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예지원이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선다. <버자이너 모놀로그> 이후 10년 만의 일이다.
그녀가 이번에 선택한 작품은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2인극 <미드썸머>. 오랜만의 연극 작업에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그녀를 만났다.
첫 대본 리딩을 하고 나서 펑펑 우셨다고요. 어떤 점에 감정적인 자극을 받으셨던 거예요?
하하하. 이 작품의 어떤 점, 어떤 대사 때문에 그랬다기보다 그게 이 작품이 가진 힘인 거죠. 작가님이 뛰어난 분인 것 같아요. 동선도 많고, 소품도 많고, 어떻게 보면 복잡해 보일 수 있는 걸 단순하게 잘 그렸거든요.
대본을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형식이 자유롭다, 맡는 사람에 따라 다른 작품이 나올 수도 있고 해석하기 나름이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미드썸머>가 문학적인 작품이긴 하지만 어렵진 않아요. 일 많이 하고 사는 현대인들의 삶을 솔직하게 그려서 공연을 보다 울다 가실 분도 있을 거고, 코믹한 요소가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 보고 가실 수도 있고. 반응은 다양해도 쉽게 공감할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이번 공연을 위해 기타 치는 걸 배웠다고 들었는데 무언가를 배울 때 빨리 습득하는 편이세요?
어려운 코드는 없고 그냥 잡는 정도인데 기타 치는 게 생각보다 상당히 어려워요. 연습을 좀 오래 해야 된다는 걸 연습하면서 알았어요. 잘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 정도 익히면 틀리지는 않겠다 싶은 시점이 오래 가고 있어요. 최소 6개월은 해야 되겠더라고요. 그런데 노래는 대사의 연장이라고 보시면 돼요. 가창력을 뽐내고 기타 실력을 뽐내고, 그런 거 없어요. 연극 속에 있는 음악이에요.
인터뷰하러 오기 전에 대본을 읽어봤는데 대사가 정말 많더라고요. 주인공 두 사람이 쉼 없이 대사를 주고받는 데다 장문의 대사도 많고요.
많아요. (혼잣말로) 문제는 기타가 아니라 대사였어. 대사 분량이 많아도 대사는 외우면 되는데 그 상황을 다 다르게 가야 되는 것과 이걸 어떻게 어우를 것인가의 문제죠. 영국 정서와는 맞아 떨어지지만 이걸 한국적으로 어떻게 풀 것인가가 저희의 숙제거든요. 그 숙제를 잘 풀면, 다 해결될 것 같아요. 지금도 ‘이걸 어떻게 하지?’ 머릿속이 그 생각으로 꽉 차있어요.
헬레나는 번듯한 직장을 가진 커리어 우먼이지만 속은 공허한 여자잖아요. 헬레나를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셨어요?
헬레나는 감성적인 여자예요. 굉장히 감성적인 여자이기 때문에 자기 삶에 치인 거죠. 변호사는 이성적인 사람에게 맞는 직업인데, 소녀인 여자가, 길보드 가수를 해야 될 여자가 어쩌다 이 길을 걷고 있으니 맞지 않죠. 외롭다보니까 더 일에 매진하고 알코올 중독에도 빠지고 힘들었을 거예요. 그러다 스스로 못 이겨서 혼자 폭발한 날 밥을 만나게 된 거고요.
만약 예지원 씨가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변호사였을까요?
안 했겠죠. 공부 잘해도 안 했을 것 같아요. 물론 변호사는 정말 멋진 직업이지만, 저하고는 맞지 않아요.
그럼 배우가 천상 나에게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일 아니었으면 뭐하고 살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죠. 뭘 했을까, 별로 떠오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전 이 일을 하는 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자꾸 할 말들이 생기는데 어떡하죠?(웃음)
대본에 “결정을 내리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움직이고 나서 결정하는 거다”라는 대사가 있잖아요. 그걸 읽으면서 예지원 씨의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실제로 어느 쪽에 가까운 편이세요?
