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또 돌아온다. 그에 따른 여행의 기록 역시 끊임없이 생산된다. 서점의 여행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여행서는 누구에게는 정보일 수 있고, 기록일 수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떠나고 싶은 욕망의 방아쇠일 수 있다.
여행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건축가, 그리고 빨간 안전모를 쓴 ‘오기사’ 캐릭터까지. 오영욱이란 인물을 가리키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군산업체로 들어갔던 건설회사에서 나온 다음 날 여행을 떠나버린 후, 4년간의 시간 동안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샘터, 2005),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예담, 2006), <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위즈덤하우스, 2008), 세 권의 책을 내고 화제의 블로그를 운영하며 다양한 이름을 얻은 것이다. “제 삶은 굉장히 아날로그적인데, 노트북 하나에 연결된 무선 인터넷망 덕분에 굉장히 많은 걸 얻었죠. 딱 시기가 좋았고, 운이 좋았어요.”
언뜻 보면 여행, 일러스트, 건축 다방면에 관심이 많고 재능이 많은 사람인 듯하지만, 사실 그의 이 모든 작업은 ‘건축’으로 수렴되어 있다. 독특한 느낌의 일러스트와 감성적인 글, 스페인이 주는 이국의 느낌, 게다가 ‘서른을 앞둔 어느 날,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행복을 찾으러 여행을 떠난다’는 로망까지. 매력적인 요소로 잘 버무려진 그의 책은 잘 빠진 기획 도서로 느껴졌지만, 한 권, 한 권 읽을수록 좋은 건축가가 되기 위해 도시와 건축물을 관찰하며 성장하고 있는 청춘의 열정과 진정성이 그의 성실한 선처럼 스케치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기사란 별명과 캐리커처가 재미있어요.
건축과, 건설 회사 자체가 군대 같아요. 철모 대신 플라스틱 안전모를 쓰고, 군화 대신 두꺼운 가죽 신발을 신어요. 사원급은 보통 기사라고 불려서 ‘오기사’로 불렸는데, 이걸 영어로 써봤더니 글자 모양이 예쁘더라고요, 워낙 낙서하기를 좋아해서 이것저것 끼적이다가 안전모를 쓴 저를 그렸죠. 우연하게 나온 캐리커처에요.
블로그의 글이 2005년부터 차곡차곡 쌓여있네요. 일기장처럼 쓰시나 봐요.
게시판 하나 있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시작했어요. 그러다 첫 책을 냈고, 당시 블로그 서비스를 갓 시작한 네이버에서 스킨 일러스트 작업을 해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이후 관심이 생겨서 홈페이지에 하던 작업을 블로그로 옮겨 왔죠. 여행이 시작되고 1년 반 후에요. 인생이 여행으로 인해 확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죠. 그 전까진 그림을 취미나 개인적인 관심으로 그려왔는데, 그때부터는 생활에 보탬이 되기 시작했어요.(웃음)
우연하게 일러스트레이터, 여행 작가로 알려진 셈인데, 원래 꿈은 무엇이었나요?
건축에 대한 꿈을 가지고 선택한 건 아니었지만, 건축과에 입학했으니 건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건축과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건설 회사에 간 것도 시공을 해보면 나중에 설계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고요. 여행에서 그림을 그린 것도 건축과 관련이 되어 있었어요. 처음에 그림을 시작했던 이유는 그야말로 ‘관찰’이었거든요. 좋은 건물, 좋은 공간을 보고 그걸 사진 한 장으로 남기는 것보다, 몇 시간 동안 앉아서 그리게 되면 정말 관찰을 하게 되죠.
선이 굉장히 섬세하고 성실해요. 그리고 자유분방한 느낌의 선들이 모여 입체적으로 질서를 이루는 느낌이랄까요.
애초에 피사체를 똑같이 그리려던 게 목적이 아니었어요. 이 선이 이렇게, 저 선이 저렇게 만나서 이루어지는 공간을 관찰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림이 똑바로 그려질 필요는 없었어요. 내가 저기서 여기까지 가로선을 긋다가, 다른 데서부터 그어 온 세로선과 만나야 하는데 모자라다 싶으면 그냥 잇는 방식이에요.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하셨나요?
