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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FOCUS] 빨간지붕 나눔장터, 지속 가능한 공연예술을 위한 첫발 [No.218]

글 |이솔희 사진 |국립극단 2022-11-23 889

빨간지붕 나눔장터
지속 가능한 공연예술을 위한 첫발

 

 

2020년 11월 김광보 예술감독의 취임 이후, 국립극단이 내세운 주요 기조 중 하나는 ‘적극적인 기후 행동’이다. ‘극장은 작은 지구입니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지속 가능한 예술을 향한 행보를 시작한 국립극단은 기존 기념품을 가공해 새로운 용도를 부여한 ‘새활용 기념품’을 출시하고, 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 제작 과정에서 탄소 발자국을 측정하는 등 탄소 중립을 위해 공연계가 행동할 수 있는 방안을 실천해 왔다. 그 행보의 정점을 찍는 행사가 지난 10월 13일 열렸다. 서계동 국립극단 야외마당에서 진행된 공연 물품 무료 나눔 사업 ‘빨간지붕 나눔장터’는 공연 물품 재활용의 가능성을 확인한 자리였다. 

 

환경을 위한 작은 움직임


올해 처음으로 개최된 빨간지붕 나눔장터는 공연 종료 후 국립극단의 창고 속에서 잠들어 있는 공연 물품을 민간 연극 단체와 나누는 프로젝트다. 국립극단은 불용품 보관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고, 민간 극단은 제작비를 아낄 수 있는 윈윈 전략이자, 더 나아가서는 물품 제작과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줄이기 위한 아이디어다. 국립극단이 추구하는 ‘공연계 탄소 중립’ 행동의 일환이기도 하다. 탄소 중립은 탄소 배출량만큼 탄소를 흡수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 실질적인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번 나눔 행사를 통해 공연 물품 제작 시 발생하는 탄소를 줄여 공연을 제작하는 전체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조금이나마 상쇄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나눔 물품은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등 국립극단의 주요 공연에서 사용되었던 의상 621벌, 소품 621개, 신발 및 장신구 328개로 총 1570점이었다. 재공연의 가능성이 적은 작품 혹은 추후 재공연을 올리더라도 의상 및 소품을 다시 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된 작품들의 물품이 주로 선정됐다. 국립극단 창고에서 3년 이상 보관된 의상도 나눔 물품으로 나왔다. 작품의 특색이 느껴지는 독특한 의상부터 접시 같은 간단한 소품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국립극단이 이번 행사를 기획하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창고를 가득 채운 물품을 같은 범주별로 분류·정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상 팀 직원들이 직접 의상과 소품을 미리 정한 카테고리에 맞춰 수량을 체크하고, 간단한 설명을 적은 태그를 달아 하나하나 사진을 찍었다. 정리를 마치고 창고를 빠져나온 후에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전체 물품을 전부 목록화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 걸린 시간만 꼬박 1년이다. 하지만 그 덕에 나눔장터 참여 단체들은 미리 나눔 품목을 파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극단 측에서도 행사가 끝난 후 소진된 물품과 다시 창고로 들어가야 하는 물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새로운 주인을 찾은 천 개의 물품


빨간지붕 나눔장터에 참여하는 극단은 사업자 등록증 또는 고유번호증을 소지한 국내 민간 연극 단체 중 사전에 참가 신청을 받아 추첨을 통해 선정했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 중인 85개 극단이 신청했고, 그중 60개의 단체가 참여 기회를 얻었다. 불가피하게 참여하지 못한 단체를 제외한 49개 극단에서 총 110명의 참가자가 행사 당일 빨간지붕 아래에 모였다. 이번 행사는 한 회차당 40분, 열 팀씩 총 6회차로 시간대를 나누어 진행했다. 시간에 맞춰 행사장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현장을 둘러보며 카테고리별로 진열된 물품을 확인했다. 자신이 맡은 파트의 품목에 집중하기 위해 의상 담당과 소품 담당으로 나누어 참여한 극단도 있었다. 각 단체별로 의상 10벌, 소품 10개, 신발 및 장신구 5개 이내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기에, 물품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가장 인기 있었던 나눔 물품 카테고리는 군용품 및 무기류와 <1945> <혈맥> 등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사용되었던 물품이 포함된 한국 고전 및 라탄 공예류였다. 두 카테고리의 공통점은 일상에서 구하기 어렵거나 제작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특히 총기류는 첫 번째 타임에서 물건이 소진돼 다음 순서의 참가자들이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돌리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두 범주에 속하는 물품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대적인 작품의 물품보다는 시대상이 드러난 역사극의 물품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약 천 개의 물품(의상 417벌, 소품 348개, 신발 등 장신구 175개)이 새 주인을 찾았다. 남은 600여 개의 물품은 다시 국립극단으로 돌아가 사용되거나, 추후 열릴 두 번째 행사에 다시 출품될 예정이다. 

