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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로맨티스트 그 이상의 비범함 [No.191]

글 |김주연 공연 칼럼니스트 2019-08-31 4,551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로맨티스트, 그 이상의 비범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라노라는 이름은 낭만적인 사랑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실존 인물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17세기 프랑스의 자유로운 사상을 대표하는 문필가이자, 사이언스 픽션의 효시로 여겨지는 과학소설과 희곡을 남긴 작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재기 발랄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현실 풍자로 무장한 시라노의 펜 끝은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아 왔다.  


오랜 세월 동안 시라노라는 이름은 낭만적인 사랑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왔는데, 이는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인기에 힘입은 바 크다. 커다랗고 못생긴 코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차마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그녀가 사랑하는 젊고 잘생긴(그러나 말재주가 빵점인) 청년에게 자신의 시와 편지를 대신 읽게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애틋한 사랑의 전설처럼 회자되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에드몽 로스탕의 원작 희곡은 연극으로, 또 영화로 여러 차례 제작되었으며 특히 1990년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가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에게 시라노의 낭만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와 김현석 감독의 영화 <시라노 연애 조작단>, 뮤지컬 <시라노> 등 원작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작품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시라노는 말 그대로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에드몽 로스탕이 극화한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 시라노는 이러한 로맨스의 틀로만 바라보기엔 아까울 만큼, 비범하고 흥미진진한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다 간 풍운아 

1619년 파리의 한 법관 가문에서 태어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군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왕실 근위대에 근무하며 여러 차례 전쟁에도 참여한 시라노는 용감한 성품과 뛰어난 검술로 명성을 쌓았으나, 1640년 아라스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제대한 뒤 본격적으로 자유분방한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부르주아 출신으로 아버지의 사망 이후 많은 유산을 물려받기도 했지만, 그는 술과 도박, 그리고 크고 작은 결투에 휘말리면서 이를 모두 탕진했고, 나중에는 귀족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철학자, 극작가, 배우 등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며 문인 검객이자 자유사상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시라노는 1655년 머리에 대들보가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로 겨우 3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수많은 결투와 날카로운 풍자시로 워낙 적이 많았던 터라 여전히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생전에 시라노는 1645년 풍자적 희곡 『젠체하는 선생』을 시작으로, 두 개의 소설을 엮은 『다른 세상』과 비극 『아그리핀의 죽음』, 그리고 산문적 재능을 과시한 『서간집』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후세의 관심을 집중시킨 작품은 작가의 사후 출간된 『다른 세상』이라 할 수 있다.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이란 서로 다른 두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다른 세상』은 시라노의 해박한 과학 지식과 상상력, 그리고 날카로운 현실 비판의 시선이 돋보이는 소설로, 사이언스 픽션(SF)의 효시라고도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이후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주를 향해 뻗은 상상력 

『다른 세상』은 주인공 ‘나’가 우연한 기회에 달나라와 해나라로 여행을 가게 되면서 시작된다. 소설을 읽다보면 시라노의 해박한 과학 지식과 시대를 앞서는 상상력이 금세 눈에 들어오는데, 일단 그는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 등 앞 세대 혹은 동시대 천문학자들이 내세운 획기적인 가설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이야기의 바탕에 깔고 있다. 갈릴레이의 종교재판과 지동설 부인이 불과 15년 전에 일어났던 일임을 생각한다면, 시라노가 당대의 지식인 중에서도 상당히 깨어 있고 과학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인 ‘달나라 여행’에서 주인공은 ‘달이 지구와 똑같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비웃는 친구들을 설득하기 위해 달나라로 가는 기계를 만들던 중, 우연히 화약이 폭발하면서 생긴 불꽃의 추진력 덕분에 구름을 뚫고 달에 착륙하게 된다. 여기서 달은 아담과 이브가 쫓겨난 에덴동산 같은 곳으로, 그는 이곳에서 선지자 엘리야와 소크라테스의 영혼, 여왕과 악마 등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 토론을 벌인다. 철학적인 토론 곳곳에서 작가 시라노의 재치와 위트가 빛을 발하는데, 특히 달나라에서는 코가 클수록 존경을 받고 코가 납작한 사람은 벌을 받으며, 돈 대신 시(詩)가 화폐로 쓰인다는 설정은 매우 시라노다운 유머로 웃음을 자아낸다. 

두 번째 이야기 ‘해나라 여행’은 달나라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공이 마귀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책에서 각 행성의 움직임을 구분하기 위해 그려놓은 동심원을 보고 악마를 불러내는 마법의 서클이라며 소리를 지르는데, 시라노는 이런 장면을 통해 당대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종교재판의 맹목성을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재판에서 간신히 풀려난 주인공은 다시 비행 기계를 만들어 이번에는 해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이곳은 새들이 지배하는 공화국으로 여기서 그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새들 앞에 소환되어 재판을 받기에 이른다. 온갖 변론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죽음의 계곡으로 끌려가지만, 예전에 그가 새장 문을 열어 자유롭게 날려주었던 앵무새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후 주인공은 데카르트를 비롯한 철학자들과 긴 토론을 벌이지만, 아쉽게도 시라노의 ‘해나라 여행’은 토론 도중 미완으로 끝나고 만다. 

 

‘다른 세상’을 통해 바라본 현실 풍자 

시라노의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은 얼핏 보면 허풍스런 상상력으로 쓰인 공상소설 같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풍자소설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이 달나라와 해나라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들과 벌이는 논쟁과 토론은 인간 세상의 부조리와 해악에 대한 고발이자 비판을 담고 있으며, 현실 세계와 상반되는 가치를 신봉하는 그곳 사람들을 통해 현실의 가치가 과연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지 의문을 던진다. 

결국 작가 시라노는 달나라와 해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실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17세기 프랑스의 모습을 비추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이야기를 묶으며 ‘다른 세상’이란 제목을 지은 것 또한 매우 아이러니한데, 결국 작가는 달나라든 해나라든 근본적으로는 이곳과 다르지 않은 ‘같은 세상’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 속 시라노의 비판이 워낙 노골적이고 신랄했던 터라 두 작품 모두 작가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에야 세상에 소개될 수 있었다. 

평생 돈 한 푼, 방 한 칸도 없이 떠돌아다니고,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마음조차 못 전했으며, 작품 또한 발표하지 못한 채 불의의 사고로 죽었으니 현실적으로 볼 때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삶은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명의 괴한과 싸워 물리친 검객으로서나 한 여인을 위해 평생 지순한 사랑을 간직한 남자로서나, 우주여행이란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가로서나 그의 비범한 삶과 정신은 당대에나 지금이나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며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1호 2019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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