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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이갈리아의 딸들> 김수정, 나와 우리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작업 [No.193]

글 |김주연 연극 평론가 사진 |표기식 2019-10-28 4,163

<이갈리아의 딸들> 김수정

나와 우리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작업  

 

우리 안의 전체주의와 혐오를 거대한 스케일로 마주하게 만든 <파란나라>, 우리의 일상이 포르노가 되어가는 징후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자 한 <그러므로 포르노>, 일제 시대 위안부부터 양공주, 관광기생과 집창촌 등 한국의 성 착취 역사를 거침없는 시선으로 이어 내려간 <공주들>에 이르기까지, 김수정 연출가와 극단 신세계의 작품들은 언제나 우리 안의 가장 익숙하고 불편한 지점들을 무대 위에 끄집어내 그 민낯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번에 그가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은 <이갈리아의 딸들>로, 가상의 가모장제 국가 이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와 일상 속에 내재된 차별과 불평등을 비추는 작품이다. 공연을 앞두고 태풍에도 아랑곳없이 연습에 몰두 중인 그를 만나 미리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분법적 논리를 넘어 입체적인 문제의식으로

                      

이번에 두산아트센터에서 DAC Artist 신작으로 <이갈리아의 딸들>을 정식으로 무대에 올립니다. 원작 소설은 전부터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정식으로 공연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 같은데 이 작품을 공연으로 올리겠다는 생각은 언제,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원작 소설을 2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 읽자마자 재미있고 통쾌한 느낌이 들면서 바로 공연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대체로 공연하고 싶은 텍스트를 읽게 되면 일차적으로 몸에 반응이 오는 편인데, 이 작품은 읽자마자 반응이 오더라고요. 1부를 읽으면서는 정말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뒤로 갈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뭔가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어요. 특히 2부를 다 읽고 나서는 아, 이건 그냥 통쾌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싶었고, 그때 이걸 공연해 보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공연 대본을 보니 원작의 흐름과 주요 인물은 그대로 가져왔지만 구체적인 사건과 대사는 새로 쓴 것이 많더라고요. 특히 후반부로 가면서는 원작의 이야기를 재현하기보다는 원작의 틀을 빌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각색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점은 무엇일까요?  원작을 읽는 동안 1부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2부에서는 물음표가 계속 따라왔어요. 또 작품이 쓰인 시대의 젠더 감수성이 과연 2019년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 관객들에게 충분히 다가올까 싶은 지점도 있었고요. 이 이야기가 오늘, 이곳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와닿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구체적으로 2018년 미투 사건 이후의 한국 사회를 반영하고자 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투나 가해자, 피해자 같은 직접적인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이런 쪽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재미있게 보면서 반감 없이 우리 사회의 차별과 차이에 대해 느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대본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등장인물 각각의 계급을 명시한 것이었는데요, 이것은 어떤 의도인지 궁금합니다.  등장인물 개개인이 속한 계급과 그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원작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부분이지만, 저는 아예 등장인물을 지배 계급과 노동 계급으로 구분하고, 그런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해 전면에 부각시키려 했어요. 우리가 사회에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이 하나의 범주가 아니라 아주 복합적인 차원의 문제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더 또렷이 드러내고 싶었고, 이 작품을 단순한 흑백논리를 넘어 입체적인 시각에서 그려내고 싶었거든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남녀 젠더 문제 안에서만 볼 게 아니라, 계급, 퀴어 담론, 성 소수자 문제까지 확장하면서 젠더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이갈리아의 딸들> 워크숍 공연도 많은 관심 속에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워크숍과 이후 피드백을 통해 어떤 점을 새롭게 발견하고 또 발전시킬 수 있었나요?  그때 관객들의 반응, 또 관객과의 대화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되어주었고, 이번 공연에 최대한 반영했습니다. 작년 워크숍 공연이 저희에게는 이 작품을 어떻게 연극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실험이자 도전이었어요. 이런저런 용어도 골라 써 보고, 화술이나 연기술도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 보고, 크로스젠더로도 해보고, 젠더프리로도 해보고. 할 수 있는 모든 경우들을 시험해 보고자 했고, 그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 및 저희 자체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이번 공연을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말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서로의 다름을 깨닫게 된 과정들 

