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다른 것
뮤지컬 배우와 연예인, 그 경계를 나누는 것이 이제는 촌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이지훈은 확실히 뮤지컬 배우의 영역에 들어선 배우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시작을 함께한 사람이 왕용범 연출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토요일 오후,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 지훈 씨가 <알타보이즈>를 하고 나서 <햄릿>으로 다시 뮤지컬을 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햄릿>은 어떻게 참여하게 된 거였나요? 제작사의 콜을 받아서 비공개 오디션을 봤던 거예요?
이지훈 : (비명을 지르며) 아, 오디션! 오디션은 안 봤어요. <햄릿>에 참여하게 된 경위가 연출님이 제가 방송에 나와서 노래하는 걸 보셨대요. 그걸 보시곤 연락을 주신 거죠.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왕용범 : 스튜디오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한마디로 말해 왕자님 같았어요. 햄릿이 덴마크의 왕자잖아요. 왕자님처럼 보이는 배우가 고통스러워하면 매력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바로 기획사에 전화해서 이지훈 좀 캐스팅해 달라고 말했어요. 아쉬웠던 건 서로 바빠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거죠.
연예 활동으로 바빴음에도 <햄릿>에 출연하기로 한 이유는 뭐예요? 본격적으로 뮤지컬을 시작하기 전이니 프로덕션이나 연출가에 대한 신뢰가 있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요.
이지훈 : 그때는 어렸고, 혼자서 작품을 결정하기 어려웠을 때라 제안을 받고 나서 회사에서 회의를 했어요. 이 작품을 하고 나면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질 것이다, 그게 첫 번째 이유였어요. 햄릿은 남자 배우가 멋있게 보일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다른 것보다도 절 먼저 찾아주셨잖아요. 그게 결정적이었죠.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연출님이 지훈 씨를 뮤지컬계로 이끌어주신 거나 다름없네요.
왕용범 : 아니, 지훈이가 나를 끌었죠. 캐스팅으로 고민하고 있던 시점에 지훈이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진짜 인상적이었어요.
이지훈 : 그리고 연예 활동과 병행하느라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맞지만, 사실은 그때 제 그릇이 그렇게 크지 못했어요. 그간 체계적인 시스템 안에서 활동하면서 스스로를 가꾸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던 거죠. 뮤지컬계는 제 자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환경이었고 <햄릿>을 경험하면서 제가 좀 성장했다는 생각을 해요.
연출님은 말하자면 이지훈이라는 사람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가지고 계셨던 거잖아요. 실제로 만나보니 어땠나요?
왕용범 : 사실 그전엔 지훈이에 대해 잘 몰랐어요. 지훈이 전성기가 제가 TV를 안 보던 시절이었거든요. 한창 연극하던 때라 TV 본다는 걸 죄악시 여겼으니까요. 물론 지금은 안 그래요. 꼭꼭 챙겨 보죠. (일동 웃음) 제가 연극하던 때 후회 하는 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삼촌이(왕종근 아나운서) 방송국에 들어와서 PD 하라고 했을 때 “전 예술 할 겁니다” 하고 거부했던 거고, 다른 하나는 이태리에 계시던 고모가 유학을 오라고 했을 때 또 예술 할 거라고 안 갔던 거예요. 연극할 때는 너무 힘들어서 후회 많이 했죠. PD 할걸, 오페라 할걸. 지금은 내가 고집대로 살아오면서 내 꿈을 이뤄가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지만요.
지훈 씨도 후회되는 게 있나요?
이지훈 : 20대에 일을 열심히 하긴 했지만, 내가 가진 걸 소비하면서 살았지 새로운 걸 습득하고 충전하면서 지내진 못했어요. 그때로 돌아가면 나 자신을 가꾸면서 열심히 살고 싶어요. 이건 누구나 다 하는 후회겠죠. 그리고 하나 더 있다면, 글쎄요. 연애를 많이 못해본 거? 사람들은 제가 연애를 많이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20대를 통틀어 만난 친구가 세 명이에요. 첫사랑에 실패한 뒤에는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해봤어요. 내가 원하는 사랑을 못해봤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그런데 30대가 되니까 이성에게 쉽게 다가서질 못하겠더라고요.
왕용범 :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해. 저는 뮤지컬 연출을 안 하려고 하던 때 (서)지영 씨를 만나서 다시 하게 됐거든요. 부부가 함께 작업하면 불편하지 않느냐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제 아내하고 같이 작업하는 게 행복해서 뮤지컬을 하는 거예요. <햄릿> 이후에 네가 어떤 작품을 했지?
