, 실험적이며, 합작의 형태에 가까운 제작이 세계 시장을 겨냥한 우리 뮤지컬 산업의 또 다른 도전이 될 수 있을까. 귀추가 주목되는 2019년 초여름의 진기한 공연가 풍경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9호 2019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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