                      

원작에서 워낙 언어 유희적 성격의 어휘들과 성별 반전의 의미를 지닌 신조어들이 많이 등장하다 보니, 이를 번역하고 한국적인 맥락으로 바꾸는 데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대본을 보니 원작 소설과는 다른 용어를 사용한 대사들이 눈에 띄던데요.  번역된 원작 소설도 상당히 공을 들여서 바꾼 용어들이 많은데, 그 의미가 한 번에 와닿기보다는 여러 번 생각하거나 각주를 봐야 이해가 되는 것들이 좀 있어요. 하지만 독서와 달리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즉각적으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듣자마자 감각적으로 그 뜻이 와닿을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직접적이고 선명한 단어들로 바꿨어요. 일단 이번 공연 대본을 위해 저희 극단원이 번역을 다시 진행하면서 번역본과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가진 언어들을 섬세하게 찾아내는 과정을 거쳤고요, 신조어 같은 것들은 듣자마자 바로 뜻을 파악할 수 있는 말들로 바꾸고, 주석이나 설명이 필요한 용어들은 과감하게 들어냈습니다. 다만, 이갈리아라는 나라의 명칭과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전혀 손대지 않았는데요, 자료를 찾다보니까 작가가 인물 하나하나의 이름에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썼다고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페트로니우스는 남성이지만 일부러 길고 장식적인 이름을 붙였고, 반대로 여성 캐릭터들은 루스, 그로, 거드 이렇게 짧고 단호한 느낌의 이름으로 부르는데, 이런 지점은 원작의 뉘앙스를 그대로 살리고자 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계속 함께 작업해 온 극단 신세계 단원뿐만 아니라 대학로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견 배우들도 여럿 참여합니다.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고 캐스팅 작업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저희 극단원들이 함께 작업한 지 이제 4~5년이 되어 가는데, 극단의 다음 단계와 방향성을 모색하면서 다른 배우들과도 함께 작업해 보자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리고 지난 워크숍 공연 이후 자체적으로 공감한 것 중 하나가 극 중 부모인 인물들의 정서를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거였어요. 나이 어린 친구들이 어른 역할을 맡게 될 때 오는 이질감 같은 게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게 더 확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본 공연 때에는 부모 역할은 그 연령대의 배우를 찾고, 자식 세대 역할은 우리 단원들이 맡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이번 공연에서 1부는 우화적으로, 2부는 아주 현실적으로 만들어보려 하는데 그럴 때도 부모와 아이들의 지점이 정확하게 보이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고요. 그래서 지난겨울부터, 그동안 함께 작업해 보고 싶었던 선배님들께 연락을 드렸고, 좋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 연습이 너무 즐겁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각기 서로의 방식으로 연기해야 하다 보니 배우들의 연기 톤이랄까 스타일 등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과 토론이 있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극 중 남자 배우들이 조신한 가정주부 역할을 맡아 대사를 하는데, 이런 것들이 자칫 코믹한 설정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연기 스타일에 대해서는 어떤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지요?  맞아요. 희화화된 연기술로 보이지 않기 위해 일찍부터 워크숍을 시작했고, 함께 젠더 관련 공부를 하면서 맞춰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이 몇몇 장면에서 웃을 것 같긴 한데, 그건 아마도 그런 설정이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일 거예요. 이런저런 시도들을 병행한 뒤에 저희가 내린 결론은, 여성과 남성을 구분할 필요 없이 캐릭터로 접근하고 연기하면 된다는 거였어요. 굳이 남성성, 여성성을 나누고 따로 생각할 필요 없이, 다른 인물 맡을 때랑 똑같은 방식으로 고민하고 접근하고 토론하면서 진행해 가고 있어요. 그런데, 연습을 하다 보면 의외로 우리 몸에 내재화된 여성성과 남성성이 너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어떻게 보면 그런 관념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배우들인 것 같은데요.  저희도 연습을 시작하고 나서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가끔 서로의 장면을 남녀 배우들이 바꿔서 읽어주곤 하는데, 그 장면을 받아들이는 태도나 인식이 확연히 달라서 놀라곤 해요. 예를 들면 두 가정주부가 만나 담소하는 장면에서도 남자 배우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경우가 거의 없더라고요. 그런데 같은 장면을 여자 배우들이 하니까, 서로 끊임없이 상대 배우의 시선과 반응을 살피고 거기에 따라 리액션을 맞추는 거예요. 그런 걸 보면서 여자는 원래 그래, 남자는 원래 그래 하고 넘어가지 않고, 우리가 왜 그렇게 반응하고 행동하는지 하나하나 설명하고 설득시키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공부가 정말 많이 되더라고요. 
 