이지훈 : <내 마음의 풍금> 하고, <젊음의 행진>, <형제는 용감했다>도 하고, 또 <쓰릴 미>…
왕용범 : <쓰릴 미> 공연을 보고 <잭 더 리퍼>에 캐스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햄릿> 이후에 작품으로 연이 안 닿아서 그렇지 지훈이는 제가 ‘카카오톡’하는 유일한 배우예요. (일동 웃음) 전 배우들하고 거리를 두는 편이거든요. 사람인지라 친해지게 되면 아무래도 객관적으로 보기도 어렵고, 내가 뭔가를 해줘야 할 것 같아 부담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지훈이는 그런 부담이 없어요. 이 친구는 친하게 지내도 나에게 뭘 바라진 않겠구나 싶은 거죠. 워낙 다 가졌잖아요. 아, 다 가진 것처럼 보이잖아요. (일동 웃음) 하여간 <잭 더 리퍼> 때 다른 어떤 다니엘보다도 지훈이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기대만큼 잘해줬어요. 칭찬에 인색한 안재욱 선배가 지훈이는 다니엘로 인정한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이지훈 : 제가 잘해서라기보다 본인이 앤더슨을 맡아야 할 때가 돼서 그러신 거죠. (일동 웃음) 제가 연출님께 감사한 건 누구나 쉽게 생각하지 않는 캐스팅을 해주신다는 점이에요. 연예인은 이미지로 먹고 사는 직업이고, 그 이미지가 고정돼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의 기존 이미지를 살릴 수 있는 안전한 길을 택하지, 모험하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런데 연출님은 저의 여러 가지 면을 보신 다음 새로운 역할들을 제안해 주시니 감사하죠. 지금껏 해보지 못했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저도 몰랐던 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서 또 다른 가능성들이 열리는 거죠. 실제로 <잭 더 리퍼> 이후에 참 많은 작품 제의가 들어왔어요.
지훈 씨는 한 배역에 캐스트가 많은 건 신경 쓰이지 않아요?
이지훈 : 아뇨, 처음부터 신경 쓰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감사했죠. 저는 시작하는 입장이었으니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다른 배우들이 하는 걸 보면서 도움이 많이 됐죠. 같은 역을 연기해도 배우마다 해석이나 표현 방법이 조금씩 다르잖아요. 각각의 장점을 보고 배웠던 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이제는 후배들이 제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하기도 하고, 요즘엔 그런 재미가 있더라고요.
왕용범 : 이 친구 별명이 조교예요. 자기 연습 스케줄이 없어도 연습실에 불쑥불쑥 찾아와요. 그게 지훈이가 보고 배운 것들이기도 한데, 선배들에게 보고 배웠던 걸 이제는 후배에게 베푸는 단계에 온 것 같아요. 이번에 처음 뮤지컬을 하게 된 (허)영생이나 (오)원빈이가 아주 의욕적으로 연습하고 있거든요. 지훈이 본인이 조교를 자청하면서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죠.
그런데 연습을 많이 한다고 해도 공연 횟수가 적으면 연기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나요? 무대에서의 호흡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잖아요.
이지훈 : 공연 횟수가 적으면 그만큼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더 긴장하고 집중하게 되는 면이 있어요.
왕용범 :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이 배우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한 역에 여러 명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죠. 트리플 캐스트를 넘어가면 우리끼리는 그냥 많다고 표현해요. 많은 캐스팅이라고. (일동 웃음) 사실 배우라면 불평을 가질 만한 부분이죠. 그런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지훈이를 보면 저 친구가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래서 이 친구의 앞으로가 참 기대되고요. 지금 당장 지훈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해내도록 주문하는 이유도 그래서예요.
이지훈 : 연출님이 잔소리를 많이 해주시는데 안 되는 저는 정말 짜증나요! (웃음) 이게 왜 안 될까? 진짜 괴롭죠. 그런데 어느 순간 표현해냈을 때, 연출님 특유의 표정이 있어요. 순진한 아이처럼 얼굴이 환해지시죠. (웃음) 제 자신에 대해서 잘 아는 것 중 하나가 저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면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지금은 연출님을 만나서 차근차근 밟아가는 단계에 있는 거죠.
연출님 작품에는 같은 배우들이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게 하시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왕용범 : 저는 무대 위에서 에너지는 호흡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뮤지컬계에서 극단 시스템이 사라진 지 오래잖아요. 그런데 전 극단 시스템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 오랜 시간 함께하면 서로가 서로를 잘 아니까 배려해 줄 수 있고, 또 채찍질해 줄 수도 있죠. 저희 팀에서 신성우 선배는 무게 있는 형님, 유준상 선배는 군기 반장이에요. 준상 선배가 분장실에 얼음 사다 놓고 지각하는 배우들 얼음찜질을 시키고 그러죠. 메인 배우들이 다 연예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훌륭한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이돌 스타가 들어와도 저희는 연예인 대우를 안 해요. 그런 선배들하고 후배들 궁합이 참 좋고요.
이지훈 : 연출님이 인복이 좋은 거죠. 사실 한창때는 건방질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 온 친구들은 자신의 위치나 인기를 뽐내지 않고 참 열심히 해요. 그러니까 형들도 예뻐해 주고, 그게 무대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거예요. 배우끼리 좋은 관계가 유지되지 않으면 무대에서 어수룩해 보여요. 그건 관객에게도 금방 들키죠.