 

 

빨간지붕 나눔장터에 참여한 단체들은 이번 행사가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영세 극단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극단 논다의 단원 김창훈 씨는 이번 행사에서 주로 중세복식을 선택했다.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등 고전 희곡의 공연을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 지원 사업 지원금은 대부분 500만 원 내외인데, 이는 한 작품을 올리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비용이다. 국립극단 수준의 퀄리티로 의상을 제작하려면 최소 1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이번 나눔 행사 덕에 의상 제작에 들어가는 예산을 아낄 수 있게 됐고, 그 비용을 무대, 조명 등 다른 부분에 사용하면 작품의 완성도 상승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눔장터가 더욱 활성화되어 공연계에서 일종의 공유 플랫폼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는 의견도 있었다. 극발전소301의 단원 안동기 씨는 “예전에 국공립 공연 단체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있는데, 당시 단체 창고에도 수많은 의상과 소품이 있었다. 사용되지 못한 채 장기간 보관 중이거나 폐기되는 물건들을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빨간지붕 나눔장터는 민간 극단 지원과 환경 보호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충족하는 행사인 만큼, 꾸준히 이어져서 극단이 활발하게 물품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환경 보호에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길 바란다.”라고 참여 소감을 전했다. 

 

국립극단이 

환경 위기에 대응하는 법
김광보 예술감독

 

국립극단은 ESG 경영을 표방한다. ESG란 Environment(환경), Social(사회), Governance(지배 구조)의 앞 글자를 딴 단어로, ESG 경영은 기업 활동에 친환경, 사회적 책임 경영, 지배 구조 개선을 도입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한다. 기업의 윤리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높아지면서 전 세계적 화두로 떠오른 경영 방침이지만, 국내 공공예술 단체에서 ESG 경영을 선언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ESG 경영의 일환으로 적극적인 기후 행동을 펼치고 있는 김광보 예술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작은 지구를 변화시키는 힘

 

2020년 11월 예술감독 취임과 함께 국립극단의 주요 운영 방안으로 기후 행동을 내세웠다. 예술인으로서 환경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언제부터인가. 
연출가로 활동하다 보니 꽤 오래전부터 공연이 끝난 후 남겨지는 물품들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연극 한 편을 올리면 보통 한두 달 정도 공연한다. 공들여서 만든 무대 세트와 소품이 짧은 공연 후에 말 그대로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연출가로 활동하는 30년간 그런 과정을 수없이 많이 보면서 무대 소품 재활용의 필요성을 크게 느꼈다. 

 

빨간지붕 나눔장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인가. 
2013년에 연극인들이 힘을 모아 ‘공쓰재(공연 쓰레기 재활용)’란 이름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공연 후 폐기 처분될 예정인 물품들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거나 일정 기간 대여해 주자는 취지의 커뮤니티였다. 공연 물품을 극단끼리 서로 공유하면 제작비를 줄일 수 있고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어 공쓰재의 뜻을 확장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0년 가까이 생각만 갖고 있다가 국립극단에 취임하면서 계획을 구체화했다. 국립극단이 사용하지 않는 물품을 처분한다는 의미보다는 우리 물품을 필요한 단체에 양보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나눔장터에 내놓은 물품은 어떤 기준으로 정해졌나. 
공연이 마무리되면 무대기술 팀에서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있다. 물품을 폐기할 것인가, 보관할 것인가. 사실 물품 보관 여부는 작품의 성패에 달려 있다. 하지만 관객 반응이 좋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동시대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 1회 공연 후에 물품을 폐기하는 경우도 있다. 재공연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은 창고에 물품을 보관해 두는데, 이번 행사에는 최소 3년 이상 창고에서 잠들어 있던 물품들을 내놓았다. 작품의 시대상이 담긴 의상도 있지만, 주로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품들을 중심으로 나눔 행사를 진행했다. 

