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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영웅> 안중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름 [No.222]

글 |김주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독립기념관 2023-03-09 1,159

<영웅> 안중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름

 

우리나라 사람에게 안중근이란 이름 석 자는 너무나 익숙하다. 일제의 초대 조선 통감이자 을사늑약을 체결한 장본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저격함으로써 대한제국 독립군의 기개를 보여준 민족의 영웅. 그러나 사람들이 아는 안중근은 딱 거기까지다. 우리는 여전히, 그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많다. 
 
 
 
응칠 그리고 토마스
 
황해도 해주 안 진사 댁 장남으로 태어난 안중근은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을 갖고 태어나 북두칠성의 기운을 지녔다는 의미의 ‘응칠’이란 아명으로 불렸다. 어릴 적부터 글과 무술을 힘써 익혔고, 특히 사격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안중근은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문한 후 서양 학문과 사상에도 눈을 떴다. 그의 세례명은 토마스였는데, ‘도마 안중근’의 도마는 토마스를 음차한 것이다. 을사늑약 이후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위해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 집중했으나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안중근은 1907년 연해주로 넘어가 의병군을 조직하였다. 이듬해에는 의병 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 회령 등에서 대일 항전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 배경이 있었기에 뤼순 재판소에서 안중근은 자신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저격한 것이라 당당하게 주장했다. 
 
 
하얼빈역에서 울린 총성 
 
1909년 3월 안중근은 12명의 동지와 함께 러시아와 중국 국경 근처에 있는 크라스키노란 마을에서 왼손 약지를 끊고 대한 독립의 의지를 새로이 다졌다. 그리고 그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과 회담을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안중근은 직접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하얼빈으로 떠났다. 운명의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잠입한 안중근은 열차에서 내려 인사를 받던 이토를 사살한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지금도 하얼빈역에는 안중근의 저격 지점과 이토가 쓰러진 자리가 보도블록에 희미한 표시로 남아 있다. 두 지점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운데, 아마 당시 총기의 성능으로 미루어 보아 그만큼 가까이 다가가야 거사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나름의 계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엄한 경비와 많은 인파를 뚫고 이토에게 총구를 겨누는 것은 웬만한 대범함과 침착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안중근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었지만, 곧 일본 관헌에 넘겨져 뤼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일본인들에 의해 여섯 번의 형식적인 재판이 열렸다.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 속에서 안중근은 재판 내내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기보다는 또렷한 논지로 일제 침략 및 수탈의 부당함을 지적했고,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논리적인 주장을 펼쳤다. 어떤 의미에서 안중근의 전쟁은 하얼빈역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수감과 재판을 거쳐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단한 수감 생활 속에서도 안중근은 자신의 삶과 사상을 글로 정리했다.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에 전하고자 했던 동양평화론은 지금까지도 시대를 앞선 사상으로 손꼽힌다. 당시 안중근은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세력의 동아시아 점령과 제국주의적 지배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한중일이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구체적으로는 한중일이 공동 군단을 편성하는 한편, 동아시아 평화회의체를 조직하고 그 산하에 은행을 두어 3국 공동의 화폐를 발행하자고 했다. 소위 블록 경제 공동체를 형성해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고 동아시아의 독립과 평화를 지키고자 한 것인데, 이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볼 때 상당히 획기적인 사상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이후에 설립될 유럽 연합보다도 앞선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역사학자가 안중근을 단지 항일 운동가로서만이 아니라 시대를 읽는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사상가로 바라봐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유다. 안중근이 감옥에서 집필을 시작한 『동양평화론』은 너무 이른 사형 집행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았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영웅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형제와의 짧은 면회 뒤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형 집행 후 안중근의 가족이 시신을 인수하고자 찾아갔지만 일제는 그의 묘가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될 것을 우려해 끝내 그의 유해를 넘겨주지 않았다. 해방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유해 발굴 시도와 발굴 작업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확실한 장소나 증거를 찾지 못한 상태다. “고국이 독립하면 고향에 묻어 달라”라는 그의 마지막 염원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80년이 다 되도록 그의 유해는 여전히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민족의 영웅이면서 또한 역사의 미아다. 우리가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은 유해만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이 안중근에 대해 아는 것은 단편적인 사실뿐이다. 안중근은 단순히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항일 운동가가 아니라 대한 제국의 의병 중장이었고 동아시아의 평화 공존을 주창했던 사상가였다. 의거 이후 재판과 수감 기간 그가 남긴 수많은 언행과 저술은 그의 인품과 사상을 전했으며, 심지어 일본인 중에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들이 걸어가야 했던 가시밭길과 험난한 삶의 여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인간적인 삶의 지점들이 빠진 채 그저 애국지사로만 부각되어 온 안중근의 이미지는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을 가리기 위한 심리적 보상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근 10년간 뮤지컬, 연극, 소설,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창작되고, 또 재연되는 것은 그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자 적극적인 기억의 행위로서 소중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중근 저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2호 2023년 3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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