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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류덕환, 배우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은 [No.102]

글 |김슬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배임석 2012-03-28 4,617

마돈나를 노래하고 춤추던 씨름부 소년은 아름다웠다. 그 이상 더 딱 맞는 옷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연쇄살인범이 되어 동네를 누볐고, 구한말의 의학도로 변신해 살인사건을 쫓아다녔다. 때론 중독과 파멸을 연기했으며, 미워할 수 없는 천재가 되어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때 묻지 않은 천진한 미소 속에 사색과 열정으로 그득한 눈빛을 감출 줄 아는 배우다. 아직은 감히 ‘배우’라는 이름의 무게와 밀도를 자신의 이름 앞에 허할 수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우리는 그를 이미 ‘배우’ 류덕환이라 부른다.

 

 

<서툰 사람들>을 준비 중인데, 수염은 역할 때문에 기른 건가 봐요. <에쿠우스> 이후 오랜만에 무대에 서잖아요. 연극 무대를 위해 준비하는 것들이 있나요? 사실 제가 도둑 같아 보이는 얼굴은 아니라서요.(웃음)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매체가 달라진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하는 건 없어요. 언제나 그 현장에 가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음가짐이 달라지거든요. 그러면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아도, 마음의 변화에 따라 몸도 반응하고 금세 작품에 적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작품을 선택할 때 인물에서 느껴지는 강한 끌림을 믿는다고 들었는데, <서툰 사람들>의 장덕배는 류덕환 씨에게 어떤 인물이었나요? 처음엔 과연 내가 장덕배를 할 수 있을까 많이 걱정했어요. 그냥 어느 날 전화 받고 나갔더니 <서툰 사람들> 배우 분들이 모두 모여 계시고 저도 당연히 하는 것처럼 되어 있더라고요. 제가 2008년에 봤을 때는 류승룡 형이 하셨는데 그때 그 느낌이 정말 좋았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런 이미지는 아니잖아요? 헌데 계속해서 대본을 읽어보고 연습하면서 덕배라는 인물이 참 어리바리 하면서도 어른인 척하고 그런 것들이 말 그대로 서툰 사람이구나, 싶었죠. 그러면서 나만의 스타일로 해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장진 연출님하고 오래 작업해왔는데, 두 분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영화 <묻지마 패밀리> 중 ‘내 나이키’라는 작품이었어요. 당시 드라마 <오남매>를 촬영할 때라, 까까머리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갔거든요. 박광현 감독님이 제 이미지가 극중 선도부와 맞아떨어진다고 그 역할로 캐스팅을 하셨죠. 그런데 막상 촬영 현장에서 장진 감독님이 저를 처음 보시고 “얘네, 얘다”라고, 바로 그 역을 시켜주신 거예요. 그때 “딱 3년만 나랑 같이하자”고 하셨죠. 그러고선 지금까지 계속 같이하게 된 거예요.

 

처음 그 느낌만을 믿고 시작했던 거네요. 이제는 오래 함께 작업하면서 두 분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도 대단할 것 같은데요. 저는 작품하면서 감독님들과 굉장히 많이 싸우는 편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감독님은 작품 전체를 두고 고민하시는 분인데, 그에 비해 저는 제가 맡은 인물 하나를 심도 있게 고민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건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고 제 의견을 강하게 말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장진 감독님한테는 그게 안 돼요. 직접 쓰고 연출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꿰뚫고 계시기도 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도 아주 확실한 분이잖아요. 저는 연습하면서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애드리브도 많이 하는 편인데, 매번 아주 유쾌하게 웃어주시면서도, “근데 그거 안 된다, 하지 마라” 냉정하게 말씀하시거든요. 언제나 그렇게 너무나 정확한 디렉션을 주시니까, 당연히 믿고 따르게 되는 거죠.

 

어릴 때 너무 숫기가 없어서 연극을 시작했다고요. 말하자면 어린 시절의 놀이터가 이제는 일터가 되었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연기 생활에 영향을 끼치나요. 금전적인 부분만 빼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저는 지금도 여전히 놀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제는 제 나이가 그런 것들도 신경 써야 하는 시기가 되어버리니 놀이가 직업이 된 거죠. 사실 금전적인 것들을 신경 안 쓰면 정말 신나게 놀기만 할 텐데, 오히려 그런 것들이 생기니까 좀 달라지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내 연기에 대한 대가를 받는 거잖아요. 자본을 통해서 작품의 가치가 매겨지고 그러니 더 깊이 고민하면서 하게 되고, 허투루 할 수가 없게 되죠. 제가 마냥 놀고 싶다고만 생각했다면 예능 프로그램 나가서 여장하고 마돈나 노래도 부르면서 더 유명해지려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마돈나는 영화에서 춤추고 노래해야 가치가 있고 소중한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놀면서 그게 직업이 된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잖아요. 일하면서 어떤 것들을 고민하죠? 사실은 제가 너무나 신중한 성격이라, 굳이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부분까지 고민을 해요. 주변에서 무지 피곤해하죠.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만약 제가 이전 영화에서 바리스타 역을 맡았어요. 그리고 다음 영화에서 커피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일 수가 없어요! 왜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냐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어쩔 수 없어요. 영화를 보다가 커피 마시는 장면 하나에서 ‘아, 류덕환 예전에 바리스타 역할 했는데’라고 떠오르면, 그 영화 캐릭터로 온전히 비춰지는 게 아니라 인간 류덕환이 겹쳐지고 이전 영화의 캐릭터까지 겹쳐 보이게 되는 거잖아요. 그럼 그 영화에서 제 연기는 실패한 거죠. 내 연기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져 버리니까요.