 

지난 5월 공연된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은 지구 종말 60초 전의 상황을 가정하며 기후 위기에 대해 이야기한 작품이다. 무대와 소품, 의상 제작을 최소화하고 친환경 용지를 사용해 홍보물을 만드는 등 환경 보호를 우선시하는 방법으로 공연을 제작했다. 올해 국립극단의 기조를 드러내는 행보였는데, 이 작품이 이룬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리 모두가 환경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환경을 생각하면서 공연예술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올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은 나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준 작품이다. 공연 제작 과정의 그 어떤 행동보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은 탄소 발자국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국립극단이 기후 행동을 기조로 삼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도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다.  


더 나은 연극계를 위한 노력 

 

무대 세트를 최소화하고, 의상을 재활용하는 등 탄소 중립을 위한 행동이 연출가로서 김광보가 추구하는 미니멀리즘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맞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무대는 결과적으로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라고 불리는 미국의 조각가 로버트 모리스는 이런 말을 했다. “형태의 단순함이 경험의 단순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대가 단순하더라도 작품을 통해 전해지는 경험은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출가라면 작품을 통해 심미적 가치를 추구하고 싶지 않을까. 환경 보호와 시각적 만족감 사이 내적 갈등이 생길 것 같은데. 
탄소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보면 예술가의 상상력에 제약을 받기도 한다. 지난 10월 공연된 연극 <세인트 조앤>을 준비하면서도 연출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게 맞는 것일까 고민했다. 나라고 무대에 비가 내리고, 불꽃이 휘날리는 연출을 안 하고 싶겠는가. (웃음) 하지만 여러 고민 끝에 결국에는 현재 국립극단의 기조를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국립극단이 보유하고 있던 여러 가지 소도구를 재활용했고, 무대는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에서 사용했던 합판으로 만들었다. 최소한의 세트로 공연을 진행하고자 노력했다. 

 

지속 가능한 예술을 위해 연극계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인드 변화다.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탄소가 발생하고, 환경 오염을 야기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술가들이 그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공연계는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용 계획을 세우고 제작까지 마쳤지만 막상 공연에 사용하지 않게 되는 소도구가 의외로 많다. 이런 과정에서 발생되는 탄소 발자국을 의식하게 된다면, 점차 불필요한 탄소 발생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국립극단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 단체인 만큼 연극계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책임감이 막중할 것 같다.
국립극단은 국공립 공연 단체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 앞서 계속 언급한 환경 보호 측면뿐만 아니라 작품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그렇다. 나는 계속해서 국립극단의 문턱을 낮추고, 젊은 창작진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그게 한국 연극의 뿌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립극단이 선보이는 작품은 도전적이고 난해하다는 반응도 많지만, 아직 평가는 섣부르다고 생각한다.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으로서 임기 3년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내가 어떤 결과를 도출했는지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은 결과 도출의 과정에 있을 뿐이다.

 

작품 개발 사업 ‘창작공감: 연출’의 주제가 국립극단 한 해 사업의 주요 키워드가 된다. 올해의 키워드가 기후 위기였다면 내년의 키워드는 과학 기술이다. 내년에는 어떤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
과학 기술의 범주가 굉장히 넓다. 최근 가장 큰 이슈인 AI도 과학 기술이지만,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과학실에서 경험했던 간단한 실험도 과학 기술 범주에 들어간다. 작품 개발은 거기에서 시작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과학 기술을 작품에 녹여볼 계획이다. 자가발전 자전거가 과학 기술이라면, 무대에서 배우가 직접 자전거 페달을 굴려 전기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조명을 켜는 것은 탄소 중립을 위한 행동이다. 이처럼 기후 행동이라는 기조를 이어가면서도 과학 기술을 접목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 중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8호 2022년 11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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