어렸을 때부터 낙서하는 걸 좋아했어요. 제게는 그림 선생님이 세 명이 있어요. <드래곤 볼>의 토리야마 아키라, 정말 좋아서 그림을 열심히 따라 그렸고, 중학 3년 내내 같은 반을 했던 동욱이, 그 친구가 그림을 정말 잘 그렸어요. 그때는 공부 잘하는 것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를 더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대학교 때는 단순한 선으로 개성이 뚜렷한 그림을 그렸던 병식이. 그들에게서 끊임없이 영향 받고, 어떻게 하면 나도 잘 그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제 그림이 조금씩 발전해갔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건축이나 여행에 관심이 있었나요?
음... 건축 쪽으로 하나의 실마리를 찾자면 레고를 좋아했다는 것?(웃음) 여행은 초등학교 때 ‘배낭하나 달랑 메고’라는 책을 읽고 막연히 대학생 때 배낭여행을 가봐야지 하는 꿈을 꿨죠.
그렇게 처음 가게 된 여행지가 호주였군요? 첫 여행의 인상은 어땠나요?
배낭여행이 하나의 목표였다면, 또 하나는 지평선을 보고 싶었어요. 지평선이 잘 보이는 곳에서 두 시간 정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죠. 그러곤 ‘아, 됐다’고 생각했어요. 욕심이 많지는 않거든요. 열흘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두 시간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건축 공부를 핑계로 많이 나가기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습관적으로 나갔던 것 같아요. 시간이 되면 ‘나가야지’란 생각을 했고, 추석 연휴 5일에 수업을 빼먹고 15일 정도 일본에 가서 안도 다다오의 건물을 쭉 답사하고 온 적도 있고요. 학생 때 갔던 여행은 아무래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는데, 개인적인 의지기도 했고,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는 수단이 답사이기도 했고요.(웃음)
본인은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지만, 입사 때부터 3년 후 여행을 목적으로 저축을 한 것도 일종의 계획적이고 실천적인 일 아니었나요?
4학년 때 건축 기사를 따고, 군산업체에 자리가 나서 건설 회사를 지원한 거라 의무 기간이 3년이었어요. 처음부터 떠날 생각이 있었어요. 프로젝트를 끝내야 하다 보니 3년 반을 다녔는데 일이 재밌었고, 뿌듯했어요. 또, 당시에 건설 회사에서는 주 7일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다 보니 돈을 모을 수밖에 없었죠.(웃음)
그렇게 15개월간의 여행을 마치고, 바르셀로나를 ‘살아보는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미국에서 시작해서 유럽으로 끝내는 일정이었고, 1년 이상이 될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막상 가니까 좋더라고요. 한 도시에서 최소 3일, 최대 일주일씩 머무르면서 낯설음과 익숙해질 즈음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식이었죠. 바르셀로나엔 아는 친구가 있었어요. 도착하자마자 친구가 맥주나 한잔하자며 구시가 으슥한 길에 있던 바에 데려갔어요. 그때 그 공간과 분위기에서 ‘아, 일주일을 머문다고 알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라는 감정을 느꼈어요. 떠돌이 여행에서 얻을 수 없는 갈망을 처음 느끼게 되었던 도시가 바르셀로나였어요.
서른을 앞두고 떠났다, 다시 돌아온다는 것에 많이 불안하진 않았나요?
사실 서른에 대한 압박감보다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여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좀 더 강했던 것 같아요. 불안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재밌는 건, 스물아홉에 떠났는데 12월생이라 외국에선 스물일곱이 됐어요. 그리고 딱 만 서른에 돌아왔죠. 다행히 그때는 이미 책도 세 권 내고, 할 일이 생겨서 막상 덜 불안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서른부터 서른둘까지의 나이가 많이 힘들다고 하는데, 전 그 시기를 스물여덟에서 서른으로 살면서 무디게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에 들어와서 며칠 지나니 서른셋이 되어 버렸어요.(웃음)
4년의 여행은 어떤 의미였나요?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곰곰이 생각하다가) 일생에 남을 만한 기억이죠. 사랑이나 연애처럼 4년 동안 내가 한 가지에 빠져 집중해서 산 기억. 사실 제 경우는 일반적인 예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여행으로 얻은 게 굉장히 많아요.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여행을 간다면, 결과가 실망스러울 수 있죠. 여행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고, 그래서 여행의 기대치를 자기 자신과 만나고, 자기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것으로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최근 여행하신 곳 중 인상적이었던 곳은?
가장 최근에는 추석 연휴에 다녀온 라스베이거스. 제겐 굉장히 재미있는 도시에요.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고 봐요. 하이 퀄리티로 갈수록, 깊이가 있을수록, 그 욕망이 잘 예술화되어서 새로운 것을 상상하게 하죠. 그런데 라스베이거스의 경우는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욕망을 건축물에 가둬놓자고 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도시가 들썩들썩하는 게, 사람들의 욕망이 들썩이는 느낌이에요. 굉장히 빨리 바뀌는 도시고, 그 변화에 관심이 있어 자주 갔어요.