 

그동안 연기해왔던 인물들이 공통점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양했던 이유가 있었군요. <그림자 살인>이라는 영화를 찍었을 때가 기억나는데요. 스케일이 큰 작품이었고, 유명한 배우님과 연기도 해봤죠. 게다가 작품이 흥행까지 되니, 당시엔 정말 재밌었어요. 그러고 나서 비슷한 영화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결국 제가 선택한 작품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링크>였죠. 그렇게 재밌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자꾸만 제 연기가 겹쳐질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견딜 수 없었거든요. <링크>가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아니지만 저한텐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고, 힘든 작업인 만큼 보람도 있었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하죠. 내가 아직까지는 이런 영화들이 계속 들어온다고 해서 욕심 부릴 때가 아니구나, 라고요. 물론 대중성이나 이런 부분에선 제가 많이 부족하니 그것도 어느 정도는 보완해야겠지만, 지금 굳이 그런 것만 찾아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연기 욕심이라고 해야 하나요. 류덕환 씨에게 자극을 주는 것들은 어떤 거죠? 너무 얘기하고 싶었던 건데, 저는 이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항상 있었거든요. 제가 연극 무대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데, 관객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영화나 드라마는 뭔가 항상 아쉬운 게 있어요. 모두들 힘내서 열심히 촬영했고, 반응도 괜찮아서 흥행도 됐고, 근데 뭐가 부족한 걸까, 라고 생각해보면 관객의 반응을 라이브로 접할 수 없다는 게 늘 섭섭하죠. 연극은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관객들이 거기에 보조를 맞춰줘요. 무대와 배우와 관객, 정말 그 삼박자가 호흡이 딱 맞는 것 같아요. 관객들이 그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반응을 해줬을 때 깊은 곳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거죠. 근데 드라마는, 나는 여기서 이렇게 집중하면서 연기하는데, 설거지하면서도 보고, 밥 먹으면서도 보고 그러잖아요. 물론 그 매체의 특성이라는 것도 분명히 있어요. 편하게 볼 수 있는 것, 또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 소장할 수 있는 것, 그런 것들도 큰 매력이에요. 하지만 제가 느끼는 자극은 좀 다른 것들이에요. 연극에는 그 순간 즉각적으로 나를 쿵쿵쿵 때리는 것들이 있어요. 긴장된 분위기, 숨소리 이런 것들이 살아 있잖아요. 관객들이 배우의 땀과 육성, 몸짓 하나하나에 감동을 느끼는 것처럼, 배우도 똑같은 것 같아요.

 

 

그렇죠. 관객들이 감동하는 만큼 배우들도 똑같이 느낄 것 같아요. 하지만 연극이 끝나면 기억 속에 남아 아련해지잖아요. 그게 또 다른 매력이니까요. 영화를 보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감동은 있지만 눈물은 잘 안 나요. 근데 저는 연극할 때는 항상 눈물이 막 쏟아져요. 마지막 공연 끝나고 커튼콜 때 관객들 박수 소리가 들리면, 아, 다시는 이 무대에 설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죠. 그리고 연극은 매번 할 때마다 다른 관객들을 만나 다른 반응들을 접하게 되잖아요. 그런 것들이 연극만의 고유한 것이고, 다른 데선 얻을 수 없는 것 같아요. 그 공간에 함께 있었던 사람만이 가져갈 수 있는 거잖아요. 물론 제가 아직 경험도 얼마 되지 않은 놈이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웃음) 배우라면 반드시 연극 무대를 겪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린 시절부터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배우’란 무엇인지, 본인만이 생각하는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잘 못하는데요. 연기는 결국 사람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아직도 한참 부족해요. 제가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왔다고는 하지만 저보다 나이 많은 형 누나들이 저를 선배로 대할 때도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분들은 저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왔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아직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표현해야 할 사람도 많은데, 배우가 무엇인지, 그런 얘기가 어떻게 쉽게 나오겠어요.

 

블로그나 트위터에서 스스로를 ‘Clown Ryu’라고 지칭한 걸 봤어요. 본인을 광대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간단히 얘기하자면 아직 배우는 내 이름 앞에 감히 붙일 수 없는 단어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안성기 선배님은 배우 안성기라고 하면 너무나 자연스럽잖아요. 아직은 저에게 배우라는 단어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그 무게와 밀도를 감히 내 이름 앞에 붙일 수가 없다는 거죠. ‘광대’라고 하면 조금은 더 다가가기 쉬운 무언가가 있어요. 재미있고 친근한 느낌이고, 내가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죠.

