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문을 두드릴 때
<시티즌 오브 헬> 전박찬
<시티즌 오브 헬>은 평범한 부부의 집에 불청객 ‘게스트’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게스트는 부부가 서로에게 감췄던 비밀을 폭로하고, 선한 얼굴 아래 가려진 부부의 추악한 민낯을 드러낸다. 말간 얼굴에 강렬한 연기로 작품마다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만들어냈던 배우 전박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 게스트를 맡았다. 전박찬은 치열하고 집요하게 작품을 파고들며 여태껏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얼굴로 관객을 찾는다.
새로운 작업에 대한 기대
주로 극단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인데 올해 첫 작품으로 <시티즌 오브 헬>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사실 올해는 제가 직접 기획한 공연에 집중할 예정이었어요. 배우는 선택받기를 기다리는 직업이잖아요. 캐스팅되길 기다리는 동안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작품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그래서 작년 6월부터 같이 작업하는 ‘여기는 당연히 극장’ 단원들과 차근차근 내가 하고 싶은 공연을 기획해서 올해 하반기의 공연 스케줄을 꽉 채워놨어요. 상반기에는 다른 공연을 하고 하반기에는 제 기획 공연을 이어가려고 했죠. 올 초에 공연하기로 했던 작품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동의하에 공연이 무산됐어요. 그러면서 갑자기 5월까지 스케줄이 비었어요. 이 시간을 어쩌나 하던 참에 <시티즌 오브 헬> 제작사에서 출연 제안을 주셨어요.
작품 참여를 결정할 때 고민은 없었나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에 이어서 공연할 예정이라 더 부담스러웠을 것 같아요.
뮤지컬로 먼저 소개되었기 때문에 두 번째 작업을 하는 느낌도 있었고, 뮤지컬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극단 단원이 아닌 처음 보는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좀 망설였어요. 그런데 제작사에서 제가 평소에 함께 작업해 보고 싶은 배우들로 프로덕션을 꾸리셨더라고요. 오루피나 연출님은 이번에 처음 만나는데, 주변에 어떤 분인지 수소문을 해보니 다 칭찬 일색이더라고요. 이때 아니면 언제 이들과 작업을 해볼까 싶어서 출연을 결심했어요. 물론 대본이 재미있었던 것도 한몫했죠.
이 작품의 어떤 점이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우선 굉장히 끔찍한 이야기를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풀어놓은 게 재미있었어요. 저는 약간 끔찍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어떤 끔찍한 이야기를 배우가 무대에서 잘 전달하면 관객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기거든요. 새로운 질문도 생길 수 있고요. 저는 연극은 관객과 함께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질문이 있는 작품을 좋아해요. <시티즌 오브 헬>이 그런 면에 부합했어요. 처음 대본을 받을 때 제작사 대표님과 번역 작가님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이 작품의 이슈로 제시하셨어요. 맨과 우먼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를 죽게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와 나의 가정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말해요. 이들은 가해자일까요. 아니면 피해자일까요. <시티즌 오브 헬>은 구소련의 대숙청 시대라는 특정 시기가 배경이지만 시대를 초월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이번 작품에서 정체불명의 방문객 ‘게스트’ 역을 맡았어요. 평소 이미지를 고려하면 전박찬이 연기하는 게스트가 쉽게 떠오르지 않아요. 게스트를 어떻게 연기할지 생각해 둔 게 있나요?
맨처럼 사연 있는 젊은 남자 역할은 많이 해봤지만 게스트와 비슷한 인물을 연기한 적이 없어서 너무 재미있어요. 첫 대본 리딩을 마치고 배우들끼리 게스트는 루시퍼다, 광대다 이러면서 의견이 분분했어요. 다 맞는 말이에요. 제 생각에 게스트는 뭐든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나이와 성별 구분도 없고요. 게스트를 어떻게 연기할지 여전히 고민 중이지만 저의 목표는 뭐가 됐든 관객들이 대한민국에서 남성으로 태어난 마흔두 살의 아저씨가 무대에 서 있는 모습으로 보지 않게 하는 거예요. (웃음) 관객들이 게스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여지를 많이 만들어두려고요. 지금까지 제가 분석한 게스트는 골 때리는 메시아 같은 느낌이 있어요. 사이비가 아니라 진짜 인간 구원의 측면에서 게스트는 맨과 우먼에게 구원의 길을 분명히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이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예요.
상대 배우와 연기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조금 달라질까요?
물론이죠. 상대 배우와 연기를 주고받으면서 생기는 해석과 질문이 있으니까요. 특히 우먼 역할 배우와의 호흡에 따라 많이 좌우될 것 같아요. 저희끼리는 이 작품을 우먼을 중심으로 풀어나가기로 하고 연습을 시작했어요.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을 우먼이 담당하고 있고, 또 극 중에 우먼이 중심일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정황들이 많거든요. 동선도 우먼을 중심으로 짰어요. 우먼이 맨과 게스트의 움직임을 제시하는 셈이죠. 우먼의 에너지가 가장 크다 보니 게스트 역시 우먼과 어떻게 연기를 주고받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게다가 우먼만 더블캐스트라서 어느 배우와 연기하느냐도 영향이 있을 것 같고요.
앞서 이번에 함께 공연하는 배우들과 평소에 함께 작업해 보고 싶었다고 했는데 실제 같이 연습을 해보니 어때요? 처음 호흡을 맞추는 게 어렵진 않았나요?
