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쿨 오브 락>, 극장에서 놀고 싶은 자 다 내게로 오라!
즐거움(樂)의 학교
유명해도 재미없는 작품이 있지만 재미있다는 입소문에 재미없는 작품은 드물다. <스쿨 오브 락>이 그렇다.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공연의 월드 투어, 잭 블랙 주연의 원작 영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음악, 휘황찬란한 이름들이 즐비한 이 작품에 관객의 평가는 간단하고도 명쾌하다. 이게 뮤지컬 보는 재미지! 이 말 한마디면 끝난 거 아닌가. ‘뮤지컬은 재미있다’라는 말은 일반 명제이지만 정작 ‘재미있는 뮤지컬’은 흔하지 않으니, 극장 밖을 나서면서 재미있다는 말이 쉽게 나오는 공연은 이미 세간의 정평을 얻은 거나 마찬가지다. 재미의 높낮이는 있을지언정 재미의 여부는 의심받지 않는 공연으로 이 작품은 이미 자기의 이름값을 증명한 셈이다.
재미는 뮤지컬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핵심적인 가치이다. 예술의 미덕을 사유와 깊이에서 찾는 이들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뮤지컬은 예술이 아닌 오락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심각함에 매몰되어야만 예술이라면 굳이 예술일 필요가 없다는 게 뮤지컬의 자존감이다. 애초에 뮤지컬은 가벼움의 문화로부터 출발한 장르인바, 관객을 관념으로 조이기보다는 감각으로 풀어헤치는 유쾌한 장르이다. 세월을 축적하면서 이야기와 만나 진지해지기도 하고, 서사극과 만나 실험의 옷을 입기도 했지만, 뮤지컬의 본질이 가벼움에 있다는 토대는 변한 적이 없다. 인간을 비관하기보다는 낙관하며, 불안한 현재에서 그래도 나은 미래를 꿈꾸면서, 어떠한 곤경 앞에서도 희망의 확답을 놓지 않는 이 집요하고 끈질긴 긍정이야말로 재미의 근간이요 가벼움의 가치일 것이다. 예술의 목적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이 가벼움만큼 예술적인 것은 없다. 뮤지컬은 진지한 것을 가볍게 이야기할 줄 아는 예술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스쿨 오브 락>은 가장 뮤지컬다운 뮤지컬이다. 드라마의 바탕 위에 쇼의 재미를 세우되 교훈과 감동을 붙잡는 데 온전히 집중하는, 뮤지컬의 공식에 충실한 전형으로 손색이 없다. 일단 이야기부터 그렇다. 교사로 위장 취업한 록커가 아이들에게 록을 가르치며 함께 변화해 나가는 이야기는 언뜻 단순한 줄거리이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여러 갈래의 대중 서사가 영리하게 섞여 있음을 금세 알 수 있다. 선생과 학생의 성장 드라마가 있고, 아이와 부모의 가족 드라마가 있으며, 록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는 음악 드라마가 있다. 대중 장르에서 활용도가 높은 서사들을 모두 모아놓은 격이니, 이런 서사가 확보하는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이다. 서사의 저변이 넓어지면 그만큼 다양한 관객층을 포괄할 수 있는바, 흥행에 성공한 뮤지컬에서 일관되게 볼 수 있는 특성이기도 하다.
서사의 준비가 끝났으면 진짜 재미는 이제부터다. 넓게 퍼져 있는 서사에 초점을 부여하는 것은 단연 라이브 밴드 연주인데, 연주자가 누구인지가 재미의 핵심이다. 밴드의 연주자는 바로 아이들이다. 갓 10대가 된 어린 배우들이 제 몸의 절반만한 악기를 들고 능숙하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일단은 신기하고 그다음엔 신이 난다. 연주의 완성도는 차치하더라도 현장의 역동성이 더욱 살아나는 것은 어린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의외성 때문이다. 이들의 연주는 듣는 것이기 이전에 시선을 잡아끄는 완벽한 볼거리이니, 이들의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순간만큼은 음악의 주인공이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아니라 온전히 아이들이다. 거기에 주인공 듀이 역을 맡은 코너 존 글룰리의 경이로운 에너지까지(대사와 노래의 단 한 마디도 일정 데시벨 이하로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두 시간 반 내내 지치지 않는다!) 더해지면 공연의 볼륨은 최대치로 올라간다. 록을 좇던 루저의 코미디가 펼쳐지다가 갑자기 ‘죽은 시인의 사회’ B급 버전의 학원물이 되고, 그러다가 돌연 세대 초월의 록 콘서트로 변모하는 이 종횡무진의 뮤지컬이라니. 제목 그대로이다. 스쿨 오브 樂.