두 가지 면이 섞여 있는 것 같아요. 왜냐면 연기자이고, 사회 안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행동하고 나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엉뚱하다는 이야기를 듣나 봐요. (무언가 생각난 듯 한참을 웃다가) 행동하고 나서 생각하는 게 너무 웃겨서요. 그게 본인은 행복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폐를 끼칠 수 있는 행동이잖아요.(웃음) 나이가 들수록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못해요. 그러니까 어릴 때일수록 거침없이 살아야 나중에 후회가 없어요.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충분히 삶을 즐기며 사셨을 것 같은데.(웃음)
그런 편이었죠. 그래서 작품도 특이한 작품을 많이 했잖아요. (잠시 생각을 하다) 거의 다 그렇구나.(웃음) 그래도 아직 많이 아쉬워요. 난 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미드썸머> 이야기에서 사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죠. 예전에 기억에 남는 영화 장면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여주인공과 하울이 함께 하늘을 나는 장면을 뽑으면서, 내 삶에도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던 거 기억하세요? <미드썸머>에서 말하는 사랑하고도 비슷한 이야기라서 그 점에서 공감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울었어요. 하늘을 나는 게 부럽고, 옆에서 저렇게 잡아 줄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워서요.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서 저렇게 알아서 도와주고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그런데 사랑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헬레나가 느끼는 외로움에 대해 공감해요. 영국에서는 서른다섯에 이제 나의 자유는 끝인가, 젊음은 끝인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한대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잖아요. 전 요즘 서른으로만 돌아가도 좋겠거든요. 그런데 제 윗 연배의 언니 오빠들은 “난 네 나이만 되도 좋겠다” 이렇게 말씀하세요. 결국 현재를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거예요. 삶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계획이야 필요하겠지만 여유 있게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쉬면서 나를 돌봐야지 남도 돌볼 수 있거든요. 나를 안 돌보면 헬레나처럼 저렇게 폭발하는 거예요.(웃음)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나이에 대한 생각은 언제 처음 하셨어요?
이제야 그런 것들이 살살 오기 시작했어요. 그 시기에 이 작품을 만난 거고요. 제가 진짜 늦된 거죠. 제가 서른다섯 살에는 이렇지 않았어요. ‘왜 난 아직 너무 젊은데?’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그런데 요즘에 나이를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냥 계속 전처럼 살아야 되는데 말이죠.
헬레나가 느끼는 외로움에 대해서 공감한다고 하셨는데 외롭다고 느끼시나 봐요?
외로움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어요. (웃음) 그런데 전 평상시에도 바쁘게 지내는 편이라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어요. 작품 수를 보세요. 일도 많이 하고, 컴패션 활동도 하고, 시간 나면 무용 학원도 다니고. 전 오히려 외롭더라도 조용하게 나만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컴패션 활동은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재작년부터 활동하고 있는데요, 거기 가면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아이티하고 필리핀에 다녀왔는데 가능하면 많은 분들이 갔다 오셨으면 해요. 방송을 통해 많이 접하지만 실제 가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르거든요. 컴패션 활동을 하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 가지고 낭비를 하고 사는지를 알게 되죠. 쓸데없는 낭비, 쓸데없는 고민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알게 돼요.
우리는 당연하게 누려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기도 하고요. 그런 곳에 다녀오면 한동안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 같아요.(웃음)
저도 컴패션 활동할 때는 은혜 충만이에요. 아이티에 갔다 왔을 때만 해도 대단했어요. 그런데 한 달이 지나면 똑같아져요.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이러면서 불평하고.(웃음) 그게 사람이죠. (한참 사이를 두고) 만약에 아이티를 30대 초반에 갔으면 어쩌면 아이를 데리고 왔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이티에 다녀와서 엄마한테 진지하게 입양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있는데 엄마가 대뜸 “누가 기르니?” 이러시더라고요. 결국 저희 엄마가 기르게 되겠죠.(웃음) 아까 행동을 먼저 한다고 말한 게 이런 거예요. 일을 벌이고 나면 그 일에 대한 수습은 누가 하냐고요. 저희 엄마는 제가 그런 이야기하면 황당해 해요.(웃음)
아이에 대해 언급했던 인터뷰를 읽었던 기억도 나요.
어릴 때 꿈도 못 꿨던 일들인데 컴패션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게 많아요. 아마 아이를 입양하시는 분들도 많을 텐데 존경스러워요. 그런 분들이 정말 훌륭한 거예요. 본인도 행복해지고 주변도 행복해지고, 그게 의미 있는 삶인 것 같아요. 욕심을 채우자면 끝이 없잖아요. 만족은 가질 때 잠깐 뿐이고, 지나면 더 큰 걸 갖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본성인 것 같아요.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으니까.
일에 대한 욕심, 여배우로서 욕심을 냈던 적은 없으세요? 그런 시기를 한번 거치신 건가요?
아니, 그렇지도 않아요. 아무 생각이 없어서.(웃음) 언제나 제가 하는 작품이 최고였어요. 금전적으로 많이 번다든지 그런 작품은 없었거든요. 그래도 되게 행복했어요. 물론 작품이 끝나면 좀 힘들죠. 갑자기 사라져버리니까 꿈꾼 것 같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그래도 하는 동안에 좋으니까요.
좋은 작품을 연기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인가요?
기본적으로는 연기하는 즐거움이지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더 즐거울 수 있었어요. 그 복이 있는 거죠. 이번 작품도 그렇고요.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2호 2011년 5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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