작업을 해보고 싶은 배우라는 것과는 별개로 굉장히 떨렸어요. 새로운 작업자를 만나면 친해지는 것부터 일이잖아요. 모두 다 처음 만나는 거라 되게 걱정됐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서로의 출연작을 본 상태라, 상대가 무대에서 어떤 배우라는 건 조금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첫 만남에서 다들 얘기는 하고 싶은데 입이 안 떨어지니까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연습실에서 서로 얘기하려고 난리예요. 너무 재미있어요. (웃음) 연기 면에서 봐도 굉장히 편해요. 호흡도 척척 맞고요. 처음 만나면 서로 연기 톤을 어떻게 맞춰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거든요. 근데 게스트는 이 공간의 불청객이잖아요. 연기 톤을 굳이 맞출 필요가 없는 거예요. 맨과 우먼도 그렇게 싸우니까 톤이 안 맞아도 괜찮고요. 지금은 배우들끼리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에 집중하고 있어요.
전해야 할 이야기
가상의 이야기지만 구체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해요. 작품을 준비하면서 역사 공부를 했는지, 아니면 대본에 집중했는지 궁금해요.
이전에 작업했던 작품 중에 히틀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있어서 비슷한 시기의 역사를 공부해 둔 게 있어요.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긴데 코로나19 팬데믹 초반에 외부에 잘 못 나갈 때 연극을 하는 동료들끼리 줌으로 독서 모임을 시작했어요. 그 모임에서 읽었던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나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많이 참고했어요. 읽을 때는 너무 어려워서 고생했는데 억지로라도 읽고 나니 굉장히 도움을 받았죠. 그래도 대숙청의 시대나 스탈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아서 친구에게 자료 조사를 부탁했어요. 제가 직접 조사하면 좋겠지만 연습해야 하니까 자료 조사할 시간이 너무 부족하더라고요. 친구가 『피에 젖은 땅』이라는 어마어마한 두께의 책에서 도움이 될만한 부분을 발췌해 주고 있어요. <시티즌 오브 헬>은 주로 책에서 힌트를 얻고 있어요.
어쨌든 사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허투루 접근할 수 없군요.
극 중에 가방을 챙긴다는 대사가 나와요. 대사만 보면 이 말이 여기서 왜 나오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끔 배우가 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바꾸거나 빼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가방을 챙긴다는 대사가 딱 그런 대사였어요. 자료 조사를 하다 보니 대숙청 시대 사람들은 언제 끌려갈지 모르니까 늘 가방을 싸놓고 있었대요. 이런 건 사소하더라도 배우가 놓치면 안 되는 거죠. 그 대사에 깔린 이야기도 이해하고 연기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관객들이 역사적 사실과 틀린 부분을 너무 잘 찾아내요. 사실이 잘못된 건 다른 게 아니라 분명히 틀린 거거든요. 그래서 역사적 사실은 더욱더 책임지고 공부해야 하는 것 같아요. 가끔 저한테 참 집요한 배우라고 말하는 동료나 관객들이 있어요. 그런데 역으로 질문하고 싶어요. 다들 집요하지 않나요? 좋은 의미로요. 관객도 집요하기 때문에 작품이 하는 이야기를 읽어내는 거고, 배우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는 거거든요. 극장에는 집요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거예요. 집요하게 질문하고, 집요하게 답을 찾는 거죠. (웃음)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뭐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장면이 정말 난해해요. 짧지 않은 독백에서 결국 게스트는 자신의 존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남겨요. 그런데 게스트가 관객들한테 “내 존재는 무엇입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건 이 작품에서 큰 의미가 없어요. 게스트가 내 존재는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우먼한테 네 존재의 의미, 네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거든요. 그게 이 작품의 진짜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게스트가 맨과 우먼이 갖고 있는 비밀을 하나씩 까발리는 건 두 사람을 창피 주거나 단죄하려는 게 아니라 당신은 누구냐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아요. 또 넓게 보면 관객도 게스트가 될 수 있잖아요. 초대받지 않은 저의 게스트와는 다르지만요. (웃음) 본 공연이 시작되면 극장의 게스트로서 관객이 뭘 읽어낼지도 궁금해요.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요하게 파고들만큼 연극에 열정이 넘치는데 한때 연극을 그만두려고 했었다면서요?
연극을 시작하고 과연 이 길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어요. 항상 가방을 하나 싸놓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연극을 그만두려고 할 때마다 저를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난 이제 관둬야 할 것 같다고, 난 이런 것들이 너무 괴로워서 못 하겠다고 했을 때 동료 배우가 네가 실패할 때도 있지만, 네가 한 작업이 관객들한테 어떤 의미를 주기 때문에 계속해서 연극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가 하는 연극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려는 의도가 강하고, 피해 당사자 혹은 소수자,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작품이 많았어요. 결국 제가 해야 하는 얘기가 있기 때문에 연극을 그만두지 못했어요. 그리고 약속된 시간에 극장에 와서 그 얘기를 듣고, 생각해 보고 싶어 하는 관객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연극을 계속할 수밖에 없고요. 만약에 제가 관객들과 같이 생각해 보려고 작품을 열심히 준비했는데 관객이 안 온다? 그럼 그때는 관둬야겠죠.
결국 배우 전박찬이 무대를 떠나지 않은 건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네요?
2013년에 한국 전쟁 양민 학살의 증언들을 모은 <말들의 무덤>이라는 작품을 한 적이 있어요. 사람의 증언을 모아서 ‘재현’하는 작업이었어요. 전쟁으로 사라진 곳을 얘기하는데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굉장히 괴로운 작품이었지만, 그 작품에 참여했다는 게 저한테는 큰 행운이었죠. 덕분에 제가 관객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는지가 명확해졌고, 지금 이렇게 제가 무대에 서서 관객과 눈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아요. 무대에서 <말들의 무덤>이나 <시티즌 오브 헬>의 이야기를 하는 건 슬픈 일이에요. 관객들이 그걸 들어야만 하는 것도 슬프고요. 하지만 아무리 잔혹한 비극이라도 잊지 않기 위해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하는 것 같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4호 2023년 5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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