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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인간은 무엇까지 될 수 있을까 [No.191]

글 |김영주 공연 칼럼니스트 2019-08-09 4,108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인간은 무엇까지 될 수 있을까

 

12월 31일 밤, ‘백만인이여, 서로 포옹하라!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그대의 신비로운 힘으로 다시 결합시키는도다’라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장엄한 절정이 시작될 때, 로마의 판테온에 들어서서 돔 중앙의 작은 창공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는 빛을 볼 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충만해지는 것을 느낀다. 한낱 피조물인 인간이 한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증거 앞에서 생기는 경외감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문학에서 그 감정의 극한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걸 썼을까 싶은 경탄은 평범한 독자들과 세상을 바꾼 걸출한 천재들에게서―예를 들면 니체와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한목소리로 쏟아져 나왔다.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이지도 않았고 가장 치밀한 구성으로 빈틈없이 짜인 것도 아니고 문학사를 바꾼 놀라운 형식을 선보인 것도 아닌 이 산문 문학의 무엇이 인류에게 그토록 특별했을까. 


 

감성과 이성, 그리고 신성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 명성만큼이나 진입 장벽이 높은 러시아 문학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의 이름에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가는데, 하나의 이름에 몇 가지의 애칭이 기본으로 붙는 러시아 특유의 작명과 호칭법(가령 알렉세이라면 알료샤, 료샤, 알료셴카, 알료쉬카라는 식으로)을 극복하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는 고백이 넘쳐난다. 또한 거칠고 거침없는 도스토옙스키의 장광설에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이들도 많다. 주인공들은 시종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품고 사람의 혼을 빼놓는 모놀로그를 통해 각자의 사상과 신념을 역설한다. 또한 카라마조프가의 네 형제들뿐만 아니라 그들 곁을 스쳐 지나는 주변인들까지 어지간한 단편 소설 한 편만큼의 구구절절한 서사가 있다. 글자 수를 따져서 원고료를 받아 빚을 갚았던 도스토옙스키의 궁핍한 시절의 유산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는 끝도 없이 장대한 동토의 대륙을 상상케 하는 러시아 문학의 정수가 탄생했다. 


 

내용 자체는 현대의 어느 막장 드라마 못지않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드라마로 방송할 수 없을 수준의 자극적인 설정으로 가득하다. 모든 이야기는 가문의 꼭짓점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 사람의 탈을 쓴 탐욕의 화신인 이 남자는 세 여인에게서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형편없는 남편에게 질려 다른 남자와 달아난 첫 아내에게서 태어난 장남은 야성적인 성격의 퇴역 대위이다. 그는 아버지의 여자를 향한 열정에 사로잡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한 성품의 약혼녀를 배신한다. 두 번째로 맞은 아내는 두 아들을 낳은 후 신경쇠약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소생인 차남은 얼음장 같은 냉철함으로 세상에 대한 분노를 숨기고 있는 대학생인데 버림받은 형의 약혼녀와 사랑에 빠진다. 삶의 모든 것을 냉소하며 신을 회의하고 또 증오하는 그는 자신보다 몇 달 먼저 태어나서 가문의 하인으로 살고 있는 아버지의 사생아에게 꾸준히 금지된 사상을 흘린다. 

사생아는 자신이 생부에게 강간당한 떠돌이 백치 여인에게서 태어났음을 알고 있다. 자기 어머니가 그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렀고 아버지는 죄업에 대한 어떤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비열한 성품의 간질병 환자인 그는 차남의 사상을 자신의 복수에 유리한 방향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더러운 죄의 소굴에서 홀로 투명하게 빛나는 막내, 알료샤는 수도사로서 자신의 죄 많은 가족들에게 신의 자비와 사랑이 닿기를 갈구하는 순결한 영혼이다. 각각 감성과 이성, 그리고 신성을 상징하는 세 형제와 사생아의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것에서 이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인간에 대한 끝없는 질문

아버지와 아들이, 형제가 한 여성을 놓고 갈등하고, 자식들은 하나같이 부친 살해를 꿈꾸는 이 막장 드라마는 시종일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신과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안고 그 해답을 찾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 같은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장남 드미트리는 양심과 선의를 가진 인간이었으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린 끝에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한 벌을 감내하는 고난을 선택함으로써 구원받고자 한다. 둘째 아들 이반은 카인과 데미안에 매료되었던 이들이 사랑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캐릭터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그를 능가하는 극도의 지성이 등장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지만, 작품 막바지의 파국 이후 그는 바로 그 지성을 잃게 된다. 신의 아들 알료샤는 도스토옙스키가 애초에 구상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영원히 미완에 그친 2부에서 황제에게 저항하는 무장 단체의 테러리스트가 된다. 

끈적끈적한 피의 죄 위에서 완성된 이 강렬한 삶의 아이러니는 고대 비극처럼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생의 모든 것에 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과 답변이 끝없는 모놀로그로 이어지는 엄청난 분량의 장편 소설을 연극으로, 또 뮤지컬과 무용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순수와 숭고함이 아니라 죄와 악을 통해 구원을 찾아가는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관점, 통속 소설에서 차용한 흥미진진한 갈등 구조와 전개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매혹적인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대작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 수많은 시도 중 단 한 작품을 손꼽자면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보리스 에이프만의 드라마 발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언급하고 싶다. 고도로 훈련받은 아름다운 신체가 펼쳐내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구별해 낼 수 없이 뒤엉킨 콜라주 속에서도 전달하려고 하는 질문이 흔들림 없이 명확했다. 

세계 문학사의 절정이라는 이반 카라마조프의 ‘대심문관 편’ 마지막 장면을 돌이켜보자. 인류를 사랑하기에 그들에서 자유의지를 뺏겠다는 이단심문관의 절규 앞에서 예수는 말없이 입맞춤을 남긴다. 그리고 또 사랑하는 형 이반 카라마조프의 절망을 목도하고 마치 예수를 모방하듯 입 맞추는 알료샤에게서 우리는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자 했던 하나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처음부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대사나 노래가 아니라 몸으로 가장 충실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1호 2019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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