이번 공연은 작업 내내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깨닫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저 자신도 여자는 왜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매번 설명하다 보니까 스스로 제 모순도 인지하게 되고, 결국은 상대보다 나 자신에 대한 탐구를 먼저 하게 되더라고요.  

 


 

우리를 둘러싼 구조를 바라보는 시선 

                      

무용수와 안무가, 그리고 배우로 활약하다가 최근 연출로서 본격적인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원래 무용을 전공하기 전부터 극단 차이무, 그린피그, 우투리 등에서 연극배우로 9년 정도 활동했어요. 무용을 배운 것도 춤을 배우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연극 작업을 하면서 늘 궁금했던 움직임을 찾고 싶어 간 거라 저의 관심은 언제나 연극에 맞춰져 있었던 것 같아요. 안무 작업도 순수 무용보다는 연극 안무 작업을 훨씬 많이 했고요. 
 

그러한 무용과 안무 경험 때문인지, 작품에서 에너지와 몸의 기운, 그리고 움직임 등을 굉장히 힘 있고 세련되게 사용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실제로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인가요?  많이 받고 있죠. 제 작업에서는 연출 언어가 안무처럼 갈 때가 많아요. 큐를 소통하는 방식도 카운트로 정해져 있고, 대사 사이에 잠시 텀을 두는 것도 카운트화하곤 하거든요. 또 제가 움직임의 높낮이 이런 것에 예민한데 이것도 안무했던 경험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아, 가끔 저희 작품이 너무 세서 수위 조절이 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 제가 조용한 작품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럴 거예요. 저희 극단 작품은 제가 첫 관객이다 보니 아무래도 제 기준에 맞춰지게 되는데, 제가 조용하고 지루한 걸 잘 못 참거든요. 잘 보면 나름의 완급이 있는데, 아직은 제 취향이 많이 반영되어 그런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극단 신세계의 전작인 <보지체크>나 <공주들>에서도 여성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었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번 작품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고 싶은지요?  사실 의도적으로 여성 문제를 다루고자 한 건 아니었어요, 저에게 모든 작업의 시작은 늘, 나 왜 이렇게 살지? 우리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지? 하는 고민이에요. 다만 저 자신이 여성이다 보니 나를 들여다보게 되고, 내가 누굴 닮았지 하면 엄마와 할머니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꾸 여성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하나의 카테고리를 고집하면 할수록 문제의식이 그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저는 그렇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우리와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는 구조 전체를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2015년 창단한 극단 신세계와 함께 우리 사회의 차별과 혐오, 폭력 등 불편하고도 필요한 이야기들을 꾸준히 다뤄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극단 신세계가 지향하는 연극 방향은 어떤 것인가요?  저희의 방향성은 명확해요. 우리가 아는 이야기,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이야기를 하자. 어려운 주제, 멀리 있는 담론을 이야기하지 말고 지금 우리에게 가장 힘들고 불편한 것들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자, 이거예요. 그렇게 작업을 이어오면서 우리 스스로도 계속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때 또 우리가 감각하는 것들,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또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겠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3호 2019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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