 

사실 우리가 광대를 떠올리면 흔히 웃음 뒤에 가려진 애환이 생각나잖아요. 그렇죠. 영화나 다른 대중 매체에서 그런 이미지들을 많이 보여줬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내가 광대로서 무대에 서서 사람들을 만났을 때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분칠하는 게 아니라, 잠깐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기 위해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힘들고 괴로운 삶이 있겠지만, 그걸 위장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가 되는 순간에 나는 행복하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광대에요.

 

스마트폰 영화제에 감독으로 참여한다는 소식이 들려요. 언젠가 인터뷰에서는 나이가 들면 연출도 하고 싶다고 얘기했잖아요. 그게 말이죠. 임필성 감독님의 꾐에 넘어가서 그만…(웃음) 생각보다 좀 빨리 이런 기회가 왔어요. 저는 군대도 다녀오고 삼십대 넘어서 슬슬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스마트폰 영화제 작품들은 이야기의 밀도로 승부한다기보다 날것을 잘 건져 올려서 편하게 볼 수 있게 만들더라고요. 사실 그 전에 이미 이런저런 작품들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스마트폰 영화제에 참여하겠다고 결심하면서 급하게 새로 한 작품을 썼어요. 원래 찍으려고 했던 다른 대본들은 스마트폰이라는 기계가 담아내기에는 좀 버거웠거든요. 근데 정말 쓰다 보니 완전 코미디가 나와 버렸죠. 어느 감독님에 대한 얘기인데, 다행히 그 감독님이 흔쾌히 출연을 허락하셨어요. 아, 물론 누구인지는 비밀입니다.

 

연기자로서가 아니라, 디렉터로서도 세상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가 봐요. 무지하게 많죠. 제 얘기도 하고 싶고, 내가 바라보는 사물에 대한 이미지도 얘기하고 싶고, 말도 안 되는 판타지도 그려보고 싶고요. 사실은 장난 식으로 쓰면서 시작한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중에 제일 애착이 가는 건 제 가출 경험담이에요. 제목이 ‘어쨌든 가출’인데, 제가 가출을 했다가 여덟 시간 만에 집에 돌아온 적이 있거든요. 가소롭다 말하시겠지만 어쨌든 저한텐 가출이었어요. 또, 지금 한국의 현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미묘한 감정들에 대한 얘기를 써놓은 것도 있고, 배우의 삶에 대한 얘기도 있어요. 배우라서 가질 수밖에 없는 욕심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신 상태, 그리고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이 너무 싫어서 벗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또 다른 가면을 쓰게 되는, 그런 어쩔 수 없는 배우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죠.

 

 

현재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에요. 외부 작업들 때문에 바쁠 텐데 학교에서 하는 작품들에 참여할 여유가 있나요? 저는 전부 다 참여해요. 며칠 전에도 하나 끝냈는데요. 마음 놓고 저를 실험할 수 있는 장은 학교밖에 없기 때문에 저한테는 정말 큰 의미죠. 대중의 시선을 피해 우리끼리의 실험을 통해서 아, 나한테 이런 부분들이 어울릴 수도 있었겠구나, 이런 거 해보니까 괜찮네, 이런 건 다신 하지 말아야겠다, 그런 기준선이 세워지는 거죠. 이 모든 것들을 제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학교밖에 없기 때문에 저는 여기 몸과 마음을 다 담글 수밖에 없어요. 이들과 같이 뭉쳐서 4년 동안 뭔가를 만들어내면서 시행착오도 하고, 술도 한잔하면서 싸우기도 하고, 그래서 학교에 가면 제 마음가짐도 완전히 달라져요. 어쩌면 실질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연극과에서 4년을 공부하는 것보다 촬영장 두 번 놀러가는 게 더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바로 스타가 되어서 누가 망치질을 하겠어요. 저는 지금도 톱질하고 못 박으면서 작업해요. 그러면 스태프들이 어떻게 고생하고 있는지 그 노고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죠.

 

배우가 아닌, 생활인 류덕환이 요즘 생각하는 것들은 어떤 건가요. 스물여섯 청년의 일상이 어쩌면 배우의 삶보다 훨씬 다이내믹하고 스펙터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음, 아마 제 맘대로 못한 거는 연애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거야말로 맘대로 해야 하는데 말이죠.(웃음) 일은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술도 멋대로 먹고, 길바닥에 쓰러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정작 불타는 연애 같은 건 한 번도 못해봐서 그게 참 아쉽다, 라는 생각을 해요. 제 나름대로는 사랑도 해봤지만 사실 짝사랑이 너무 길기도 했고요. 그래서 아직도 작품에서 멜로 라인이 나오면 좀 부끄러워요. 어떻게 보면 그걸로 만족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자꾸 그러니까 연애를 못하는 건가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2호 2012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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