왕용범 : 배우를 직접 만난다는 것, 그게 공연의 큰 매력이잖아요. 스크린을 통해 배우를 보는 것과는 다르죠. 그래서 티켓 값이 비싼 거라 생각해요. 미녀를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는 직접 만나면 찻값이라도 더 들 듯이요. (일동 웃음) 그래서 무대에 있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관객들도 기분 좋은 만남을 경험했다고 생각할 테고요. 아, 그래서 전 비극은 커튼콜에서 꼭 화해를 시켜요. 우리가 오늘 본 건 슬픈 이야기였지만 배우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서요. 그래서 <햄릿>이나 <잭 더 리퍼>는 커튼콜을 하나의 쇼로 만들어서 관객을 위로해주고, <삼총사>처럼 밝은 작품은 간단히 인사만 하고 끝내죠. 그리고 이건 지훈이한테 처음 하는 말인데, 지훈이를 보면 상처 많은 왕자님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개인사에 대해서는 궁금하지도 않고,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지만, 제가 받는 느낌이 그래요.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속마음을 안 드러내고 항상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잖아요. 지훈이도 그래요. 며칠 전인가 토크쇼에 나와서도 본인은 자기가 힘들었던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건데 진짜로 털어놓지 못하더라고요. 그런데 때로는 자신의 아픔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알아야지 정돈된 모습만 보여 주려고 하면 그게 연기하는 데 제약이 되기도 하거든요. 좀 더 마음을 여는 연기자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연출님이 보시기에 배우 이지훈의 가장 큰 매력은 뭔가요?
왕용범 : 잘생긴 거? (웃음) 그게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죠.
연출님 말씀에 지훈 씨도 동의해요?
이지훈 : 네, 종종 듣는 이야기예요. 나이가 서른셋인데 여전히 소년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제가 제일 많이 듣는 소리 중 하나가 남자 냄새가 덜 난다는 말이거든요.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요. 어떻게 하면 소년 같은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을까,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성격은 안 그런데 말이죠.
이미지와는 다르게 성격은 남성적이라면서요. 싸움도 잘하고. 그런데 싸움을 얼마나 잘했던 거예요! (웃음)
이지훈 : 다 옛날 일이죠. 그런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영웅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딱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저도 많이 싸우고 다녔던 건 아니었는데, 한번 잘 싸운 게 소문이 아주 잘 나서 (일동 웃음) 그 뒤로는 싸울 일이 없었어요.
그렇죠, 뭐든 처음 한번이 중요한 거죠. 지훈 씨는 남자 학교 다녔어요? 꽃다운 외모에 싸움까지 잘한다, 여학교 친구들에게 인기가 대단했겠어요.
이지훈 : 여자애들이 항상 학교 앞에서 기다리긴 했죠.
겉으로는 의식 안 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무진장 의식하고 있고?
이지훈 : 아이, 그럼요. 하하하.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도 잘생겼거든요. 잘생긴 애들이 또 운동도 잘해! 아, 너무 제 자랑을 했네요.
왕용범 : (이지훈에게) 지금 목소리가 좋아. 방송에서도 지금 같은 톤으로 말했으면 좋겠어.
이지훈 : 이야기할 때 목소리? 꾸밈이 없으니까. 이것도 항상 듣는 이야기인데, 카메라만 돌아가면 나도 모르게 (방긋 웃으면서) ‘와아~’ 이렇게 변해버려요. 이젠 습관처럼 굳어져서 바꾸기가 쉽지 않네요. 사실 아까 연출님이 제가 마음을 잘 안 드러낸다고 말씀하셨던 거, 인정해요. 어려서부터 활동하면서 사람에 데기도 했고 그런 여러 아픔을 겪으면서 저 스스로 마음을 닫는 경향이 있어요. 그게 연기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고요. 누군가도 ‘너는 너 자신을 가둬두고 그걸 못 넘어서고 있는데 그걸 깨고 한 단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어요. 맞는 말이죠. 공연하면서 오늘은 진짜 뭔가 한 것 같다고 느끼는 날은 제 자신을 내려놓고 연기했을 때예요. 아직까지는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데 그건 저만의 숙제겠죠.
왕용범 : 제가 일흔 즈음이 되면 하고 싶은 뮤지컬이 있어요. 『노인과 바다』를 뮤지컬로 만들고 싶거든요. 바다를 배경으로 배 위에 노인 한 명 있는 뮤지컬이죠. 지훈이도 <노인과 바다>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됐으면, 끝까지 배우로 늙어갔으면 좋겠어요. 참, 제가 12월 즈음에 이성준 음악 감독하고 같이 작업실을 오픈할 계획이거든요. 그때 오셔서 취재해 주세요.
이지훈 : 우리가 꾸밀 걸 사가지고 가야 하는 거지? 하하.
왕용범 : 어, 텔레비전 이런 거 사와야 해. (일동 웃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8호 2011년 1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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