가벼움의 깊이
<스쿨 오브 락>의 미덕은 가벼워졌을 때 그 안에서 깊이가 싹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가벼움의 키워드는 희극적 선량함이다. 희극은 인간을 어리석은 존재로 볼지언정 악한 존재로 보지 않으니, 뮤지컬의 전통적 세계관에는 인간을 선량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깔려 있다. 이런 시선이 서사적 완성도와 반비례하는 게 좀 아쉽긴 하다. 이 작품 역시 영화를 공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인물들의 인과적 설득력은 헐거워졌으니 말이다. 영화는 드라마가 강하기에 주인공 듀이의 개연성이 보이지만 공연에서는 설정의 골격만 남기는 바람에 듀이가 민폐 백수가 돼버리는 식이다. 관객이 듀이에게 온전히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한데, 그나마 듀이의 캐릭터를 설득시키는 힘은 대부분 배우의 개인 역량에서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이 인물이 돋보이는 것은 희극적 선량함 때문이다. 그가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전형적인 어른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모자라고 무지하다는 데 있다. 겉으로 볼 때 듀이는 아이들에게 록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사실 듀이에게는 록의 영역에서 가르칠 만한 내용이 없다. 연주자로서는 밴드에서 내쫓겼고 스피릿으로는 ‘권력에 저항하기’는커녕 친구에게 기생하는 신세니, 그가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란 사실 말밖에 없는 거다. 록을 좋아하는 어른이 록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자기도 못하는 것을 가르치는 모양새다. 말 그대로 ‘무지한 스승’의 등장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선생이어야 하는 어른과 학생이어야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록이라는 수평의 언어가 생겨나는 거다. 록을 연주하며 그들의 능력은 평등해지고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그들은 교실이라는 틀에서 해방된다. 마지막 연주에서 선생 듀이의 노래가 학생 잭의 노래로 바뀌는 것은 수평적인 관계의 흐름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 관계 위에서 아이들은, 록커가 되는 게 아니라, 나는 록이 좋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한 편의 소동극에서 교육 혁명급의 비전을 보게 될 줄이야.
아이들을 무대 위의 주인공으로 세우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눈으로 보는 아이들은 귀엽지만 정작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다. 아이들은 ‘권리 없는 자’의 대명사이다. 뮤지컬의 주인공인 아이들을 떠올려 보시라. 애니와 올리버, 빌리와 마틸다. 이들은 고아이거나 방치되거나 학대받는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순간 무대는 더 이상 이들을 ‘아이 취급’할 수가 없다. 어린 ‘사람들’은 이제 무대 위 귀여운 소품의 자리에서 뛰쳐나와, 빌리는 춤을 추고 마틸다는 책을 읽으며 잭은 기타를 치고 프레디는 드럼을 두드린다. 아이들과 말과 춤과 음악이 놀라운 것은 단지 그들이 직접 퍼포머가 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눈여겨보지 않은 그들을 보게 되고 들어보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통쾌하다. 이 어린 사람들의 이야기와 퍼포먼스를 극의 중심에 놓을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은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의 전통이 만들어낸 저력일 것이다. 뮤지컬은 동물과 아이의 이야기를 진지한 퍼포먼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장르임을 <스쿨 오브 락>이 또 한 번 보여준 셈이다.
이 작품이 증명하는 뮤지컬의 가치는 분명하다. 감정의 장르로서 뮤지컬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웃음과 유쾌함이 넘쳐날 때라는 사실. 뮤지컬은 감정의 장르임이 맞지만 그중에서 가장 축소된 감정이 바로 웃음과 재미이다. 창작뮤지컬에서도 상처와 우울은 넘쳐나지만 재미와 유쾌함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던가. 심리적인 내면에 치중하느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면에 웃음이 파고들 틈은 없다. 웃음의 자리는 심리가 아니라 사회이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사람과 세상의 사이에, 웃음의 자리가 있다. 그래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이야기에 사람살이가 있고 세상살이가 있는 거다. 뮤지컬이 멋스러운 예술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웃음과 유쾌함으로 사람과 세상을 담아내는 법에 이 장르는 제법 익숙하기 때문이다. 재미있고 흥겨워지는 만큼 뮤지컬은 성숙하고 깊어질 거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극장을 채우는 웃음은 더욱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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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1호 2019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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