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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나는 나의 아내다> 남명렬, 변치 않는 하나의 길 [No.117]

글 |나윤정 사진 |김호근 2013-07-10 4,589

무대 위에 남명렬이란 이름이 더해지면 자연스레 ‘신뢰’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간 그의 연기가 보여주었던 굳은 믿음 덕분이다. 서울 무대 데뷔작이었던 <불의 가면-권력의 형식>부터 최근작 <더 게임-죄와 벌>까지, 우리는 다소 난해한 인물과 주제들이 그와 만났을 때 더없이 명료해짐을 오랫동안 경험해왔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는 흥미로운 제목만큼이나 독특한 형식을 표방하고 있다. 한 명의 배우가 35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모노극으로, 역사를 관통하는 한 인물의 드라마를 묵직하게 펼쳐낸다. 생애 첫 모노극에 도전하는 남명렬은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작품은 처음이라며, 한층 짙어진 눈빛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나의 아내다>는 퓰리처상, 토니상, 드라마데스크 등 유수한 시상식의 최고 작품상을 휩쓸며 호평받은 작품입니다. 처음 접했을 때 느낌이 어땠나요?
개인적으로 한 인물의 인생사만 담겨 있는 작품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아요. 모노드라마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등장인물이 최소한 두 명 이상이어야 연극적인 재미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은 모노드라마임에도 무척 흥미로웠어요. 역사를 관통하는 어느 한 시대에 한 명의 개인이 어떻게 위치해 있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이었죠. 어려운 역사 속에서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어요.

 

주인공 샤로테는 나치 치하와 독일 사회주의 그리고 동독 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았던 실존 인물입니다. 그가 지닌 많은 드라마 중 성소수자인 점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인물에 어떤 해석을 더하셨나요?
샤로테는 게이에요. 복장도착자이기도 하고요. 열다섯 살 이후로 남자 옷을 입은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극작가 더그, 샤로테와 사랑을 나누었던 알프레드도 게이죠. 흔히 영화나 브라운관에서는 게이를 굉장히 여성스럽거나 희화적인 인물로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꼭 게이들이 그렇진 않아요. 이 작품에선 과장된 게이 연기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대본에 샤로테가 전혀 게이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묘사도 나오거든요. 샤로테의 경우 게이도 인간으로서 똑같은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에요. 그들을 특별하게 볼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고정관념을 덧입혀 특정 인물을 유형화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무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게이를 꼭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되면 좋겠어요.

 

 

게이란 공통점을 지닌 세 인물 간의 차별화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궁금합니다.
다른 유형의 인물들을 혼자 표현하기 때문에 차별화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요. 일상적인 표현으로 컨셉을 잡았지만, 막상 연습에 들어가선 샤로테에게 약간 여성적인 느낌을 가미해보기도 했죠. 그런데 스타일 때문에 대사의 리듬감이 안 생기더라고요. 옳은 선택이 아님을 깨달았죠. 그 대신 샤로테보다 대사가 적은 극작가 더그를 좀 더 여성적으로 표현하기로 했어요. 스타일을 여성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음정을 다르게 사용한 거죠. 샤로테가 낮은 소리를 낸다면, 더그는 좀 더 높은 소리로 표현했어요. 알프레드 같은 경우 더 낮은 소리를 내 일부러 폼을 잡는 느낌을 주었고요. 너무 인위적인 차이를 두면 자칫 구연동화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참 조심스러워요. 아주 작은 차이를 두지만, 객석에서 볼 땐 큰 차이로 보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있어요.

 

극작가 더그가 샤로테를 관찰하고 인터뷰 하는 과정이 연극의 플롯이에요. 샤로테는 그륀더차이트의 유물을 잘 보존해 국가공헌훈장을 받기도 하지만 이후 슈타지(동독 국가보안부)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뭉스런 인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샤로테는 어떤 인물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대본의 구조가 자칫 샤로테를 의뭉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샤로테는 결코 의뭉스럽지 않아요. 그 사람은 주변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올곧게 해나갔을 뿐이에요. 나치시대부터 동독의 공산주의 시대까지, 억압적인 두 시기를 지나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치마를 입으며 살아왔어요. 주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꾸준히 했던 사람인 거죠. 또 샤로테에겐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왠지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 그 사람에게 끌려들어갈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힐링캠프>나 <무릎팍 도사>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게스트 중에서도 굉장히 흥미로운 사람이 있잖아요. 그 이유가 뭘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진실한가에 달려 있더라고요. 샤로테도 그런 인물이 아닐까요?