기억에 많이 남는 도시는 어디인가요?
오래 머무른 순서대로, 서울, 바르셀로나, 페루의 쿠스코에요. 이미 그 도시나 공간에 담겨 있는 삶을 이해하면 할수록 거기에서 느낄 수 있는 매력이 남다르죠.
오영욱 씨에게 여행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제게 삶은 여행이고, 여행은 삶이에요. 여행하듯 살고 싶어요.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땐, 그래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서울을 여행하듯 살았어요. 만날 같은 곳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걸 발견하고, 즐거워하고, 감동하고… 요즘은 사무실에만 붙어 있어 보니까 더 힘들어지긴 하지만, 계속 이런 생각으로 살고 싶네요.
보통 여행자는 사진에서 자신이 여행지에 속해있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데, 오영욱 씨의 그림은 카페의 1층 구석이나 아래가 잘 내려다보이는 2층에서 관찰자의 시점을 취하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에요.
그런 자리에 앉는 걸 좋아해요. 공간 자체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공간에서 사람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보고 싶은 생각이 있거든요. 조금 오만하게 얘기한다면, 그 건물을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해요.
여행하면서 건축가로서 자극을 받고 마음에 새기게 된 건축물이나 도시가 있었다면?
도시는 로마에요. 학교에서 서양 건축가들의 건축을 접하고, 배우면서 감동했는데, 그 새로웠던 이야기와 이론의 모티프가 2천 년 전 로마에 다 있더라고요. 요소요소에서 그런 걸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 좋았어요. 제일 좋아하는 건축가는 ‘르 꼬르뷔지에’, 건축과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 들었던 이름이었는데, 대학 2학년 때 한 달간 떠났던 프랑스, 이탈리아 배낭여행 길에 그의 건축물을 처음 봤어요. ‘라 뚜렛뜨 수도원’이었는데,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마음이 쿵쿵 울렸어요. 공간 자체가 주는 힘이 컸죠.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에 거대한 콘크리트 박스가 놓여 있는데, 하부를 땅에서 띄워 놓아서 건물은 떠 있는 가운데 자연은 자연대로 그대로 흐르고 있는 형상이에요. 빛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안을 의도적으로 어둡게 만들고 창을 다양한 방향으로 만들어 놓았죠. 시간에 따라 건물 내부가 빛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뀌는 굉장히 감성적인 건축물이었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건축일을 하고 계신데, 어떤 작업 인가요?
본격적으로 틀을 잡고 시작한 건 1년 반 정도에요. 안국동에 작은 한옥을 짓고 있고, 경북 영주에 작은 주택을 짓고 있어요. 또, 전주의 작은 건물 리노베이션을 하고 있고요. 얼마 전엔 초등학교에 아이들의 문화 공간을 만들어주는 일도 했어요.
건축가로서의 꿈이 있다면?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게 꿈입니다.(웃음) 오래갈 수 있는 건물을 만들고 싶고, 이건 제 평생의 화두인데,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것을 만들고 싶어요. 굉장히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 낸 건축물인데, 누구나 ‘한국적이라’ 느끼는 것. 아직은 명확하지 않지만, 우리가 잘하는 것을 토대로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고 싶어요. 그래서 세계 어느 곳에 있어도, 보편적으로 ‘한국적이다’라고 느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두 번째 책의 에필로그에 바르셀로나에서 건축 공부를 하기로 하고 ‘서른하나씩이나 되어버렸지만, 서른네 살 즈음부터 안정적으로 살면 되겠지라 생각하기로 했다’고 하셨는데, 서른다섯인 지금 안정적이라 느끼시나요?
전혀 안정적이지 않죠, 더 불안해졌죠. 흠흠.(웃음)
마치 스케치북을 보여주며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그에 대한 단상을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듯한 인터뷰를 통해 그는 ‘행복을 찾으러’ 바르셀로나로 떠났던 것이라기보다, 발을 딛고 있는 이곳에서의 행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새롭고 다양한 행복을 경험하고 싶어서 떠났으리란 짐작이 들었다. 다시 돌아와 맨손으로 시작할 수 있는 여유, 여전히 안정적이지 않다고 하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짓는 모습은 그의 첫 책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에 담긴 거친 듯하지만 패기어린 에너지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6호 2010년 11월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