 

“난 가구를 손질하지 않아요.…없어진 난간, 부러진 기둥, 이런 것들이 다 그 물건이 존재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이런 샤로테의 말은 인생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과거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기록과 역사는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인 거죠. 우리나라의 실록도 정권을 잡은 후대 사람들이 지난 역사를 다르게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반면 샤로테는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었어요. 혹여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을 피하기 위해 변명하거나 왜곡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거죠. 더그가 알프레드를 밀고했다고 의심받고 있는 샤로테에게 그가 어떻게 체포됐는지 물어봐요. 그때 샤로테는 알프레드를 위해 직접 짠 스웨터를 가져와 보여줘요. 더그가 원하는 구체적인 대답 대신 회박죽을 넣고 벽돌을 쌓았던 자신의 손이 알프레드를 위해서는 뜨개질을 했다는 말을 해요. 다들 이런 저런 말을 해도 자신이 알프레드를 사랑한 것은 분명하고, 그건 변하지 않는 이야기란 뜻이죠.

 

샤로테의 삶에 매료된 더그가 샤로테를 찾아가 인터뷰를 시작하듯, 누군가 남명렬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 찾아온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세요?
제 이야기는 작품이 될 만한 게 별로 없어요.(웃음) 샤로테만큼 극적인 인물이 못되니까요. 아마 연극 이야기를 하겠죠. 내가 연극을 어떻게 시작했고, 왜 지금 연극을 하고 있는지. 연극을 하면 무엇이 좋고, 어떤 것이 괴로운지. 그거 말곤 특별한 이야기가 없네요. 제 성향 자체가 좀 스테디해요. 용기내서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행동하는 것을 잘하지 않는 스타일이죠. 개인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고민하지 않고, 한 길을 꾸준히 가는 편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인생 자체의 굴곡이 그리 크지 않아요. 한편으론 이런 면이 샤로테와 비슷한 것 같네요. 사회의 부침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가려고 하니까요.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중 30대에 연극배우로 전향하셨잖아요.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선 매우 극적인 선택으로 느껴집니다.
주변에선 쉽지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전 사실 아무 생각 없이 결정했어요. 숨이 막혀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가 없었거든요.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은 나를 갉아먹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몇 년 동안 힘들게 일했으니 몇 달간은 그냥 놀았죠. 그런 뒤 앞으로 뭘 할지 생각해보니 연극이 재밌었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대학 시절부터 대전에서 연극을 했었기 때문에 대전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죠. 그 과정에서 하나하나 결정을 내릴 때마다 고민을 깊이 하지 않았어요. 인생은 한 번에 한 길밖에 못가잖아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자기 인생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배우로서의 인생이 제일 즐겁지만, 나를 더 행복하게 하는 다른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그걸 선택할 거예요.

 

지금 연극 다음으로 재밌게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요?
책 읽기요. 시간이 남아서 카페에 있을 때도 가방에 책 한권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거든요. 쉬운 책이든 어려운 책이든 다 좋습니다. 투자 대비 가장 오래 즐길 수 있는 것이 책이에요. 만 원 정도의 가격으로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잖아요. 하지만 책을 한 권 사면 최소한 이틀을 즐길 수 있죠. 그리고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꺼내 읽을 수도 있고요.

 

최근작 <더 게임-죄와 벌>을 비롯해 지금까지 출연했던 작품들을 쭉 살펴보면, 하나같이 쉽지가 않습니다.
제 작품들이 좀 어렵죠?(웃음)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연출가들이 어려운 배역이 있으면 저를 잘 떠올리는 것 같아요. 유독 그런 역할에 캐스팅 제의가 많이 오거든요. 하지만 어려운 역할들이 저에겐 별로 비통한 대상이 아니에요. 배역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는 재미가 있거든요. 그럴 때 느끼는 성취감도 크고요.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두고 있는 역할이 있으신가요?
2~3년 전부터 혼자 생각했어요. <파우스트>를 한번 해야겠다. 이유는 단순해요. 지금 제 나이 대에 하지 않으면 맡기 힘든 역할이거든요. 청년과 노인 역을 함께할 수 있는 나이에요. 양쪽을 다 아우르기에 쉰 살 중반 정도가 딱 좋다고 생각해요. 좀 더 나이를 먹어 젊은이를 연기하면 이상해보일 거예요. 괜찮은 연출가들을 만날 때마다 같이 <파우스트> 하자고 말하곤 하는데, 워낙 규모가 큰 작품이다 보니 쉽지 않네요. 파우스트 역을 맡게 된다면, 기억에 남을 만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후배 연극인들이 남명렬 배우를 존경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평소 지니고 있는 배우관이 궁금합니다.
적어도 무대 위에선 진실할 수 있는 사람이요. 이것이 더 진실해 보이는데, 저것을 택하는 것이 관객들에게 더 어필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순간 빨리 전자를 선택해야 해요. 지금 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길게 봤을 때 훨씬 이익이거든요. 스스로도 더 뿌듯할 수 있고요 작은 이익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이 좋은 배우 같아요. 배우에겐 재주도 필요하지만, 인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무대에선 개인적인 욕심이 다 보이거든요. 결국 내가 있는 자리에서 가장 적절한 몫이 어디까지 있지 빨리 파악해서 행동하는 배우가 오랫동안 좋은 배우로 남는 것 같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7호 2013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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